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55화 (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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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토끼와 도적

필로우는 쥐고 있던 끈의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끈에 짐짝처럼 묶여 있어야 할 여성 모험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필로우가 그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위쪽에서 날아오는 섬뜩한 예기를 느끼고 몸을 피했다.

“도적인 내게 그런 결박이 통할 것 같아?”

“소인이 과소평가했소이다. 어떻게 빠져나온 것이오?”

“혼래빗 주제에. 건방떨기는.”

순수한 필로우의 감탄을 비아냥거림으로 받아들인 엘리사가 앙칼진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녀는 아직 묶였던 팔이 아픈지 한 손으로 열심히 팔을 비벼댔다.

“예의가 없으시구려. 비무(比武)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로간의 통성명을 하는 것이 예의지 않소이까. 소인의 성명은 필로우. 무사이올시다.”

“흥. 구식이잖아?”

콧방귀를 낀 엘리사. 그녀가 양손에 단검을 한 자루씩 쥔 채 뒷걸음질 치자, 그녀의 신형이 반투명한 커튼에 가려지듯 희미해져 갔다.

희미해지는 와중에 그녀가 필로우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듯 대답했다.

“엘리사. 직업은 도적. 죽이지는 않을게. 걱정하지 마.”

대사가 끝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필로우는 신기한 것을 보았다며 감탄사를 내뱉으며 귀를 쫑긋 세워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려 하였다.

“놀랍소. 어떻게 한 것이오?”

“열심히, 잘.”

갑자기 필로우의 뒤에서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보이지 않는 그녀의 팔이 필로우의 귀를 낚아챘다. 필로우는 눈을 말똥거리며 그녀를 보려 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공기 중에 녹아 있어 볼 수 없었다.

“죽이지 않는 대신, 승리의 표식으로 그 뿔은 내가 가져가겠어.”

“대체 소인의 뿔에 왜 그리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소이다.”

“네 뿔?”

단검으로 뿔을 자르려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필로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혼래빗의 뿔은 고가에 거래되는 비싼 물건이니 모험가라면 누구나 다 노리는 것이 당연하다.

혼래빗의 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효용도 없는 단순한 뿔에 불과하다. 마력이 특출한 것도 아니며,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예로부터 인간들 사이에선 희귀한 혼래빗이라는 존재에 대해 일종의 상징이 가미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결혼 생활의 번영.

혼래빗이 어떤 존재인가. 평생에 한 번 만나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한 동물이다. 생태를 조사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그 개체 수는 매우 적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선 혼래빗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돌고 있었고,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사람들은 혼래빗에 대해 소문만을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소문들 중 하나가 바로 ‘혼래빗은 번식률이 매우 낮다’라는 것이었다. 번식이 안 되니 개체 수가 적은 것이고, 개체 수가 적으니 희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가까스로 태어난 혼래빗은 기적의 산물처럼 여겨졌고, 그런 기적의 존재인 혼래빗의 뿔에 사람들은 ‘기적처럼 태어난 혼래빗의 뿔이니 지니고 있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한마디로 혼래빗의 뿔은 아이를 원하는 부부들 사이에서 일종의 부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손을 중히 여기는 귀족들 사이에선 혼래빗의 뿔로 만든 장신구는 최고의 선물처럼 여겨졌고, 귀족들이 원하는 물건이니만큼 그 가격은 고가에 거래되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네 뿔은…….”

하지만 굳이 지금 상황에서 이 뿔을 노려야 할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사천왕들과 싸우는 중인데. 엘리사 본인도 왜 이렇게 뿔에 집착했는지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소인의 뿔은?”

정말로 돈이 목적일까? 필로우의 뿔을 가공하여 반지로 만드는 상상을 하며 엘리사는 생각했다. 그녀의 상상은 반지를 귀족들에게 파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얼굴이 빨갛소만? 괜찮은 것이오?”

어느새 은신이 풀린 그녀를 보며, 필로우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위기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것 같았다.

“시, 시끄러!”

그녀가 힐끗 곁눈질로 에르나르를 보았다. 그는 나무에 기대서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엘리사 씨. 힘내세요!”

‘저 바보!’

혹시나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봤을까봐 다시 모습을 감추는 엘리사. 하지만 그녀의 손에 잡혀있던 필로우는 그녀가 한눈을 판 사이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대의 기술은 신기하오만, 모습을 감춘다는 것 외엔 특별할 게 없구려.”

은근히 엘리사를 무시하는 필로우. 그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긁었을까. 그녀의 말투가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그으래? 그런 말은 날 이기고서나 하시지. 혼래빗 주제에 말할 줄 안다고 너무 건방지잖아.”

“솔직하게 느낀 점을 말한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너무 화를 잘 내는 것 같소이다. 혹시 칼슘이 부족한 게 아닌지 싶은데. 편식은 좋지 않소.”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필로우의 말은 무시한 채, 아까처럼 몸을 감추고 몰래 필로우의 등 뒤에서 단검의 날을 세워 몸통을 찌르려고 했다.

『죽이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발톱 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소름끼칠 정도의 전율을 느끼며 손을 멈췄다.

지금까지 모험가가 된 이후로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그녀는 위험도 높은 마물들, 그리고 강함이란 무엇인지 분위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강자들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받은 공포심에 비견될 만한 자는 없었다.

엘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예의 그 이상한 엘프가 있었다. 엘프는 대장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가로워 보였다.

“이런. 아씨도 참. 소인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거늘. 걱정이 많으신 분이외다.”

쫑긋 세운 귀를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필로우는 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핀이 해준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며 엘리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맹렬히 생각하고 있었다.

모험가들과 싸우기 직전, 핀은 그들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너무 빨리 끝내지 말고, 저 녀석들의 실력을 최대한 끌어내 줘. 지켜보고 있을게.”

그 부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필로우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쉽게 끝낼 수 있는 싸움을 질질 끌고 있었다.

처음 엘리사가 은신에 들어간 순간부터, 필로우는 자신만의 커다란 귀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소리로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한계까지 낮춘 숨소리도, 땅을 밟는 조심스러운 발걸음도, 뒤에서 덮쳐오는 그녀의 몸짓마저 전부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전부인 것 같소만. 더 보여주실 것이 없다면 이제 끝내야겠구려.”

그것도 이제 끝.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은신 외에 특이한 점이 없는 것 같았기에 필로우는 이 싸움의 끝을 내려 하고 있었다.

“너, 너희들, 대체 뭐야!?”

아직 핀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맴돌고 있는 엘리사의 다리는 갓 태어난 아기사슴처럼 부들부들 떨리며 제대로 서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A급 모험가.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주먹으로 때리며 다시 힘을 주어 제대로 서서 필로우를 마주보았다.

“처음 말했던 대로요. 이 숲을 지키는 사천왕…… 일 것이외다.”

“후우. 뭔가 이상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겠어.”

그녀의 신형이 다시 공기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필로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건 이미 통하지 않소이…… 다?”

하지만 필로우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그녀가 사라진 것이었다.

“고수는 삼 할의 힘을 숨겨둔다더니 낭설이 아니었소이다.”

‘흥.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그녀의 직업은 도적. 도적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직업으로서 그녀 역시 전투에 관해서라면 자신보다 낮은 등급의 다른 직업을 가진 모험가들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험가들이 높은 랭크로 승격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의뢰의 달성도나 강함도 있지만, 직업에 따라서 결정되는 사항도 있었다.

바로 각 직업별로 파티를 위해 도움이 되는 기술의 보유 여부. 그리고 그녀의 직업인 도적의 경우, 전투를 위한 기술보다 잠입을 위한 기술을 중요시 여겼다.

그녀를 A급 모험가로 승격시켜 준 기술은 바로 완벽한 은신술. 보통의 은신술의 경우 마력으로 몸을 감싸 모습을 가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녀가 지금 사용한 기술은 모습뿐만 아니라 소리와 기척까지 모두 감추는 완벽한 은신술이었다.

이 은신술의 무서운 점은 상대와 닿는 순간, 마력으로 상대의 촉각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킨다. 특별히 공격을 통해 신체가 훼손되지 않는 한, 그녀의 손길이 닿아도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공격수단 없이 오로지 은신에 전심전력을 다한 끝에 그녀가 손에 넣은 기술. 그녀의 인생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특별히 공격을 가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잡아서 바로 포박하면 끝이야.’

필로우를 단순히 말하는 혼래빗이라 판단한 엘리사가 필로우의 귀를 손으로 잡으려 하였다.

“어쩔 수 없구려. 무뢰한에게 사용할 기술이었거늘.”

그러나 그녀의 손이 필로우의 귀를 잡으려는 순간, 필로우가 갑자기 사라지며 모습을 감췄다. 필로우를 찾아 시선을 돌리던 그 때, 그녀는 바닥에 얇은 밧줄이 이리저리 구렁이처럼 돌아다는 모습을 보았다.

“천라지망(天羅蜘網).”

바닥에 떨어진 밧줄이 그들이 싸우던 장소를 촘촘히 얽매이며 조여들자, 보이지 않는 그녀라 할지라도 허공에 밧줄이 걸쳐져 사람 모양의 투명한 공동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단검을 필로우가 눈치채기 전에 단검으로 밧줄을 끊으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필로우가 그녀를 눈치채 버렸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린 필로우. 진심을 다해 움직이는 필로우를 그녀가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갈 땐 아니외다!”

“꺅!”

몸을 조여드는 밧줄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 지른 엘리사는, 짐짝처럼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필로우를 향해 소리쳤다.

“이게 뭐야!”

“그대가 탈출에 제법 자질이 있기에 소인도 어쩔 수 없었소. 소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포박술. 귀갑(龜甲)묶기외다. 무뢰한에게 제일 먼저 사용하려 했지만 아쉽구려.”

“이 변태 혼래빗 같으니라고! 빨리 이거 안 풀어!”

애벌레처럼 매달려 몸을 흔드는 엘리사. 하지만 흔들면 흔들수록 밧줄은 더욱 파고들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에, 에르나르! 보지 마!”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물고기를 낚아 올린 낚시꾼처럼 엘리사를 바라보던 필로우는,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곰곰이 고민하였다.

“흐음. 왜 변태라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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