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52화 (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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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엘퀴라즈 숲(2)

노련한 눈매의 남성은, 어둠으로 적막한 들판 위에서 그 눈으로 저 멀리 떨어진 숲 어귀를 보고 있었다.

석양이 지고,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에서 혼자 있다는 공포감에 주위를 둘러볼 법도 한데 그의 시선은 오로지 숲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바람이 허리까지 자라난 들풀들을 흔들며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의 파도 속에서 그는 작은 위화감을 느끼고 검 손잡이를 잡고 근육을 긴장시켰다.

‘크군. 대략 곰 정도의 사이즈인가. 거리는 1분 내외.’

A급 모험가라는 명성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잡음 속에 섞인 이질적인 발소리를 잡아냄과 동시에, 그 소리의 주인이 어떤 크기이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지까지 파악해 냈다.

“그릴스인가.”

그는 이미 발소리에서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출수를 준비했던 손을 내렸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동료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야영 준비 끝났다. 다들 기다리고 있다.”

“함께 가지. 충분히 둘러봤으니까.”

야영지로 돌아가는 와중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군.’

그릴스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면 그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라? 대장. 어디 다녀오셨어요?”

두 사람이 야영장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엘프, 에르나르가 반겨주었다. 그릴스는 아까 일이 아직 잊히지 않는지 엘리사와 에르나르의 위치를 먼저 눈에 담았다.

둘은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거리를 두고 있어서 그릴스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잠시 정찰을 하고 왔다. 마물은 안 보이는군.”

보고를 하듯 말을 마치고 모닥불 앞에 앉는 대장. 에르나르는 ‘그렇구나’라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곧 본인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달은 그는 의문을 표했다.

“마물이 없다고요? 숲 경계로 정찰 가신 거 아니었나요?”

나뭇가지로 만든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쑤시며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호는 에르나르의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제가 알기론 엘퀴라즈 숲만큼 마물이 활개 치는 곳은 없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대장이 답해주기를 바랐지만 대답은 없었다. 모닥불에 비친 대장의 얼굴은 혼자만의 세상에 떠난 듯이 보였다.

괜스레 무안해진 에르나르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자책하듯이 자기 자신을 탓했다.

“아하하하. 모험가 생활도 얼마 안 해본 제가 말하긴 좀 그랬나요? 이 숲은 처음이라…….”

“뭘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나도 처음이니까 걱정하지 마.”

옆에서 엘리사가 그를 나무라듯 말했다. 그냥 듣기엔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에르나르를 변호해 주는 것이라고 그릴스는 생각했다.

“엘리사 씨도 처음이라고요? 베테랑이시잖아요?”

“베테랑이라고 다 이 숲을 방문하는 건 아니야. 돈도 좋지만 위험하기만 한 이 숲을 왜 오겠어.”

“하하……. 그런가요? 여러분들은 뛰어나시니까 한 번씩 와보셨을 줄 알았는데.”

“뭐,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와본 적 없다는 뜻이야.”

“예? 세 분은 쭉 함께하신 게 아니었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처럼 젊은 여자가 저런 노땅들이랑 처음부터 함께했을 리가 없잖아. 너, 내가 몇 살인 줄 알았던 거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으에에…….”

“으응? 뭐라고? 지금 장난해?”

엘리사는 에르나르의 볼을 꼬집고 죽 잡아당겼다. 뭉개진 소리로 잘못했다고 비는 에르나르. 그런 모습조차 그릴스의 마음에 염장을 지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 두 사람은 열심히 꽁냥거렸다.

“대장과 나는, 2년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다. 그리고 엘리사는 그 일이 있고 3개월 뒤에 들어왔다. 모르는 것이 당연.”

“그렇군요.”

볼을 쓰다듬으며 엘리사를 힐끗 보는 에르나르. 엘리사는 아직도 다른 두 남자들과 연배를 비슷하게 본 에르나르에게 화가 안 풀렸는지 곁에 앉아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좀 아셨나?”

“하하…….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물어보기라도 하던가.”

“2년 전, 의뢰 때문에 이 숲에 온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연예 진척도가 더 진행되기 전에 그릴스가 재빨리 타이밍을 끊었다. 두 사람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그릴스에게 집중했다.

“의뢰 내용은 간단했다. 숲 근처로 들어가 마물들의 흉포함을 조사하는 것.”

엘리사와 에르나르가 침을 삼켰다. 엘퀴라즈 숲으로 단 두 사람이 들어가서 마물들을 조사하라니. 자살 행위지 않는가.

그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라니. 의뢰인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두 사람에게 원한이 있는 자였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조사가 필요한 이유를 의뢰인이 말했다. 숲의 마물들이 약해지고 있다고.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액수를 들이밀었다.”

“거절하지 않으셨군요.”

그릴스가 그 때를 생각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 때문은 아니었다.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막 A급 모험가로 승급한 참이었고, 그 때문에 혈기가 넘쳤다. 우리에게 이런 의뢰를 했다는 것부터 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우리는 고민 없이 수락했다.”

엘퀴라즈 숲은 최고의 위험지역. 이 숲에 관련된 의뢰는 모험가 길드에서도 제한하고 있으며, 설사 의뢰가 들어온다 해도 A급 모험가가 아닌 이상 의뢰의 내용을 듣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설사 A급 모험가라 할지라도 확실하게 실력을 인정받은 자가 아니면 길드에선 의뢰를 알리기 꺼려했다. 그런 의뢰를 막 승급한 두 사람에게 알려주었으니, 이 둘이 그 당시 얼마나 기뻤을지 에르나르는 상상할 수 있었다.

“역시 두 분이시네요. 무사히 다녀오셨겠죠?”

물어보고도 에르나르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며 아차 싶었다. 여기 멀쩡히 있다는 것 자체가 무사히 다녀왔다는 뜻이었으니까.

“확실히 저 숲의 마물들은 보통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악명처럼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숲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럼 정말로 숲의 마물들이 약해진 거였나요?”

“자세히는 모른다. 오히려 그쪽은 엘프인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러네. 에르나르, 넌 엘프잖아. 엘퀴라즈 숲에 대해 모르는 거야?”

세상에는 엘프들이 숲의 주민이라 알려져 있었다. 특별히 강함을 동경하는 자가 아니면 약한 인간과는 달리 엘프들은 대부분이 모험가들만큼이나 강했고, 그러한 강함은 인간들이 다가가기 힘든 깊은 숲속에서 살 수 있는 생활의 원천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이 알기로는, 전설에 따르면 엘퀴라즈 숲은 세계수라는 거목이 지키고 있던 숲이라 들었다. 그리고 그 세계수 곁에는 엘프들이 함께하고 있었노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엘프라고 다 이 숲에 대해 아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엘퀴라즈 숲에 살고 계시던 분들은 마왕 때문에 거의 다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마왕이라니. 그거 진짜였어?”

엘리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녀도 마왕에 대해서 듣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어린 아이들의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저도 장로님께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라, 자세한 건 몰라요.”

“그래도 말이 나왔다는 건 진짜로 있었다는 거네. 굉장한걸. 혹시 세계수도 전설이 아니라 진짜로 있던 거야?”

“세계수님은 진짜로 있었어요. 전설이 아니라고요!”

에르나르가 처음으로 엘리사에게 화를 냈다. 엘리사도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세계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어색해지려하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맞춰서 그릴스가 말을 이었다.

“진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효능의 포션이나 무기에 세계수라는 이름을 붙여서 경매장에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건 다 가짜예요. 진짜 세계수님으로 만들었다면 엘프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걸요. 제가 알기론 진짜는 용사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는 무기들뿐이에요.”

에르나르는 분노했다. 그는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과거에 존재했다는 세계수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살던 숲에서 세계수를 직접 본 자는 장로뿐이었다. 장로가 말하길 진짜 세계수로 만들어진 무기라면 보는 순간, 엘프라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에르나르는 세상에 나와 세계수로 만들어진 무기라며 상인들이 떠들어대는 장비들을 접할 때마다 분노와 실망감을 느꼈다. 그런 장비들은 하나같이 약간의 마법이 걸린 장비일 뿐이었고 심지어 그중에서는 누가 봐도 싸구려인 물건에 ‘세계수’라는 이름만 붙여서 파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저희들이 모시는 신을 마음대로 상표처럼 쓰지 말아주실래요? 인간들이 자꾸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인간을 싫어하는 거라고요.”

“우리한테 말해봤자, 우리가 한 일이 아닌걸.”

“끄응…….”

이대로 두면 이야기가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릴스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어쨌든, 나와 대장은 의뢰를 마치고 우리가 머물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받은 보수를 가지고 술판을 벌였다.”

“자, 잠깐. 대장이 술을?”

엘리사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대장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술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까진 대장도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릴스가 곁눈질로 대장을 보았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해도 돼.”

그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대장은 술에 취했고 A급으로 승급한 뒤 처음으로 받은 의뢰를 수행했다는 기쁨에 거기 있는 자들에게 숲에 갔던 이야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대장이 말했다. 엘퀴라즈 숲의 마물들이 약해진 것 같다고.”

“그게 무슨 문제가 됐다는 거죠?”

“확실히 악명에 비하면 마물들은 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모험가들이 쉽게 도전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마물들은 약해졌지만 마기는 악명 그대로였으니까. 정화의 구슬이 없었다면 우리들도 무사히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장이, 그릴스가 하려는 말을 이어받았다. 그릴스는 입을 다물고 대장을 바라봤다.

“내 말을 듣고, 이름 모를 모험가가 눈을 불태웠었다. 나는 그때 취해 있었고, 엘퀴라즈 숲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그에게 말했었다. ‘정화의 구슬만 들고 가면, 자네 정도면 마물들 몰래 숲을 헤집고 다닐 수 있을 거야’라고.”

모닥불을 둘러싼 그들 사이에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름도 모를,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과 B급 모험가라는 사실뿐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해버렸지. 별거 아니라니. 우리가 그때 들어간 곳은 겨우 숲의 초입 부근에 불과했는데 말이야. 겨우 그걸로 숲을 정복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서 나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여버렸어. 그날 이후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 그를 본 적이 없다. 그 후로 나는 헛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술을 끊었지.”

에르나르도, 엘리사도 침을 삼켰다. 대장 때문에 한 모험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런 숲에 내일 들어가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 두 사람은 B급 모험가에서 A급 모험가가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엔 숲의 초입 부근이 아니라 대상을 찾으러 깊숙이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엘퀴라즈 숲의 마물들이 약해졌다는 건 헛소리가 아니니까.”

“네?”

에르나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번과 확실히 다르다. 숲을 정찰해본 결과, 마물은커녕 마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의뢰인이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깊숙한 곳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목표도 그곳까진 들어가지 못했을 테니까.”

숲이 초행인 엘리사와 에르나르를 위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두 사람은 ‘그럼 목표가 마물에게 물려갔으면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잖아’라고 해석했고, 도적인 엘리사는 자신의 단검과 도구들을 자기 전에 체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르나르는 아까부터 가호에 필요한 마력을 체크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라. 위험하다 판단되면 바로 빠질 테니까.”

“네에…….”

“대장이 그리 말한다면야…….”

“그럼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날이 밝으면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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