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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인간의 흔적
“소인은 주공에게 묘생을 맡긴 몸. 소인의 재산을 모두 주공께 드리고 싶소이다.”
필로우 앞에 쌓인, 고철더미처럼 보이는 잡동사니의 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온갖 무기들이 이리저리 뾰족하게 튀어나와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고, 녹슨 갑옷이나 깨진 방패, 찢어진 가방 따위가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이도 모았구나.”
지금의 사건의 발단은,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필로우의 곰 습격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어제, 필로우는 어김없이 곰을 습격하였다. 이제는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은지 필로우의 공격을 몸으로 전부 받아내며 무시하는 곰이었다.
“크윽. 어째서 나의 공격이……. 사술만 아니었으면…….”
『필로우. 사술이 아니라 네 공격력이 약한 게 아닐까?』
보다 못한 나는 필로우에게 은근슬쩍 조언해 주었다. 필로우가 곰을 습격하는 이 일상이 그리 싫은 건 아니었지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좇는 모습이 이제는 동정심이 들 지경이었다.
“오. 주공. 아주 멋진 발상의 전환이외다.”
딱히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었지만, ‘그럼 더 예리하고 강하게 공격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라며 고민하는 필로우에게 그 이상의 진실은 말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필로우는 곰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무뢰한. 나의 결투장을 받아라!”
이제 지치거나 곰에게 두려움을 느낄 법도 하건만, 용감하게 말하며 한 장의 종이를 곰에게 던진 필로우는 곰이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이 숲에서 종이를 어떻게 구한 걸까?
“곰…….”
「귀찮은데…….」
“싸우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도전해 주겠소.”
내가 종이의 출처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필로우의 선언에 곰이 설렁설렁 일어나 싸움을 위해 필로우와 마주보고 섰다.
그 표정엔 일체의 긴장감도 깃들지 않은, 귀찮음 그 자체였다.
“곰.”
「귀찮으니까 먼저 덤벼라.」
“그 말, 후회하게 해주겠소.”
이번에도 빠른 스피드를 장기로 삼아 곰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사각을 노린 등 뒤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필로우.
흙먼지 속에서 필로우의 신형을 놓친 곰은, 본래라면 긴장하며 공격을 대비해야 하지만 어차피 이번에도 토끼의 헛된 발차기일 거라 생각했는지 하품을 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일섬(一閃)!”
“곰!”
한줄기의 날카로운 섬광. 따사로운 햇빛마저 가르며 베기 위해 향하는 대상은 곰. 하품을 하던 곰의 입이 다물어지며 앞으로 재빨리 구르며 그 섬광을 피해냈다.
곰의 뒤통수에 풍성하게 자라있던 털들이, 그 섬광에 스치며 잔디처럼 깎여 둘 사이에서 먼지처럼 나풀거렸다.
“그럼 계속하겠소!”
『그만.』
그동안의 결투는 양자가 다칠 일 없는, 일종의 경기였기에 말릴 생각이 없었지만 이것은 다르다.
나는 필로우가 움직이기 전에 몸을 잡고 둘의 결투를 말리는 신호를 알렸다.
“고, 고오오옴!”
「나, 남자의 생명인 머리가아아아!」
뒤통수를 만지며 비명을 지르는 곰은 어차피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 * *
“어떻습니까. 주공. 지금까지 소인이 모아온 수집품들이옵니다.”
“으음…….”
박력 있는 눈빛으로 날 째려보니 솔직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엔 대부분이 잡동사니들로밖에 안 보이는데.
필로우가 곰과의 결투에서 꺼낸 비장의 수는, 바로 예리하게 벼려진 단검이었다.
거울처럼 광택이 날 정도로 날이 선 단검은 손잡이의 무늬까지 예사롭지 않게 조각이 되어 있어서 꽤나 값이 나가 보였다.
“이것들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소인이 아직 주공을 만나기 전에, 숲을 떠돌아다니며 모은 것들이옵니다. 반짝이는 물건을 보면 이상하게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네가 무슨 까마귀냐.
우선 이것들을 살펴보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그걸 위해서 정령으로 변신한 거니까.
“고마워. 필로우. 소중한 것들일 텐데. 내게 주겠다니.”
“주, 주공!?”
나는 필로우를 무릎위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릎으로 부르르 떠는 필로우의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움찔거리며 도망치려 했지만 이내 기분이 좋은지 내게 몸을 맡기고 손길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아앙…….”
핀이랑 잘 때도 그렇고, 이놈의 신음 좀 안냈으면 좋겠는데. 은근히 야하게 들린단 말이야.
“어라? 아빠? 이건 다 뭐예요?”
수련을 한다며 숲으로 들어갔던 핀이 돌아와 잡동사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련을 한 뒤에 강가에서 씻고 왔는지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응. 필로우가 가져온 거야. 그동안 숲에서 모았대.”
“흐응. 그렇구나.”
필로우를 쓰다듬으면서 핀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핀은 잡동사니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빠. 같이 살펴봐요. 신기한 것들이 많이 있어요.”
“응?”
“끄악!”
그리고 내 손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나는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갔고, 무릎 위에서 아무생각 없이 손길을 즐기던 필로우는 바닥에 굴러 떨어져 꼴사나운 비명을 질렀다.
“필로우. 괜찮니?”
“소, 소인은 괜찮소이다. 주공.”
“아빠. 이건 뭘까요?”
내가 필로우를 걱정하건 말건 핀은 잡동사니를 뒤지더니 기다란 칼을 하나 꺼내며 내게 물었다. 꼭 필로우가 보이지 않는 투명토끼라도 되는 듯한 취급이었다.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럴까. 필로우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이유를 모르겠다.
“그건 레이피어 같은데.”
검신이 얇고 길어 무게가 가벼운 경량형의 검. 핀이 집어든 레이피어를 이리저리 휘두르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이거 좋네요. 헤헤. 제가 써도 되죠?”
“응. 마음대로 하렴.”
어차피 내가 무기를 쓸 일도 없을 테니까. 쓰기는커녕 아까부터 검 한 자루를 들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양손으로 낑낑거려도 도저히 들 수가 없다. 나무로 돌아가서 들면 쉽게 들리겠지만, 검 한 자루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생각해 보니 꽤나 공포스럽다.
“마력이 깃들어 있네.”
핀의 레이피어나 잡동사니들 중에 새것처럼 보이는 몇몇 장비에서 희미하게 흐르는 마력이 느껴졌다.
생명체에 깃든 마력은 아무런 규칙 없이 자유롭게 몸속을 흘러 다니는 반면에, 장비들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일정한 규칙을 따라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마법무기라는 것일까.”
“얍!”
레이피어를 치켜든 핀이 앞을 향해 찌르기를 시전하자, 검끝에서 바람이 뭉치더니 정면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자그마한 구멍이 뚫리며 나뭇잎을 흩뿌렸다.
“재미있네요.”
나는 핀이 놀란 줄 알았지만, 핀은 놀라는 게 아니라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신기한 게 아니라? 마법인데?”
“마법이야 언제든지 쓸 수 있는걸요.”
검을 든 반대쪽 손가락으로 똑같이 정면을 향해 핀이 손가락을 뻗자, 나무에 뚫린 구멍이 머리통보다 큰 구멍으로 바뀌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핀이 마법으로 바람을 쏘아낸 것이었다.
나무는 이제 버티지 못하고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넘어졌다.
그랬지. 까먹고 있었다. 마음대로 마법을 쓸 수 있는데 이런 무기야 장난감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겠지.
“핀……. 굳이 나무를 실험대상으로 했어야 했니? 이 아빠도 나무다만…….”
“아앗! 아빠! 죄송해요…….”
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사과했다. 나는 나무로 잠시 돌아가, 부러진 나무를 세운 뒤 나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아직 부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라 그런지 쉽게 회복되었다.
“근데 필로우. 반짝이는 것들을 모았다면서 거의 다 녹슬어 있네.”
“소인이 처음 구했을 때는 반짝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이렇게 돼 버렸소이다. 그리고 반짝이는 것만 주운 게 아니라 재미있는 것들도 주었소이다.”
필로우가 딱히 장비들을 관리할 리는 없을 테니, 마력이 깃들지 않은 장비들은 다 녹이 슬어버린 거로군.
내게 재미있는 것들이라고 말한 필로우는, 잡동사니들 사이에 있는 가방 하나를 끌고 오더니 그 안에 쏙 하고 들어갔다.
“이렇게 안에 들어가 있으면 포근한 것이 꽤나 즐겁소이다.”
“그러니…….”
고양이냐. 너도 슬슬 정체가 의심된다? 곰이나 너나 본래 종족을 잊고 있는 거 아니야?
“곰…….”
“뭘 그렇게 찾아.”
여전히 한쪽 손으로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는 곰은, 무기나 방어구에는 관심을 끈 채 가방류를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곰. 곰.”
「프로×시아. 머리카락이 허전하다.」
“그러냐…….”
그나저나 나도 뭐라도 하나 쓰고 싶은데. 딱히 나무일 땐 쓸 필요가 없지만, 정령 상태에선 너무 약하단 말이지. 뭐, 이런 약한 몸이라도 쓸 수 있는 거 없을까?
“주공. 이건 어떻소이까.”
“응?”
내가 장비를 찾는다는 것을 눈치 챈 필로우가 귀 안쪽으로 손을 넣더니 칼집째로 단검을 꺼냈다.
짧지만 예리해 보이는 단검은 내가 쓸 수 있을 만큼 작았다.
“필로우……. 그거 어떻게 꺼낸 거야?”
“그냥 귀에서 꺼냈소만. 무사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지 않소이까.”
그건 무사가 아니라 도라×몽이잖아. 이제 슬슬 필로우에게도 태클을 걸기가 귀찮아진다. 역시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애들 중에 정상적인 녀석이 없다.
“으음. 이건 나도 쓸 수 있겠네. 근데 나한테 이걸 주면 필로우는 쓸 무기가 없어지지 않아?”
“괜찮소이다. 이번에 무뢰한을 베면서 느낀 것이 있었나이다. 이 발차기 하나로 살아온 소인에게 검은 너무나도 불편하였나이다.”
‘언젠간 이 두 발로 무뢰한을 짓밟고 말겠소’라며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결의를 다지는 필로우. 이젠 지쳤으니 그냥 단검이나 받아두자.
“꽤나 멋진 검이네.”
저번에도 봤었지만 평범한 검이 아니다. 칼집에서 단검을 뽑자, 내리쬐던 햇빛이 검날을 지나가며 두 갈래로 갈라졌고 아래쪽에 작은 어둠이 생겼다.
뭐야. 이 검. 물리법칙을 위반하잖아.
게다가 손잡이 부분엔 작은 팔각형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안 쪽에 불을 뿜는 용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은 작은 단검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마치 눈동자에 동공을 새겨 넣으면 옛날이야기처럼 용이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이것도 마법검인가.”
상당히 복잡하게 마력의 흐름이 얽혀 있었다. 직접 손대면서 알아보고 싶지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아까우니까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인간일 적에도 컴퓨터 고친다고 잘못 건드렸다가 큰돈을 쓴 적이 있다고. 이런 건 전문가가 아니면 건드리지 않는 쪽이 좋다.
“그나저나 이 숲에도 인간들이 찾아오는구나.”
이리도 많은 물건들이 동물들의 것일 리는 없지 않는가. 확실히 숲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죽어서 남긴 유품이겠지.
무엇을 노리고 이 숲에 들어온 건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이미 죽은 이들에게 추궁할 것이 뭐가 있을까.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그들의 명목을 빌어주며, 이 숲에 부디 나를 노릴 인간들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