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53화 (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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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모험가들

숲의 전경을 바라보며 오늘도 역시나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나.

하지만 이 짓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다. 이미 위험한 숲이라고 세상에 알려진 이곳에 들어올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필로우가 발견한 인간들의 장비만 보더라도 결코 산책 삼아 올 만한 숲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장비를 착용한 자들조차 죽어서 아이템을 떨어뜨리듯이 숲에 장비를 유품으로 남기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냥 감시는 그만두고 정령으로 변해 ‘낮잠이나 잘까?’라는 내 안의 속삭임이 커질 무렵, 그동안 밀린 임금을 한 번에 갚아주듯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왔다.

확실히 사람이다. 벨룸처럼 키가 작다거나 하지 않다. 아, 한 명은 귀가 길쭉한 걸 보니 엘프일지도 모르겠다.

『핀! 곰! 필로우! 이리 와서 빨리 봐봐.』

나는 아이들을 부른 뒤 나와 접촉하라고 말했다. 내가 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셋에게 공유되었다.

핀이 내게 기대서 나의 시야를 공유했던 일이 있은 후, 나는 다른 아이들 역시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핀뿐만 아니라 곰과 필로우 역시 내가 보는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때 어째선지 핀은 다른 둘을 꽤나 무서운 눈초리로 째려보았던 것 같다. 지금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기대고 있다.

으음. 여자아이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인간이네요.”

“곰.”

“주공. 인간이오만.”

『……그래. 인간이야. 한 명은 엘프 같고.』

나는 혹시나 핀이 예전처럼 죽이겠다고 날뛸까 봐 조심스레 말하며 마력으로 핀을 붙잡았다.

물론 진심으로 저들을 죽이고자 하면 내 구속 따윈 무시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말의 시간은 가질 수 있겠지.

“아빠. 오랜만에 안아주시네요. 헤헤.”

『응? 그, 그래. 오랜만이구나. 나무로 안아주는 건.』

으윽. 양심에 찔린다. 차마 ‘네가 날뛸까 봐 붙잡고 있었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동안 고민했다. 인간들이 숲에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다른 종족들이 오면 어떻게 할까.

다른 종족들은 일단 나를 돈으로 보지 않는 것 같으니 제쳐두고, 인간들이 문제다. 전직 인간 출신으로서 인간들이 가진 돈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라면 다른 생물이 멸종하든 말든, 같은 인간이 죽든 말든 법을 무시하고 양심을 무시하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물론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다가도 환경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그렇게 되는 게 인간이니까.

그래서 나는 인간이 숲에 들어오면 쫓아내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쫓아내는 게 무리라면 적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쪽으로.

이 숲은 굉장히 넓어서 나를 발견하기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렵다. 어머니처럼 내가 엄청 큰 것도 아니고.

“그럼 저 녀석들. 쫓아버리면 되는 건가요?”

『응? 어떻게?』

궁금한 쪽은 난데 오히려 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아이들을 바라본다. 다른 아이들은 내 대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헤헤. 이건 저만 할 수 있었네요.”

『설마 핀. 아빠 마음을 읽은 거니?』

“비밀이에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는 핀. 내가 더 묻기 전에 핀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대장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작전개시다!”

“곰?”

“아씨, 무슨 뜻이온지?”

* * *

“하아. 여기가 진짜 엘퀴라즈 숲인거야?”

“왜 그러세요?”

“왜 그러긴. 마기는커녕 마물조차 없잖아. 우리 동네 뒷동산도 여기보단 위험하겠다.”

“위험하지 않으니까 좋은 거 아닌가요?”

“말을 말자.”

모험가로 보이는 여자와 엘프가 대화를 나누며 숲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예의 주시하면서도, 그들이 향하는 길목에서 잠복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핀. 정말로 하는 거니……』

“당연하죠. 지난번엔 상대가 안 좋았지만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겠어요.”

숲에 들어온 인간들을 쫓아버릴 방안으로 핀이 생각해 낸 것은, 지난번 벨룸에게 했던 것처럼 함정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함정보다는 직접 나가서 첩보영화처럼 뒤통수를 손날로 가격해 기절시키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핀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내 말에 핀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편이 재미있잖아요.”

쫓아내려는 거냐. 아니면 장난치려는 거냐. 두 가지 다인가.

엘프는 기절시킨 다음에 따로 빼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괜히 장난을 걸기엔 위험한 상대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핀은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저 녀석들 약해요. 괜찮아요. 아빠’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고수는 하수를 보면 대략 그 힘을 예측할 수 있다더니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풀밭이다.”

“이건 거의 들판 수준이네요. 숲인데 이런 곳이 있다니.”

모험가들이 핀이 잠복해 있던 풀밭에 도착했다.

숲이 넓다 보니 별의별 환경이 다 있었는데 이 풀밭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조심해서 간다. 혹시 모를 마물이 풀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장으로 보이는 콧수염 난 사내가 말했다. 뒤에 있던 자들도 그의 말에 동조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풀밭 같은데요.”

“에르나르. 여긴 엘퀴라즈 숲이다. 혹시 모른다.”

곰만큼이나 덩치 큰 사내가 엘프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왜냐하면……

“에이. 탐지마법에도 딱히 걸리는…… 꾸엑!”

“에르나르!”

핀이 함정을 설치한 곳이거든.

“걸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핀이 외쳤다. 귀를 맹렬히 파닥이는 게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함정이 성공한 것이 그렇게 좋더냐.

핀이 설치한 함정은, 고사성어에 나오는 풀을 묶어서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함정. 멋모르고 지나가다간 발이 걸려 넘어지는 꽤나 고전적인 함정이었다.

『근데 핀. 이 함정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니.』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끄아악! 내 얼굴에!”

넘어진 엘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녀석의 얼굴엔 진득한 ‘그것’이 묻어 있었다.

“또, 똥이!”

어디서 구했는지는 묻지 말자. 여기서 제일 많이 먹고 제일 많이 쌀 것 같은 녀석의 것이니까.

“곰. 곰.”

「좋다. 걸렸다.」

“바로 이게 제가 노린 ‘넘어졌는데 더러워졌으니까 집에 가서 발닦고 잠이나 자자’ 함정! 헤헤. 어때요 아빠?”

『함정이 아니라 그냥 개구쟁이들이 장난치는 것 같다만.』

핀 이 녀석. 괴로워하는 모험가들을 보며 즐기고 있다.

무작정 죽인다고 하지 않는, 독기가 빠진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빠졌잖아. 이건 이미 함정도 뭣도 아니라고.

“에, 엘리사 씨……”

“으엑. 가까이 오지 마.”

엘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가오자 여성 모험가가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녀도 핀이 만든 함정에 걸려 뒤로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통수가 향하는 곳엔, 곰이 만들어 낸 그것이 있었다.

“어딜!”

놀랍게도 넘어지는 와중에 몸을 틀어 멋지게 옆으로 피한 모험가. 하지만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엔……

-물컹.

“으아앗! 내 손이!”

하필이면 손을 짚은 곳에 그것이 있었다.

그것이 묻은 손을 최대한 몸에서 멀리 떨어트리려고 하지만, 손이 어디 빠지지 않는 이상 계속 몸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에, 에르나르! 빨리 물을 만들어!”

“하, 하지만 그럼 탐지마법을 해제해야……”

“빨리!”

“둘 다 진정해!”

콧수염 사내가 바닥에 설치된 함정을 조심스레 피하며 둘에게 다가가, 수통을 열어 물을 뿌려주었다. 두 사람은 수통 하나를 다 쓰고도 자신들이 가진 수통까지 이용해 깨끗하게 그것을 씻어내었다.

“으으. 아직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나고 있다고!”

“흐음. 꽤나 질기군. 마법이라도 걸은 건가?”

콧수염 사내는 바닥에 설치된 함정을 칼로 자르려 하지만, 핀이 마력까지 불어넣어 만든 풀이라 잘리지 않았다.

“이런 유치한 함정이라니……. 에르나르. 탐지마법을 해체하고 비행마법을 펼쳐라. 일일이 함정을 다 피하려다간 오늘 중으로 여길 벗어나지도 못하겠군.”

“으으. 네.”

아직도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엘프는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창공의 어머니여. 바람의 속삭임이여. 우리들을 그대들이 있는 하늘까지 인도해 주소서.”

중얼거림이 끝나자 엘프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오더니 네 사람을 감쌌다. 그러자 네 사람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을 벗어난 뒤에 다시 추적을 시작한다.”

‘추적?’

누구를 찾으러 들어온 걸까. 으음. 적어도 나랑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군.

아니, 근데 최근에 숲에 들어온 녀석이라곤 벨룸뿐인데. 설마 아니겠지?

“흐응. 저게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법이구나.”

핀이 하늘을 날아가는 그들을 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딘지 차가운 말투가 의미심장하게 들렸지만, 이윽고 보통 때의 하이텐션으로 돌아와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쫓아가자.”

* * *

이번에도 핀과 아이들은 네 사람을 앞질러 도착할 곳으로 향해 미리 함정을 준비했다. 이번에 준비한 함정은 전과 같이 땅을 파거나 풀을 묶은 원시적인 함정이 아니었다.

“아씨. 굳이 이런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옵니까? 무사로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편이 낫다고 여기옵니다만.”

“되도록이면 정체를 감추는 편이 비밀스럽고 좋잖아?”

“이미 소인이 나서는 것부터 비밀이고 뭐고 없지 않사옵니까.”

“쉿. 평범한 토끼는 말 못 해. 연기해야지 연기.”

모험가들이 다가오는 산길 한가운데에서 필로우가 평범한 토끼처럼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번 작전은 또 뭐니.』

“산길에서 피할 수 없는 강력하고 무서운 적을 만나게 되어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게 만드는 작전이에요.”

『피할 수 없는 강력하고 무서운 적이라니. 필로우가 저러고 있으니까 그냥 눈매 사나운 토끼잖아. 어딜 봐서 무섭다는 거니.』

“아니에요. 산에서 토끼만큼 무서운 동물이 어디 있겠어요. 녀석들이 경험 있는 모험가라면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토끼를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구하러 돌아갈 거예요.”

『무기?』

“성스러운 투척형 폭탄이요.”

……핀. 진짜로 쟤들이 네 예상대로 움직이면, 환생자가 아닌지부터 의심이 들 것 같구나. 그것도 영화 쪽으로 지식이 빠삭했던 환생자.

“온다. 필로우. 힘내!”

“소인에게 힘내라고 해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험가들이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면서 산길을 올라, 마침내 필로우와 마주쳤다.

여성 모험가는 필로우를 보자마자 안색이 환해지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혼래빗이다!”

“뀨우?”

굉장한 위화감이다.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는데 ‘뀨우’ 하고 우는 토끼라니.

위험한 동물로 보일 거라는 핀의 기대와는 달리, 모험가들 눈엔 ‘혼래빗’이라 불리는 동물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마에 뿔이 있어서 혼래빗인가.

어쨌든 저 여자 모험가가 저리 좋아하는 걸 보면 그냥 평범한 애완동물일지도.

“에르나르. 도망 못 가게 마법으로 구속해. 저 뿔 하나면 엄청 짭짤하다고.”

비싸서 그런 거였냐!

“그냥 토끼 같은데 그 정도입니까?”

“에르나르.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도망치기 전에 빨리 잡아. 평생을 모험가로 살아도 한 번 볼까 말까한 생물이라고. 겁도 엄청 많아서 마주치기도 전에 도망간다고 들었는데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게 천운이야! 뿔을 잘라서 가공만 잘하면 귀족들이 엄청 비싸게 사준다고.”

“그런가요?”

엘프가 콧수염 남자를 흘끗 쳐다보자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잡을 수 있다면 좋지’라고 대답했다. 그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엘프가 중얼거리며 마법을 시전했다.

“나의 바람에 답하여, 내 앞의 적을 구속하소서.”

“음?”

엘프의 몸에서 또다시 마력이 흘러나와 필로우를 감싸려고 했지만, 필로우가 ‘뀨우’가 아니라 제대로 된 말을 하며 옆으로 피했다. 엘프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외쳤다.

“자, 잠시만요!”

또다시 중얼거리며 마법을 시전하는 엘프. 하지만 필로우는 마력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요리조리 피해버렸다.

“이상한 기운이…… 아니, 뀨우?”

“어? 방금 혼래빗이 말한 거 같은데?”

“잠깐. 모두 뒤로 물러나!”

제일 앞에 있던 콧수염 남자가 팔을 펼치며 뒤로 물러나자, 다른 모험가들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필로우를 보는 표정은, 매우 진지해서 생사를 오가는 위험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전설의 혼래빗’일지도 모르겠군.”

“전설의 혼래빗이라니. 대장. 무슨 말이야."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이야기지만, 천 년에 한 번씩 혼래빗 중에 강력한 개체가 태어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힘은 매우 강력하여 접근하는 순간 목이 달아난다고 하더군.”

“혼래빗이?”

“처음부터 수상한 것 같더라니. 눈빛을 봐라. 당장에라도 우리 목숨을 노릴 듯한 눈빛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네요.”

“만일 진짜로 저게 전설의 혼래빗이라면 우리들로선 무리다. 전설에 따르면 전설의 혼래빗은 성스러운 투척 무기로만 잡을 수 있다고 전해 내려온다.”

……너네들도 설마 다 환생자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설정이잖아.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에르나르. 다른 길을 찾도록.”

“아. 네.”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는 모험가들. 필로우는 이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핀이 숨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상대도 제대로 파악 못 하는구나. 역시 안 되겠네.”

핀이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멈춰라! 모험가들이여!”

“엘프?”

숨어 있던 핀이 모험가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모험가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핀을 바라봤다.

핀은 아까의 진지한 표정은 사라지고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들은 엘퀴라즈 숲의 사천왕!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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