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48화 (48/200)

=======================================

[48] 소인은 토끼로소이다

“핀. 잠깐만.”

나는 정령으로 변해 핀에게 손을 내밀어 토끼를 건네받았다. 토끼는 두려운 듯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도망갈 생각은 없는지 얌전하게 내 품에 안겨왔다.

“뀨우?”

귀엽다. 확실히 귀엽다. 눈망울이 반짝거리는 것이 만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와 비슷하다.

“말랑말랑해.”

게다가 말랑말랑하다. 일반적인 토끼라면, 아니 보통 동물들은 털 아래로 생각보다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말랑말랑하지 않는데 이 녀석은 핀의 손가락이 푹푹 들어가는 걸로 봐선 마시멜로 마냥 매우 말랑말랑함이 틀림없다.

애초에 토끼가 아니라서 그런가. 하긴, 뿔 달린 토끼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사이즈도 베개 정도 크기로 껴안고 자기 적당하다. 여자애들이 껴안고 자는 인형 크기와 비슷하니 품에 쏙 들어온다.

뿔이 살짝 거슬릴 수도 있지만, 핀에겐 문제가 되지 않겠지.

“좋아. 너로 정했다.”

나는 이 불쌍한 희생양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결심했다. 나를 대신해서 핀이 잘 때 베개 대용으로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생각 없이 아무 이름이나 붙여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대충 이름을 지어줬다가는 토마스가 평범한 나무인 것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을지 모른다.

내 추측에는 이름을 지어줄 때, 신중을 기해 짓지 않으면 내 마력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내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것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지어줄 이름을 생각해 보자. 까딱 잘못해서 마력이 전해지지 않아, 평범한 토끼인 상태 그대로라면, 저녁에 핀의 품 안에서 주물럭당하다가 싸늘한 시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곰도 대충 지었는데. 으음. 그 녀석은 특이 케이슨가?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고민을 하다 보니 문득, ‘이름을 지어줘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핀이 나 대신 이 녀석을 껴안고 잘까? 일부러 이름까지 지어줬는데 ‘토끼 말고 아빠가 더 푹신해서 좋아요’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내가 이름을 지어주면 이상하게도 애들이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 핀을 보라. 그리고 곰을 보라. 누가 이 애들을 평범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름을 지어주면 이 녀석은 더 이상 토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핀이 토끼를 껴안고 자는 것을 거부한다면,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괴상한, 매우 특별한 토끼를 이 숲에 한 마리 풀어 놓는 꼴이 되는 것이다.

곰이 변한 걸 토대로 토끼가 변한 모습을 떠올려 봤다.

아재개그를 즐기고, 무술을 쓰는 토끼. 꽤나 무섭다.

굉장히 고민된다. 마치 로또번호를 찍는 기분이다. 무슨 번호를 찍던 간에 당첨 번호를 보면 찍은 번호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당첨 번호는 찍을까 말까 고민했던 그 번호인 것만 같다. 포기하고 로또를 사지 않으면 그 주 당첨번호는 내가 자주 찍던 번호가 나온다.

찍던지, 찍지 않던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하는 도박의 딜레마.

……토끼 한 마리 이름 지어주는데 오만가지 고민이 다 들다니. 에라 모르겠다. 일단 짓고 보자.

어떤 이름이 좋을까.

토끼? 아니야. 이건 이름도 아니잖아. 이런 식이면 토마스꼴이 날지도 몰라.

토순이? 안 돼. 토끼나 토순이나. 그게 그거지.

털이 복슬복슬하니까 복슬이? 안 돼…… 강아지 이름이잖아.

순간, 섬광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 토끼의 운명은 핀의 베개 대용이 될 운명인 것이다.

“그래. 정했다. 너의 이름은…….”

이름.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부여받는, 인생을 시작하는 단어. 혹자는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고도 말하며, 이름의 중요함을 깨달은 사람들은 ‘작명소‘에 부탁하여 좋은 이름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녀석의 운명을 결정지어 줄 이름을 생각해냈다.

“필로우. 네 이름은 이제부터 필로우다.”

아. 주입식 교육의 문제인가. 아니면 영어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베개’라고 지으면 이상했을 이름도 영어로 지으니 귀에 찰지게 붙는구나.

“뀨, 뀨!”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육체보다 더 깊숙한 내면, 영혼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서부터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력은 토끼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육체에 깃든 것이 아닌, 내가 끄집어낸 곳처럼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더니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리 잡았다.

“자. 필로우. 일어나렴.”

마력이 스며들자 눈을 감고 파르르 떨던 토끼, 필로우는 내 부름에 답을 하듯 눈을 뜨고 귀를 쫑긋거렸다.

후후. 완성이다. 확실히 귀엽구나. 핀 대신 내가 안고 자고 싶을 정도야.

“응? 잘못 봤나?”

눈매가 어째 날카로워 지는 것 같은데. 동글동글한 눈꼬리가 뾰족해지는 것이…….

“에엥?”

인형 같은 얼굴에 그려진 것 같은 순수한 눈동자. 그 눈동자가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듯한 눈은, 점점 각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손이 닿으면 베일 듯, 칼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순정만화 캐릭터의 눈이 아닌, 세계적으로 청부업을 일삼는, 등 뒤에 누군가 서는 걸 싫어하는 암살자가 떠오르는 눈이었다.

“흠!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으앗!?”

내 품을 박차고 뛰어간 필로우는 바닥에 멋지게 착지하더니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주공(主公). 소인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아아.

이건 대체 또 뭐야?

* * *

“소인. 필로우. 묘생(卯生)을 바쳐 주공의 인생(人生)을 곁에서 보필하겠나이다.”

“으음……. 저기. 필로우?”

“예. 주공. 말씀하시지요.”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니?”

이건 180도라고 표현하기도 모자랄 정도잖아. 아까까지의 순수하고 귀엽던 모습은 대체 어디가고,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무사가 돼 버렸냐. 내가 원했던 모습이랑 정반대잖아.

그리고 어떻게 말하는 거야. 곰도 말 못하는데. 이것이 작명할 때 들인 정성의 차이인가.

“소인. 주공에게 힘을 받는 순간, 소인이 바라마지않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나이다. 그 무한한 감사함을 담아 주공을 곁에서 보필하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십시오.”

“대체 무슨 소원인데.”

“소인의 소원은…….”

필로우가 내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곰을 노려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 이러할까. 그 눈에는 불쾌함과 경멸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저 곰과 같이 악한 자들을 벌하는 것이옵니다.”

“너 다 기억하고 있구나.”

“소인이 어찌 잊겠나이까. 그 굴욕의 순간을!”

필로우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래봐야 아기자기한 토끼손이 떨리는 것이라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얼굴 빼고.

“평화롭게 지내던 소인의 숲 속 생활을 고통으로 밀어 넣은 악(惡)! 무뢰한 중의 무뢰한이라 할 수 있는 저자를 응징하는 것이 바로 소인의 소원! 그때를 생각하면 소인, 피가 거꾸로 솟아 심장이 터질듯 하옵니다.”

“그러냐…….”

“예. 주공.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소원을 지금 이루고 싶나이다.”

“어떻게?”

“지금, 숲의 평화를 위해 저 무뢰한을 쓰러트리겠나이다.”

사춘기의 곰이 저지른 행보가 나비효과가 돼서 돌아왔구나. 흐으. 내가 원했던 귀여운 토끼가 무사가 돼 버리다니.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으음. 그래. 원하는 대로 해.”

“감사합니다!”

“곰!?”

「주인님!?」

어쩌겠는가. 사춘기 시절의 일탈이라고 해도, 죄는 죄. 그걸 한때의 방황이라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나는 몰라도, 피해자인 필로우에게 있어선 인생, 아니 묘생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필로우가 어떻게 곰을 이기겠다는 건지도 궁금하고.

“감사합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필로우가 뒷발로 땅을 박차고 곰에게 총알처럼 날아갔다. 머리에 난 특유의 뿔로 꿰뚫어 버리겠다는 듯이 박치기를 시도했지만, 곰에게 그런 단순한 공격이 통할 리 없었다.

“곰. 곰.”

「미안하다. 그만해라.」

“흥! 무뢰한의 말 따위 믿을쏘냐.”

필로우가 곰의 주변에서 뜀박질을 시작했다. 정령의 모습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잔상이 남을 정도의 굉장한 스피드였다. 마치 하얀색 실타래가 곰의 주변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약점!”

“곰?”

곰의 뒤통수로 필로우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곰의 회피력으로도 피할 수 없는 매우 빠른 공격이었다. 굉장하다. 필로우. 다시 봤어.

“곰…….”

「간지럽다…….」

“으윽.,,”

하지만, 빠르기만 빠르다. 곰은 모기가 물었냐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건 어떠냐!”

곰의 몸 이곳저것을 발차기로 가격하며 공격하는 필로우. 그런 필로우의 공격을 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서 엉덩이를 긁고 있는 곰.

아아……! 알겠다. 필로우 녀석. 강해지긴 했는데, 스탯 분배가 엉망이었다. 마치 민첩에만 올인한 전사처럼, 빠르기만 빨랐지 힘이 없는 것이다.

“크윽…….”

분한 표정으로 곰을 노려보는 필로우. 그리고 무협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힘없는 정파의 무인처럼 곰에게 외쳤다.

“사술! 사술이다! 이 간악한 곰 녀석! 대체 무슨 사술을 펼친 게냐!”

필로우. 그것만큼은 말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거 패배 플래그야. 그걸 말한 순간부터 이제 넌 곰 절대 못 이겨.

저렇게 계속 부들부들 떨다간 고혈압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토끼가 고혈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실험할 필요는 없겠지.

“곰. 그만하고 이리와. 필로우. 너도.”

둘을 내 앞으로 부른 뒤, 나는 곰에게 먼저 사과시켰다.

“곰. 예전의 일이라도 네가 필로우를 괴롭힌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필로우에게 진심으로 사과해. 그리고 필로우. 너도 무사라면, 진심으로 하는 사과 정도는 받아줬으면 좋겠어.”

“곰. 곰. 곰.”

「진짜. 진심으로 사과한다. 미안하다.」

“크으윽…….”

필로우가 토끼 특유의 기다란 앞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러다가 입술 터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마지못해 새어 나오는, 불명확한 발음이 들렸다.

“소이…… 도…… 그…… 사과루…… 바다…… 드뤼게…… 쏘…….”

“너 괜찮냐…….”

“하지만! 아직 무뢰한을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오. 사술까지 쓰는 자를 어찌 믿겠소. 내 주공을 보필하면서 계속 지켜볼 터이니, 너무 마음 놓고 있지는 마시오. 악이 다시 싹트는 순간, 이 몸이 단칼에 처단할 테니까.”

“자. 둘 다 사과하고 받았으니 이제 이 사건은 여기서 끝.”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 나는 핀을 돌아보았다. 핀의 눈동자는 필로우에게 꽂혀 있었다.

“귀여워…….”

아직 필로우가 귀엽다고?

“게다가 남자다워!”

“흐응? 소인이 남자……. 끄엑!”

핀이 달려와 필로우를 끌어안았다. 필로우는 핀의 가슴에 파묻혀 말을 잇지 못하고 부비부비 당했다.

확실히 남자답긴 하지.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오히려 남자다운 눈이 플러스 요소가 된 것인가.

“푸핫! 아씨! 이게 뭐하는 짓이오!”

핀에게 아씨라니. 힘을 받으면서 나와 핀의 관계까지 알게 된 건가. 근데 왜 곰은 무뢰한 취급인거냐. 인과응보인가.

“필로우.”

핀의 가슴에서 간신히 얼굴을 빼낸 필로우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을까? 묘생을 바칠 만큼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주공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 * *

그날 저녁.

“하읏……. 아씨…….”

“우웅…….”

“거, 거긴 아니 되오…….”

“헤헤……. 아빠…….”

“소, 소인은 주공이 아니외다. 아흑…….”

“물렁물렁…….”

“주, 주공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쯤은……. 아앗……. 거긴 너무…….”

“말랑말랑…….”

“하으응…….”

오랜만에 편하게 잠을 자게 된, 새로운 가족이 생겨난 보람찬 하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