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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사천왕 등장!
갑작스레 등장한 엘프, 핀을 보며 모험가들은 의구심을 느꼈다.
어째서 위험으로 악명 높은 엘퀴라즈 숲에 엘프가 있는 것인가.
어째서 엘프와 곰이 친구처럼 함께 서 있는 것인가.
어째서 동족들조차 경계심에 만나기 꺼려하는, 그로 인해 번식이 전혀 되지 않아 평생 한 번 만나는 것조차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혼래빗이 저들과 함께 있는가.
“안녕하십니까. 숲의 주인이시여.”
갑작스런 핀의 등장에 당황할 법도 한데 완숙한 경험이 헛된 것은 아닌지, 대장은 대략적인 상황파악을 끝내고 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곳이 이미 주인이 있는 숲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디 저희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처음 숲을 정찰한 순간부터 시작해 그 안을 탐험하는 순간까지 그는 끊임없이 현재 상황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었다. 어쩌면 그 추측은 이 년 전, 의뢰인에게 숲의 마물들이 약해지고 있다는 정보를 듣는 순간부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마물이나 마기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엘퀴라즈 숲만 마물들이 약해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랜만에 방문한 숲은, 악명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평화로웠다.
엘퀴라즈 숲이 다른 숲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전설 속의 마왕과 세계수가 공멸한 곳. 마왕과 세계수…… 마왕의 접점은 알 수 없다.
엘프들이 신으로 모시는 세계수가 있던 곳.
비록 에르나르가 말하길 엘퀴라즈 숲에 살고 있던 엘프들이 마왕과의 싸움에서 대부분 사망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전멸이 아니다.
그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엘프라면, 그리고 신성한 땅이 더럽혀져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반드시 되찾겠다며 온갖 방법을 다 찾아봤을 것이다.
그가 알기론 엘프는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수하는 종족. 나이가 들어 수명이 다한 엘프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장수하는 종족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살던 엘프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르며, 이 땅을 되찾겠다는 목표도 세월의 흐름 속에 희석되지 않고 남아 있을지 모른다.
가진 바 정보를 모두 활용한 추측은 이 정도 선에서 끝났지만, 그는 이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엘프들은 이 엘퀴라즈 숲을 정화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전과 다르게 평범한 숲처럼 평화로워진 이곳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핀의 존재는 그의 가설을 더욱 뒷받침해 주었다. 비록 그것이 틀린 추측일지라도, 한정된 정보만으로 최대한 끌어낸 그는 이 추측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에게 숲은 자신의 집. 그들은 지금 무단으로 타인의 집에 침입한 도둑과 같은 존재들. 자세를 낮추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상황.
최대한 빠르게 오해를 풀어야 한다.
“숲의 주인?”
“곰.”
「분위기로 봐선 대장을 말하는 것 같다.」
모험가들의 대장은 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곰이 마치 사람처럼 말을 거는 것 같아서 내심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 심정은 다른 모험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장처럼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 에르나르가 놀라서 외쳤다.
“곰이……. ‘곰’ 하고 울고 있어?”
“바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살짝 핀트가 어긋난 대사에 엘리사가 태클을 걸었다. 대장도 속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중요한 건 ‘곰’하고 운 게 아니라 인간처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거늘.
하지만 ‘곰’ 하고 말하는 곰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을 그들은 목격하고 말았다.
“소인이 생각하기엔 저들은 상당히 위험한 자들 같소만. 소인의 목숨을 노리지 않았소이까.”
침착했던 대장도 이번만큼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리고 말았다.
“말하는 혼래빗?”
다행히도 그의 작은 중얼거림은 다른 모험가들의 놀람 섞인 목소리에 가려져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혼래빗이 말했어!”
“으음. 혼래빗이 말했다.”
“말투가 이상해.”
평소라면 태클이 걸릴 법한 에르나르의 어긋난 지적도 지금은 말하는 혼래빗이라는 주제에 묻혀서 조용히 넘어갔다.
“그렇지? 침입자들을 혼내줘야겠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숲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엘프분들께서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딱히 문패를 걸어놓은 것도 아닌데 주인이 있는 숲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내 동생을 해치려 한 거야. 그게 진짜 문제지.”
파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핀의 눈동자는 말투와 다르게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험가들의 대장은 그 점을 눈치챘다.
“동생이라니. 그 혼래빗 말입니까?”
“그래. 이 아인 내 동생이야. 막내 동생이지.”
“아씨. 저를 동생으로 여겨주고 계셨소이까?”
‘소인. 베게가 아니었소이다’라며 울먹거리는 혼래빗을 보며 대장은 어딘가 이들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말하는 혼래빗, 야생성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곰, 그리고 푸른 눈동자의 이상한 엘프.
“그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파티를 이끌고 있는……”
“아. 괜찮아. 사과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지금부터 너희랑 싸울 거니까. 감히 사천왕의 멤버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보통의 엘프는 숲의 침입을 매우 꺼려한다. 숲이 곧 자신들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종족과 갈등도 자주 있었는데, 핀이 싸움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침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이 대장으로 하여금 상황을 모면할 해결책을 쉽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 엘퀴라즈 숲의 사천왕이 너희들을 상대해 주마!”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이 엘프는 이상하다. 숲에 침입한 것을 떠나서 매우 호전적이다. 지금도 눈에 깃든 투기(鬪氣)가 대장으로 하여금 검 집에 손을 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유일한 동아줄에게 눈빛을 보냈다. 비록 엘프들이 저마다 사는 숲이 다를지라도 같은 엘프가 하는 말이라면 들어 줄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을 받은 에르나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마디 질문을 시작했다.
“근데 왜 사천왕인가요? 세 분이신데.”
“크윽……”
“에르나르, 이 멍청아!”
“바보다. 에르나르.”
* * *
『그래. 나도 궁금했어. 핀. 사천왕이 아니잖아. 셋이니까 삼천왕이지.』
“그렇지만 삼천왕은 멋이 없잖아요. 자고로 적이든 아군이든 사천왕이 멋지지 삼천왕이라니. 그건 이상해요.”
『근데 셋이잖아. 너, 필로우, 곰.』
“으음. 그러네요, 넷이 아니면 사천왕이 의미가 없는데.”
모험가들을 앞에 두고 나와 대화하는 핀. 핀을 바라보는 모험가들의 눈빛이 동정과 경계로 물들어갔다.
“저 엘프. 어딘가 이상해. 눈동자도 파란색이고. 에르나르. 엘프들도 혹시 미치거나 정신병에 걸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마법으로 누군가와 통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
“근데 파란 눈동자…… 으음. 장로님한테 들어본 것 같은데…… 뭐더라.”
자기들끼리 떠드는 모험가들을 앞에 두고 핀이 당당하게 외쳤다.
“너희들 잠깐만 기다려. 곰. 여기 땅 좀 파두고 있어.”
“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사라진 핀. 나는 핀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볼 수 있었지만, 왜 그곳으로 이동하는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핀이 이동한 곳은 내 주변에 있는 한 나무의 앞. 핀은 그 나무를 껴안았다. 그리고……
“얍.”
귀여운 기합소리와 함께 뿌리째 뽑아버렸다. 아니 왜 지금 상황에서 나무를 뽑는 거야.
그리고 다시 모험가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곰이 파놓은 땅에 나무를 심어버렸다.
“자. 이제 사천왕 맞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당신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숲을 나가겠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콧수염 사내. 하지만 그도 나무가 궁금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만 그 나무가 사천왕 중 한 명입니까?”
“맞아. 지금부터 소개하지. 내 이름은 핀. 여기 이 곰 같이 생긴 녀석은 곰. 이 녀석은 필로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나무가 바로 토마스다.”
……토마스 너였냐. 미안하다. 널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아씨. 나무를 전장에 내보내기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소만.”
“곰.”
「부러지기라도 하면 주인님이 슬퍼하실지도 모른다.」
“토마스를 얕보지 말라고. 이래 봬도 아빠가 두 번째로 이름을 지어준 나 다음가는 녀석이니까.”
그래. 그건 맞는 말인데 그 녀석 이름은 핀 널 위해 거짓말로 지어서 자아도 없는데.
모르겠다. 혹시라도 부러지거나 하면 치료해 주면 되겠지.
“그렇소이까? 흐음. 그건 또 몰랐구려.”
“곰?”
「내가 둘째가 아니었다?」
“그럼 사천왕도 다 모였으니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죽이지는 않을게. 걱정하지 마.”
사천왕. 만화에서 나오는 흔한 악역 집단의 가장 강력한 네 명의 강적들.
보통 사천왕이라고 하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주인공에게 시각적 두려움을 주거나, 첫 등장부터 아군의 목을 베거나 동물의 피를 마시는 등 꽤나 고어한 연출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야 긴장감이 사니까.
……근데 엘프 한 명과 토끼 한 마리, 나무 한 그루에 그런 박력이 있을 리가. 이건 악당이 아니라 그냥 동화 속 등장인물들이 엔딩에서 훈훈하게 모여 있는 것 같잖아. 그나마 곰이 조금 시각적으로 무섭긴 하군.
핀의 경고 서린 말투에 콧수염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우리도 넷. 너희도 넷이니까 일대일로 싸우면 되겠네.”
“이봐! 가만 보자니까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 말을 좀……”
핀이 한 말을 듣고 여성 모험가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 말은 순식간에 그녀의 뒤를 점한 필로우에 의해 막혀 버렸다.
“당신은 소인이 상대해 주겠소.”
“으앗. 뭐야?”
귀에서 얇은 밧줄을 꺼낸 필로우. 그 밧줄에 몸통을 묶인 채 약간 떨어진 곳으로 끌려가는 여성 모험가.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엘프가 달려가려 했지만 곰이 그 길을 막아버렸다.
“곰.”
「방해하지 마라. 일대일이다.」
“으엣. 뭐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 진짜로 곰?”
그때 덩치 큰 모험가가 말했다.
“방해하지 마라. 일대일이다. 라고 말했다.”
『에엥? 어떻게 알아들었지?』
“에엣? 저 말이 해석이 되세요?”
나도 엘프도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나는 혼잣말이라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겠지만.
“대충은. 물러나라. 지금은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 그리고 이 곰은 내가 상대한다.”
곰도 한 덩치 하는데 저 모험가도 덩치가 곰이랑 비슷했다. 둘이 마주보고 서 있으니까 꼭 종합격투기 결승전 시작 전의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럼 대장은 대장끼리 싸워야겠지?”
“……이 방법뿐이라면.”
핀과 콧수염 남자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째 싸울 파트너는 다 정해진 것 같다.
“나는 그럼 나무랑……”
축 쳐진 눈빛으로 나무, 아니 토마스를 본 엘프는 토마스에게 걸어가더니 쭈그려 앉아 토마스에게 등을 기댔다.
“나무랑 어떻게 싸우라고……”
모험가들. 그리고 나의 아이들.
뜬금없이 이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