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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토끼가 원하는 보상
필로우가 나의 단잠을 위하여 묘생(?)을 희생하며 우리 곁에 머물게 되었다.
뭐, 토끼 하나가 늘어났다고 해서 숲에서의 일상이 변한 것은 아니다.
나무랑 산, 강, 협곡. 대자연의 축소판인 이 숲에서 변화를 가져올 만한 특이점은 없다. 변할 게 뭐가 있겠어.
“허점 발견!”
“곰!”
……안일한 나의 착각이었습니다. 네. 변하네요. 일상이.
“으윽. 비열한 놈. 또 사술이냐!”
“곰…….”
「그냥 네가 약한 거다…….」
필로우는 지치지도 않고 매일같이 곰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
하루 종일 곰이 세상의 전부인 양 그 살벌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금만 틈이 보이면 지금처럼 공격을 시작했다.
“곰.”
「귀찮다.」
“크엑!”
곰이 귀찮다는 듯이 필로우의 공격을 피하자, 목표를 잃은 필로우의 공격은 허공에 붕 떠버렸고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필로우. 괜찮니?』
“헉! 주공! 다 보고 계셨나이까?”
내 목소리를 듣고 몸에 묻은 흙먼지를 뒷발 앞발 총동원하여 재빨리 털어낸 필로우는 단정한 자세를 내게 보여주려는 것 같지만, 토끼가 단정해 봐야 그냥 귀여울 뿐이었다.
『얼굴에 아직 흙 묻었어.』
“이런! 실수를…….”
앞발로 열심히 얼굴을 비비는 필로우. 고양이 세수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 주공……. 머, 머리는…….”
『응? 아.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하니? 미안.』
가끔 그런 애들이 있긴 하지. 머리카락에 목숨을 건, 살짝만 손이 닿아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런 애들. 필로우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싫은 것은 아니오나,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고, 공을 세웠을 때 상으로 해주심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필로우. 뒷발로 땅을 밍기적거리면서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다.
귀엽다. 크윽.
토끼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들은 토끼도 개와 고양이만큼 애교도 있고 주인도 잘 따른다고 하던데 이제 그 말에 공감이 된다.
『그래. 알았어.』
“그, 그리고…….”
길쭉한 토끼귀로 눈을 가리고, 앞발로 얼굴을 가린 필로우가 나무 상태의 내가 아니라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되도록이면 이, 인간 모습으로 쓰다듬어 주시면 안 되는지……. 아뢰옵니다만…….”
크윽. 공을 세운 다음이 아니라 지금 쓰다듬고 싶다. 하지만 그건 바라지 않겠지? 공을 세울 때까지 기다려주지.
『그렇게 해줄게.』
“감사합니다! 주공!”
귀를 파닥거리면서 토끼 입으로 미소 지은 필로우는, 눈매를 더욱 굳히며 곰을 째려보았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간다면 필시 곰은 몸에 구멍이 났으리라.
“반드시 저 무뢰한을 쓰러트리겠나이다!”
아니, 저기 공이란 게 그런 거였어? 어째 좀 이상한데.
그냥 놔두자.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게다가 핀이 더 강해진 후로 곰도 꽤나 심심해하는 것 같았고.
과연 필로우는 곰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그날 이후로, 단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필로우는 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지금의 필로우는 분노와 갈망이 담겨서 안 그래도 빨간 눈이 더욱 빨갛게 물들 정도로 눈빛이 강렬했다.
“곰,”
곰이 엉덩이를 긁는다. 요즘 들어 꽤나 자주 몸을 긁는 것이, 저번에 한 번 씻겨준 후로 다시 때가 생기는 모양이다.
좀 씻어라.
“손이 비었다! 빈틈!”
필로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곰에게 달려들었다. 결과는 뭐, 피할 필요도 없이 그냥 몸으로 받아내고 끝이었다.
“크윽……. 저 사술만 아니었으면…….”
아니 그러니까 그냥 네 공격력이 약한 거야…….
좌절하는 필로우는 본체만체하며 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곰.”
그리고 냇가로 향했다. 드디어 씻을 마음이 든 거냐! 장하다!
“곰.”
씻지 않고 그냥 물만 마신다. 역시 씻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다.
“푸핫! 이 무뢰한! 물을 마시느라 경계를 늦췄구나! 빈틈!”
갑자기 물속에서 필로우가 튀어나오더니 곰의 정수리를 향해 돌진했다.
너 언제 물속에 잠복하고 있었냐. 빠르기도 하지.
“끄으윽…….”
하지만 필로우는 힘이 빠지는지 곰에게까지 다가가지 못하고 그 옆으로 힘없이 떨어져버렸다. 배가 빵빵한 것이 설마…….
“무……. 물을 너무 많이 마셨소이다…….”
잠수가 아니라 그냥 마시면서 버틴거냐. 토끼는 물을 많이 먹으면 죽는다던데. 그렇게나 곰을 쓰러트리고 싶은 거야?
바닥에 쓰러져 힘겨운 숨을 내쉬는 필로우. 곰은 그런 필로우를 보며 헛웃음을 지으며 콧방귀를 끼고 사라졌다.
“콤.”
「훗.」
“크으윽……. 이 무뢰한이……. 우읍…….”
『그래. 그래. 진정해. 우선 물 좀 빼자.』
내가 필로우의 배를 살짝 누르며 위를 가득 채운 물을 빼주고 있는 동안, 곰은 숲에서 이름 모를 열매들을 따와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곰.”
「맛있겠다.」
덩치만큼이나 많은 양의 과일들을 구해서 앞에 늘어놓고 콧노래를 부르는 곰. 그걸 보고 있자니 필로우는 식사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근데 방금 전까지 필로우 녀석. 여기 있었는데 어디로 간 거지?
“허점 발견! 이번에야말로!”
“곰!?”
곰이 큼지막한 과일 하나를 집어 드는 순간, 그 과일 속에서 갑자기 필로우가 껍질을 부수고 튀어나오며 곰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마술사냐. 거긴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야.
“곰……. 곰!”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아니,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단 말이냐!”
공중에서 아직 내려오지 못한 필로우를 그대로 잡고, 곰이 하늘 높이 던져 버렸다.
필로우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숲으로 떨어졌다.
“이 무뢰하아아안! 사술이다아아아아!!!”
물속에서 기습하거나 식사 중에 기습하는 행동으로 봐선 네가 더 무뢰한 같다만. 핀이 열심히 주물러도 다치지 않으니까 내버려 둬도 괜찮겠지?
멀찍이 날아갔지만 속도 하나 만큼은 빠른 필로우는 금방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필로우는 곰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저녁까지 얌전하게 지냈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은 마치 결의를 다진, 전쟁터로 막 첫걸음을 디딘 군인의 눈빛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매우 궁금하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이 찾아왔다.
새근거리는 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뭔가 주물러지는 소리.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다문 옅은 신음.
필로우였다. 며칠간 핀에게 시달리며 고통에 익숙해져 신음이 잦아들긴 했지만 이 정도로 고요하지는 않았었다. 무언가 노리고 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몰래 고개를 돌려 필로우를 살펴봤다. 녀석은 핀의 품에서 조금씩 꼼지락 거리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결전의 시간이다. 무뢰한. 너의 죗값을 치르게 해주지.”
그렇군. 자고 있는 곰을 습격할 생각이었나. 하지만 필로우,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네가 악당이 되어가고 있다만.
“받아랏!”
자고 있는 곰의 머리를 발로 가격하는 필로우. 하지만 나는, 그리고 필로우의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행동이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크윽. 자면서까지 사술을!”
이제 슬슬 깨달아주면 안 되겠니? 포인트는 곰이 아니라 네 공격력이라니까.
응? 근데 왜 갑자기 그림자가…….
“허전해에…….”
“핀……?”
“물렁물렁!”
품이 비어버린 핀이, 잠이 덜 깬 상태로 나를 감지해 버렸다. 필로우를 보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누워있던 나는 핀에게 잡혀 오랜만에 마구 주물러져 버렸다.
“끄으윽……. 핀…….”
“주공! 이런. 아씨. 그만두시오!”
필로우가 말리려고 다가왔지만, 핀의 날랜 손놀림에 귀를 잡혀 내 옆으로 나란히 자리 잡았다.
“헤헤. 말랑말랑……. 두 개…….”
“핀 제발……. 그만해…….”
“아, 아씨! 소인으로 용서해 주시고 주공만은 제발…….”
“헤헤.”
오늘 밤은 참으로 길겠구나.
* * *
“이쪽 방향이 확실한가?”
바닥에 새겨진, 마법으로 인해 파랗게 빛나는 족적으로 보며 사내가 물었다. 사내의 물음에 젊은 청년 엘프는 마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네. 대장. 왜 그러세요?”
중년의 남성. 같은 대원들에게 ‘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내. 그는 몇 년 전부터 함께 행동하고 있는 청년 엘프, 에르나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겨진 눈 너머로 보이는 어둠. 대장은 주변 지역에 대한 지도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어둠 위로 그가 알고 있는 지역의 모습이 하나둘씩 그려졌다. 넓은 초야, 여러 개로 이루어진 봉우리, 폭이 넓고 깊은 강.
그리고 추적하고 있는 상대가 향했으리라 추측되는 목적지.
“대장. 뭘 그렇게 고민해. 설마 똥이라도 마려운 거야?”
“엘리사. 대장 생각 중이다. 놀리지 마라.”
“나도 알거든? 하아. 곰 같이 생겨서는 농담도 못 알아듣는구나.”
“……그 농담. 안 웃겼다.”
추적하고 있는 상대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신체적으로 인간보다 우월한 드워프라 할지라도 노환은 이길 수 없다.
의뢰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드워프의 나이는 대략 1,000세. 평균적인 드워프의 사망 연령은 700세 남짓이므로 이미 경이적으로 오래 산 편이었다.
만일 드워프가 자신을 쫓는 자들을 눈치채고 따돌리려 한다 해도, 노환으로 약해진 육체론 추적자를 따돌리기 위해 목적지가 아닌 곳을 경우해 우회하는 짓은 무리일 것이다.
대장은 그리 생각했다. 그는 숲에서부터 마법으로 추적하는 내내,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급박함을 느꼈다.
목표의 발걸음은 오로지 직선. 함정을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너무 곧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행적처럼 이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나오는 목적지는 오로지 한군데뿐이었다.
“에르나르. 지금부터 최소한의 마력만 이용하도록. 추적마법만 간헐적으로 사용해라. 밤에 있을 노숙에도 경계마법을 사용하지 말도록. 최대한 마력을 아껴둬라. 가호(加護)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호라니. 갑자기 무슨…….”
“엘퀴라즈 숲.”
엘프는 아니, 그 외에 다른 동료들까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아까까지 농담을 던지던 엘리사라는 여인까지. 전부.
“어쩌면 목표는 거기로 갔을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