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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엘퀴라즈 숲(1)
끝없이 이어진 들판. 광활한 하늘 아래, 잔잔한 바람이 이름 모를 들풀들을 이리저리 흔들며 장난치는 조용한 땅.
야생동물도, 몬스터도 보이지 않는 들판은, 한가족이 나들이 삼아 잠시 머물며 반복되는 일상의 활기를 불어넣기 좋은 장소로 보였다.
하지만 이 들판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일부 강한 힘을 인정받은, 용감한 모험가들만이 때때로 의뢰를 수행하러 찾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태양이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지금, 네 명의 모험가가 하룻밤 머물 야영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로 들판에 자리 잡았다.
“에르나르. 그러다가 대장한테 혼난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엘프 모험가. 에르나르는 모닥불에 불을 붙이기 위해 화염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에게 핀잔을 준 젊은 여성 모험가, 엘리사는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엘프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으앗. 왜 때려요.”
“바보야. 그러다가 네가 가호를 걸어주지 못하면 우리 전부 마물이 돼 버린다고.”
“저도 알아요. 전원에게 가호를 걸어줄 마력은 충분히 모아놨다구요.”
억울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하는 에르나르의 이마를, 그녀는 이번엔 중지를 이용해 더 강하게 딱밤을 날렸다.
“아앗. 또!”
“유비무환이라는 말 몰라? 좀 더 모아둬. 시집도 못간 처녀를 숲에서 마물로 살게 할 셈은 아니겠지?”
이마가 달아오를 정도로 문지르던데 에르나르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엘리사를 바라보며 입을 우물쭈물 거렸다. 그런 답답함을 싫어하는 엘리사는 손을 내밀며 또 딱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손짓에 에르나르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경계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말을 마치고 그녀는 풀숲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화장실. 여자한테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야.”
“평범한 여자는 화장실 간다고 당당하게 안 말하거든요.”
뒤쪽으로 손을 흔들며 풀숲으로 사라진 그녀의 자취를 바라보던 에르나르는, 아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으면 이런 마음고생은 안 했다고요…….”
“에르나르.”
뒤에서부터 덮쳐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에르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품에 오늘 밤 사용할 땔감을 잔뜩 안고 돌아온 동료 그릴스가 안고 있던 나뭇가지를 모닥불 옆에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백은 빠르면 좋다.”
“무, 무슨 소리세요?”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 한 번 실수로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말했었나? 추측해 보려 했지만 에르나르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생각할 수 없었다.
“보면 안다. 모르는 게 바보다.”
“그릴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네가 우리 파티에 들어오기 전부터.”
에르나르가 그들과 함께 파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과 만나고 나서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그런데 그 전부터 눈치를 챘다는 것은 만난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마, 말도 안 돼.”
“좋아하는 티를 너무 많이 냈다. 모르는 놈이 바보지.”
곰 같은 덩치의 사내, 그릴스는 ‘대장’과 함께 모험가 생활을 시작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온갖 의뢰를 수행하면서 위험을 감지하거나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돌파구를 찾아내는 등 눈칫밥이 꽤나 두껍게 쌓인, 함께하면 든든한 동료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애다운 연애조차 해보지 못한,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노총각이었다. 단순히 모험가 생활로 인해 한군데서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애를 하지 못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가 연애를 하지 못한 이유는 그런 쪽에 대해서 완전히 둔감한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릴스조차 에르나르가 엘리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놈은 세상에 눈먼 봉사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 늦으면 다른 사람이 채갈지도 모른다.”
“……저도 알아요.”
매번 ‘이번 의뢰가 끝나면 고백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의뢰가 끝난 뒤엔 제대로 말 한마디 걸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끼지만, 혹시라도 거절당해 지금의 관계마저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 언제나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만 있었다.
“근데 저 혼자 좋아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에르나르는 그녀가 자신을 항상 어린아이처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험가로서 초짜에 불과했던 자신을 여러모로 도와주며 키워주는, 호감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미숙한 자를 돕는 선의이자 동료로서 가지는 호감이지, 결코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에르나르는 믿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 엘리사는 그렇게 나쁜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에르나르가 답답하다는 듯 그릴스가 뭐라고 하려는 그때, 숲에서 돌아온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가 간지럽더라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아무것도.”
“흐응. 그래? 수상한데.”
그릴스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엘리사. 하지만 철벽처럼 두꺼운 그릴스의 얼굴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칫. 안 알려줄 거야?”
그녀는 몇 년간 함께해 온 이 곰 같은 동료에 대해 꽤나 신뢰가 쌓여 있었다.
뒤를 맡기면 제 한몫해 내는 동료란 그리 쉽게 만날 수 없는 존재였고, 그는 한몫이 아니라 여러 몫을 할 정도로 유능한 동료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에는 한 줄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재미없는 녀석.’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는 표정이나 뭉툭한 칼로 뭉툭하게 썰어낸 진흙벽돌 같은 말투, 언제나 진중하게 행동하는 몸가짐 등이 그녀에겐 믿음직하지만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각인시켜 준 것이다.
“그럼 우리 에르나르한테 물어볼까? 둘이서 무슨 이야기 했어?”
대신 몇 년 전에 동료가 된, 아직은 미숙한 엘프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 엘프가 파티에 들어온 뒤로, 꽤나 놀리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녀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동료들보다 이 엘프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저어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은 더욱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는 그만의 열병으로서, 오히려 가면 갈수록 그 상태는 심해지고 있었다.
“저엉말로오?”
“저, 저기…….”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장난으로 시작한 엘리사도 이건 너무 가까운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당황하는 에르나르의 얼굴이 재미있고, 평소보다 훨씬 신선하게 다가왔다.
“너무 가까우신데…….”
“왜에? 내가 부담돼?”
에르나르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에, 입을 벌리면 혹시라도 입 냄새가 날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렇다고 뒤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다리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말 안 하면 계속 가까워진다?”
굳어 있는 에르나르는 대답도, 피하지도 못했다. 이 상황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선택뿐.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맞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살짝 입을 맞추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장난과 호감이 뒤섞인 그녀의 마음은 그녀를 부추겼고 이내 두 사람의 얼굴은 더욱 가까워져 숨결마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엘리사가 에르나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려는 순간…….
“엘리사. 대장이 안 보인다.”
땔감 정리를 끝낸 그릴스가 갑자기 엘리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방금 전의 입맞춤 미수 사건을 떠올리며 조금 얼굴을 붉혔다.
“으응? 아. 아까 숲 근처까지 정찰하러 간다고 했는데?”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엘리사.
에르나르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와 살랑거리며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 그리고 방금 전의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크흠. 흠. 엘리사 씨. 장난은 너무 치지 말아주세요.”
“우리 에르나르 긴장했었어? 에이. 이래서 동정은 안 된다니까?”
“도, 동정이라뇨! 그러는 엘리사 씨도…….”
‘처녀이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려다가, 에르나르가 생각해도 그런 발언은 위험한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눈치 빠른 엘리사는 그가 뒤에 꺼내려는 말을 알아채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나가며 말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사귀기 전까지는 말이야.”
풀숲으로 사라지는 엘리사를 멍하니 보던 에르나르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어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어디 가세요……?”
홀로 동료들과 떨어져 풀숲에 도착한 엘리사는, 얼굴을 감싸 쥐면서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심장소리에 맞춰 후끈거렸다.
“으아아아……. 나 무슨 짓을 한 거야…….”
방금 전에 저지른 짓을 생각하자 그녀는 더욱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르나르에게 장난질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갈 데까지(?) 갈 뻔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릴스, 이 눈치 없는 녀석…….”
그녀는 입술이 닿은 뻔한 것보다 그릴스가 눈치 없이 끼어든 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릴스에 대한 그녀의 평가엔 한 줄이 더 추가되었다.
‘눈치 없는 자식.’
* * *
그릴스는 에르나르가 지펴놓은 장작불이 꺼지지 않도록 모아둔 나뭇가지를 반으로 쪼개 조금씩 넣으며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일렁이는 모닥불 안쪽으로 에르나르와 엘리사, 두 사람의 갑작스런 애정행각이 환상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베테랑 모험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건 의뢰 수행 중일 때도,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였기에, 사람들은 그가 언제나 냉정하고 과묵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비록 겉으론 드러내지 않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감정이 있다.
모닥불 속에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기 직전까지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릴스는 그 환상을 향해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며 환상은 사라져 버렸다.
평소에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릴스도 말로는 딱딱한 말투의 소유자지만 생각 속에서 그의 말투는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선 방금 전의 애정행각에 대한 분노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발 그만 좀 꽁냥거리고 사귈 거면 사귀고 말거면 말라고.’
동료들의 연애관계에 대해 딱히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누가 보더라도 서로 애정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자가 고백을 못해서 그런 건지, 여자가 자기 마음을 잘 몰라서 그런 건지. 그릴스가 보기엔 둘 다였다.
그런 식의, 지켜보는 사람이 더 열불 나는 관계였기에 그릴스는 방금 전의 상황에서 두 사람을 방해했다. 그것은 그동안의 짜증에 대한 작은 심통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애정행각을 벌일 거면 노총각 앞에서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릴스. 38세. 연애경험 없음. 솔로 외길 인생.
그런 그의 한이 담긴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