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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엘프와 나무의 대화
“다들 열심이네.”
나무 아래에 혼자 쭈그려 앉아, 동료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에르나르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해버렸다. 하지만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미안했는지 억지로 입을 다물며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언제쯤 끝나려나.”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나무에 등을 기댄 에르나르는 엘리사를 바라보며,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채 필로우를 덮치는 중이었지만, 마력에 민감한 에르나르에겐 그녀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아…….”
「복 달아나게 뭘 그리 한숨을 푹푹 쉬어.」
“누구세요?”
「뒤를 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뒤를 보는 에르나르. 하지만 거기엔 핀이 뽑아서 사천왕이랍시고 심어놓은 나무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뭐지?”
「눈앞에 있잖아. 무시하지 마.」
“나, 나무?”
나무가 말을 한다!
숲에 사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나무는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와 같다. 나무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가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나무를 보살펴 주기도 하는, 일종의 가족과 같은 존재와 같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무가 대답해 주길 바라며 말을 거는 사람은 없다. 나무는 말을 못하니까. 그것이 상식이다.
“나무가 말을 해?”
「하면 안 되냐.」
건방진 말투로 말을 거는 나무를 보며, 에르나르는 열심히 이 나무에 대해 머리를 굴렸지만 그는 상식 밖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보며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댔다.
“말하는 나무도 있구나. 신기하네.”
「내가 좀 신기하긴 하지. 내 지식에서도 말하는 나무는 없으니까. 그리고 나무라고 하지 말고 토마스 님이라고 불러.」
“토마스 님?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토마스라고 했던 것 같네요.”
「그래. 바로 내가 토마스. 앞으로 위대한 소설가가 될 몸이시다.」
“소설가요? 대단하네요.”
나무가 소설가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나왔지만 에르나르는 아까부터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이야기를 넘겼다.
「놀랐어? 후후.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을 들여서 준비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대작을 한 편 완성해서 주인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 거다. 그때까지 얌전히 나무로 지내면서…… 너, 내 이야기 듣고 있냐?」
“네? 아. 네. 듣고 있어요.”
토마스는 눈치 없는 나무(?)가 아니다. 지금 말을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멀리서 필로우와 싸우고 있는 여성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은, 사랑이라곤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토마스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너 저 여자 좋아하냐.」
“네에에? 아뇨! 절대 아니에요!”
멀쩡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군 쇳조각처럼 달아오른 모습을 보이며 당황하는 에르나르.
처절하게 부정하지만 부정하면 할수록 오히려 긍정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네. 티가 너무 나잖아.」
“으으…… 그릴스 씨도 눈치채던데. 그렇게 티가 나나요.”
「모르는 녀석 눈이 옹이구멍이지.」
뜨겁게 달궈진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만 같아 에르나르는 한숨을 쉬며 그 열기를 밖으로 빼냈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엘리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아.”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가 지금 싸우고 있는데 도와주지 않고 뭐해. 이 멍청아.」
“딱히 위험하진 않으니까요.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다들 포근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좀 설명해 봐.」
“으음. 그러니까, 제가 좀 민감하거든요.”
「민감하다니. 남자가 그런 말 해봐야 변태로밖에 안 보이니까 하지 마.」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마력에 민감하다는 뜻이었어요.”
「마력?」
“예. 토마스 님도 아시다시피 마력이란 게 감정이랑 밀접한 연관이 있잖아요.”
「그래? 그건 몰랐는데. 대현자님의 지식에도 그런 건 나와 있지 않았어.」
“대현자님이요?”
「있어. 그런 분이. 계속 말해봐.」
“그러니까, 마력 소유자의 감정이 변할수록 마력도 따라서 움직이거든요. 소유자가 화를 내면 마력도 따라서 분노하고, 기뻐하면 따라서 기뻐하는. 개인적으로 제가 봤을 땐 뭐랄까. 그 사람의 분신 같은 느낌이 들어요.”
「흠. 말하자면 감정을 표출하면,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마력이 변한다는 거지?」
“네. 그런데 제가 마력에 민감하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랑 다르게 감정에 대해서 잘 느끼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왔을 때, 저희를 해치울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분노나 적의보다는 호기심이랑 아쉬움 같은 감정이 느껴졌거든요.”
「그렇군. 하긴, 이 숲에 들어온 인간은 너희가 두 번째니까.」
“두 번째…… 어? 혹시 첫 번째는 드워프였나요?”
「응?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잘 모르겠는데? 드워프는 왜?」
말을 꺼내고도 아차 싶은 마음에 토마스는 말을 돌렸다.
비록 싸움에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정보는 누설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이번에 의뢰를 받아서 쫓고 있는 대상이 드워프거든요. 사실 진짜로 드워프인지도 감이 잘 안와요. 실제로 만나지도 못했고, 이제 손가락으로 셀만큼 남았다는 드워프를 쫓고 있다니.”
「찾아서 뭐하게. 무기라도 만들어달라고 하려고?」
에르나르가 말을 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의뢰에 대해 이렇게 마음대로 다 말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는 어차피 나무에게 하는 말이고, 이 나무가 진짜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숲의 포근한 분위기에 취해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그냥 말하기로 결심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만 해달라는 의뢰였는데요, 혹시나 죽었다면 가지고 있는 무기를 가져와 달라고 해서요. 추가 의뢰죠 뭐.”
‘꽤나 유용한 정보로군. 애송이.’
딱히 심문을 한 것도 아닌데 열심히 나불거려 주는 에르나르를 보며 토마스가 속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중대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근데 이 정보를 어떻게 전해주지? 소설이 완성되기 전까지 얌전히 나무인 채 지내기로 했는데. 흠. 뭐, 내가 마음만 제대로 먹고 쓰면 금방 멋진 대작이 나올 테니까. 그 때 말하지 뭐.’
「그래서 편하게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군.」
“헤헤.”
「헤헤는 무슨 헤헤야. 저 여자 좋아한다며. 도와주지 않을 거면 응원이라도 해야지. 자고로 여자란 자신을 뒤에서 믿어주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아. 정말이요?”
「그래. 대현자님의 지식이니까 믿어도 돼.」
“근데 부끄러워서…… 제가 응원해 주는 걸 좋아해 주실까요.”
「일단 해봐. 남자는 용기야. 용기 없는 남자는 사랑할 자격도 없다고.」
“그, 그런가요?”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해.」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에르나르는, 엘리사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엘리사 씨. 힘내세요!”
얼굴을 붉히며 다시 모습을 감추는 그녀를 보고 어째선지 에르나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왜 그래.」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토마스는 방금 전 엘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응원을 받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움에 다시 은신한 그녀가, 어딜 봐서 싫어하는 걸로 보였다는 걸까.
「너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며. 진짜로 싫어한 거 맞아?」
“으음. 마력으로 볼 땐 좋아하셨는데, 엘리사 씨는 약간 특이하시거든요. 저에게 호감이 있으신 건 알겠는데 그냥 동료를 위하는 거라고 할까. 마력은 분명 저를 좋아하시는 게 맞는데 하시는 행동은 동생 취급하듯이 다룬다고요.”
토마스는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순간, 섬광처럼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너한테 장난을 친다거나 하는 거야? 네 심장을 두근거리게 가까이 접근한다거나, 어깨에 기댄다거나 뒤에서 껴안는다거나 하면서 ‘이제 다 컸네’, ‘너도 이제 한 사람 몫은 하겠어’라고 말한 건 아니겠지? 거기에 ‘너는 커서 누구랑 결혼할까. 정 갈 곳 없으면 내가 데려가 줄게’라면서 장난도 치고. 그러면서 저 여자도 은근슬쩍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 이 숙맥 같으니라고.’
착각도 이런 착각이 있을 수가 있나.
보통은 누군가 좋아한다며, 도끼병에 걸리는 것이 연애를 해보지 못한 남자들이 겪는 착각이 아니던가! 왜 이 녀석은 그게 반대로 나오고 있을까. 자존심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토마스는 고구마를 삶아먹은 듯한 답답함에 도저히 한마디 해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야 이 멍청아. 호감도까지 알 수 있는 그런 치트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는 거냐. 네가 무슨 러브코메디 만화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작가가 아이디어 고갈로 차기작을 연재할 자신감이 없어서 지지부진하게 억지로 전개시키는 만화 속 주인공이냐고! 서로 좋아하는 게 빤히 눈에 보이는데 답답하게 언제까지 질질 끌 거야. 자존심이 낮은 것도 정도가 있지. 대놓고 널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그걸 몰라주는 게 오히려 여자한테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도 몰라? 으아아아! 답답해 죽겠네!」
“히, 히익!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됐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뿐이니까.」
“그리고 진짜로 엘리사 씨는 저를 동생 취급…….”
「아. 아니라니까. 그게 널 좋아하는 거라고. 마력으로 너도 느끼고 있을 거 아니야.」
“그렇다면 왜 저한테 장난만 치고 동생 취급만 하는 거죠?”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멍청아.」
“에이. 엘리사 씨가 얼마나 털털하신대요.”
「으아아아아!! 야! 여자가 성격이 털털하다고 해서 연애에까지 털털 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 연애는 다른 문제라고! 기가 센 사람이라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부끄러워하는 거야! 저 여자는 그걸 장난으로 숨기는 거고!」
『죽이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때, 핀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나르를 향한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그 특유의 민감함이 에르나르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너, 저 여자 엘프 처음 봤을 때 어땠냐?」
“하아. 하아. 처, 처음 봤을 때요? 적어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는데…… 저분은 대체 어떤 분인가요?”
숨을 간신히 내쉬며 에르나르가 대답했다.
그가 살던 지역은 마물이 드문 지역이라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나와 모험가가 된 후로 마물을 만났던 그는, 마물이 가진 기운이 풍기는 살의에 놀라 두려움에 몸을 떨었었다.
하지만 지금 느낀 공포에 비하면 그 때의 느낌은 온화 그 자체였다.
「누구긴. 폭력성향극대수치부정애내숭엘프지. 신경 꺼. 어쨌든 쟤처럼 여자들은, 아니 사람들은 평상시 모습 하나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여자도 평소엔 너를 동생처럼 대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널 좋아하는 걸 수도 있는 거지. 그 전에 널 좋아한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 네가 둔탱이처럼 눈치 못 챘을 뿐이고.」
“으으…… 그럴까요.”
그때, 필로우가 엘리사를 잡아 나무에 매달았다. 에르나르는 그녀를 보는 순간, 가슴을 뒤흔드는 충격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에, 에르나르! 보지 마!”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크윽. 이 자식은 진성이다. 진성 러브 코메디 주인공이야.’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에르나르는 이런 상황을 겪었음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로 저를 좋아하실까요?”
「아 좀! 그렇다니까! 일단 한 번 말해봐! 사랑한다고! 그렇다고 아무 때나 눈치 없이 말하지 말고! 너한테 저 여자가 장난치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말해! 너도 남자니까 대충 분위기 정도는 느낄 거 아니야!」
“그래도…… 혹시라도 거부하면 앞으로 얼굴을 어떻게 볼지…….”
「으아아아아!!!」
동물 같은 소화기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위산이 역류할 것만 같은 답답함에 결국, 토마스는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그를 포기했다.
「내가…… 졌다……」
“네? 저희 언제 싸웠나요?”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토마스. 에르나르가 그런 토마스에게 재차 말을 거는 사이, 곰과 그릴스의 대결도 끝을 맺었다.
“고오오옴!”
「이겼다!」
“굉장한…… 승부였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기에 그 내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엥? 언제 끝났어? 저 엘프 이야기 듣느라 하나도 못 봤네.』
심지어 세계수인 위그드라실조차.
타인의 연애이야기란 참으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