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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인간 vs 야생
필로우와 엘리사의 싸움은 한쪽이 숨고 한쪽이 찾는,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은 싸움이었다면 곰과 그릴스의 싸움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앞으로의 싸움이 인간 대 야생의 혈전이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멀리서 엘리사의 싸움을 지켜보다 둘을 본 에르나르는,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불똥을 튀기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둘 사이의 신경전이 계속되며 시간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쪽은 곰이었다.
“곰.”
「싸우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은 것?”
“곰, 곰. 곰,”
「첫 번째로, 너는 내 말을 알아듣는다. 어떻게 알아듣는지 궁금하다.」
“그냥 오랫동안 산속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 가능해졌다.”
“곰…….”
「애매한 대답이다……」
그릴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추가로 설명을 더 해주고 싶었지만, 그의 빈약한 말재간으론 떠오르는 추억들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가 7살이던 시절, 어른들에게서 용사이야기를 듣고서 그는 여타 다른 아이들처럼 용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
용사가 되어 멋진 모험을 떠나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꿈꾸기에 거기까지는 다른 아이들과 그릴스는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릴스는 행동력이 강했다는 것이다.
용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스스로 한 질문에 그는 ‘강해져야 한다’라고 대답했고, 그 대답이 빠른 행동력과 만나서 고작 7살이라는 나이에 그릴스는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가출한 그릴스가 향한 곳은 마을 근처의 산. 마을을 정면으로 벗어나려 한다면 누군가에게 걸릴지 모르기에 뒷산을 통해 마을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집 안에 호신용으로 한 자루 있던 목검만을 들고 뒷산에 올라선 그릴스는 용사를 꿈꾸며 세상을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굶주린 야생늑대들이 찾아왔다.
“크르르릉…….”
용사를 동경한 소년. 야생동물에게 잡아먹히다.
그릴스를 찾아 나선 수색대는 그릴스의 옷자락을 발견하고 수색대 대장이 건네준 옷자락을 손에 쥐며 그의 어머니는 오열한다.
그릴스가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천운인지 그릴스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간지럽다.”
바로 조련사의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굶주림에 가득 찬 늑대조차 곁으로 다가와 얼굴을 핥아줄 만큼 엄청난 재능이.
하지만 그런 재능이 있다고 한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멋지게 여행을 떠난다는 결심과는 다르게 산속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되어버렸다.
“나무, 나무, 나무. 나무밖에 안 보인다.”
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린 소년에겐 어느 곳이든 다 똑같은 장소로 보였고, 미아처럼 계속해서 길을 찾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더 깊은 숲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컹!”
“그쪽?”
다행스럽게도 그의 압도적인 재능에 길들여진 동물들이 도와준 덕분에 소년은 위험한 산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태어나 마을에서 자란 시간보다 산속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질 무렵엔 동물과 대화가 가능한 경지까지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 대신, 언어가 발달해야 할 어린 시절을 동물들과 보낸 부작용으로 말투가 딱딱해졌지만.
“곰.”
「또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
곰에게 있어서 먼저 한 질문은 크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말이야 주변에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인간이 알아듣는 것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두 번째 질문이었다.
“곰.”
「나는 곰인가?」
“……?”
너무나도 평범한 질문에 잠시 숨은 뜻이 있는지 고민하던 그릴스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너는 곰이다.”
“곰! 곰?”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평범한 곰인가?」
“평범한 곰이다.”
“곰, 곰곰?”
「혼래빗처럼 희귀하다거나, 전설에나 나올 법한 특이한 곰이 아닌가?」
이제야 곰이 말하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그릴스. 그는 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펴본 뒤에, 턱에 손가락을 대고 기억을 더듬어 본 뒤 다시 대답했다.
“그냥 평범한 곰이다. 산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곰.”
“고오오오옴!”
「말도 안 돼에에에에!」
전투의 시작은, 곰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신호음으로 시작되었다.
“곰! 곰! 곰!”
「왜! 나만! 평범한 거냐!」
곰은 사춘기 시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 고민은 다행히도 위그드라실의 위로로 끝을 맺었지만, 그 당시 했던 고민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고오오옴!”
「나도 특별하고 싶다아아아!」
흥분에 빠져 마구잡이로 앞발을 휘두르는 곰. 그것은 상대를 공격하기보단 자신의 고민을 찢어버리고 싶은 그의 몸부림이었다.
곰의 주변에 있는 자들 중에 ‘평범’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자가 있었던가?
말하고 치유하고 정령으로 변하는 신기한 나무, 곰은 보지 못했지만 애벌레였다던 엘프 핀.
그리고 자신처럼 단순히 동물인 줄 알았던 필로우조차, 모험가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희귀종이었다.
곰은 모험가들이 필로우에 대해 떠드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필로우조차 사실은 굉장한 녀석이었는데 과연 나는 어떨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평범한 곰이다’였다.
“고오오옴! 고오옴!”
「빌어먹을 세상!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흐음!”
육중한 무게로 휘둘러지는 곰의 앞발을 팔뚝으로 막아내며 그릴스는 뒤로 차츰 물러났다.
보통이라면 팔뚝이 부러져야 정상이겠지만, 그는 평범한 모험가가 아닌, 모험가들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A급 모험가. 거기에 파티의 방어를 담당하는 그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했기에 곰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평범한 곰이 아니다?’
보통의 곰이라면 앞발을 휘두르며 다가와 깨물었겠지만, 그릴스는 곰의 공격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무투가와 싸우는 것처럼 움직임과 공격이 상대를 따라 변화하는 무술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릴스는 지금 무투가와 싸우는 것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곰을 평범한 동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말하고 생각하는 곰이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동물들과 생활한 경험이 그의 상식을 약간 비틀었다.
‘먹고 싶지 않았거늘. 하는 수 없지.’
품속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는 그릴스. 그것이 바로 그의 비장의 수였지만, 그의 표정은 심란하기만 했다.
과거, 동물들과 생활하는 산속 생활은 용사가 되기 위한 수련이라는 일념하에 버틸 수 있었을 뿐, 결코 쉬운 생활은 아니었다.
길들여진 동물들이 그를 도우며 마물들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것뿐. 그 외에 모든 생활은 오로지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 의식주.
그것들을 산에서 만족시킬 방법은 전무(全無)했다.
옷과 집에 대해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추울 땐 동물들을 끌어안고 잠을 잤으며, 집이 필요할 땐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거나, 동굴 속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야생에서 수련(이라 하고 생존)보다 더욱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맛없다!”
음식이었다. 마을에서 어머니가 해준 따뜻한 스프와, 부드러운 빵. 입 안에서 감칠맛을 뽐내며 탄력 있게 씹히며 짭짤하게 간이 된 고기 따위를 산에서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른 것은 모두 참을 수 있었지만, 의외로 조련사의 재능 외에도 미각이 뛰어났던 그릴스에겐 매 끼니를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과일 같은 열매를 먹는 것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그런 열매들은 구하기 힘들었기에 특식처럼 가끔 먹을 뿐이었고 대부분의 식사는…….
“벌레 맛없다!”
벌레로 때우기 일쑤였다.
뱀이나 다른 동물들을 식사 대신 잡아먹을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를 따랐기에 친근감을 느낀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대신 택한 것이 바로 벌레. 야생에서의 그의 주식은 바로 벌레였던 것이다.
“이 벌레는 흠뻑 젖은 아빠 신발을 씹는 느낌이다. 이 벌레는 씹으면 안에서 썩은 사과즙이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이 벌레는 먹고 나면 목에 오줌을 싸는 느낌이다.”
매일같이 벌레를 먹다 보니 그 맛을 기억할 정도였다. 단순히 많이 먹은 것뿐만 아니라 그의 혀가 미식가처럼 민감했던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며 고통받는 나날을 보내자, 그에게 특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인간의 몸은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강해지기 마련이다.
벌레 따위에게 영양분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었겠는가. 매일 벌레들을 먹으며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육체는, 마력을 이용하여 먹은 음식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을 반복했을까. 그의 육체는, 이제 먹은 음식의 영양분뿐만 아니라 그 힘까지 마력을 통해 변화시켜 육체에 깃들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걸 먹게 되다니. 마물이랑 싸울 때도 먹지 않았는데.’
비장의 수단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릴스. 벌써부터 그 맛이 떠올라 혓바닥이 목구멍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얕볼 수 없는 위급한 순간. 게다가 방금 전, 대장과 싸우는 핀이 엘리사에게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그의 망설임은 사라졌다.
『죽이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 목소리에 담긴 위압감과 마력은,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핀이 위험한 존재임을 그릴스에게 각인시켰다.
‘어서 해치우고 대장과 합류한다.’
그릴스는 대장을 믿고 있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적어도 대장만큼 강한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조차 깨버리는 강함에 그는 구슬을 입 안에 넣었다.
“크윽!”
씹는 순간 퍼지는 알싸한 향기.
발 냄새를 응축해 유리병에 담은 뒤 차가운 공간에 넣어, 거기에 맺힌 이슬을 혀끝에 대는 첫 맛이 끝나고, 혀 위로 펼쳐지는 머리카락을 씹는 듯한 식감이 그의 입 속을 가득 메웠다.
“곰?”
「동족의 느낌이 난다?」
목구멍에도 미각이 있었던가. 구슬을 잘게 씹어 삼키는 순간, 뜨거운 물에 수일 동안 담궈 썩어 문드러진 마늘의 맛이 위장까지 이어지는 그 길을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그릴스는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내 실수다. 너는 평범한 곰이 아니다.”
팔뚝 위로 올라오는 갈색의 뻣뻣한 털.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잔디처럼 자라나는 수염들.
“너는 특별한 곰이다.”
뾰족해진 송곳니.
“지금부터 제대로 간다!”
그리고 맹수처럼 가늘어진 동공.
“곰!”
「와랏!」
세상에 둘도 없을 야생과 인간의 대결이, 지금 이 자리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