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47화 (4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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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엘프, 곰 그리고 토끼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왔다.

정령으로 변할 수 있게 된 요즘, 밤에 자는 잠은 내게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정령화는 의외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이 극에 달한다.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시험 전날 밤을 홀딱 새우고 자지 않기 위해 피로회복제를 물처럼 마신 뒤, 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고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난 다음의 몸 상태와 같다.

“끄응…….”

그런 피곤함을 등에 지고 잠을 자는데 깊이 잠들지 않을쏘냐. 분명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질 깊은 잠을 기대하고 있었다.

“흐냐아…….”

근데 나는 지금 잠들지 못하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냐는 것이다.

“핀…… 자니?”

대답은 없다. 깊이 잠든 상태이다. 문제는 그 상태로 날 껴안고 있다. 옴짝달싹 못하고 핀의 품에서 잠을 자야 한다.

“아빠아…….”

“끄으응…….”

문제는 자꾸 팔로 나를 인형 껴안듯이 졸라댄다. 그것 때문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다.

여자애가 가느다란 팔로 곰인형을 부드럽게 껴안고 자는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 상대는 핀이다.

깨어 있을 때는 나름 조절을 하는 것 같지만 잠든 순간부턴, 핀의 품은 내게 있어서 태국 전문 마사지샵의 마사지사처럼 보인다.

“헤헤……. 부드러워…….”

“거, 거긴 누르지 마아…….”

자꾸 내 몸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는데 그 고통은 전문으로 마사지 하는 사람이 몸을 풀어준답시고 근육을 쑤시는 것과 같았다.

애초에 나는 그런 마사지 별로 안 좋아한다고. 게다가 지금 이 모습은 어린애인데 시원하기는커녕 매우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말랑말랑…….”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냐!”

이대로는 안 된다. 내 나무로서의 행복한 시간 중 하나인 ‘정령화 수면시간’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대책을 세워야 해.

* * *

“그리하여 고심 끝에 핀, 너와의 수면시간을 해체…… 가 아니라 곰이랑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네에!? 아빠! 저랑 자는 게 싫으신 거예요?”

“끄응……. 미안한데 아빠 말하는 중이거든?”

“안 돼요, 아빠아! 저랑 같이 자요.”

날 격하게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 핀의 얼굴을 손으로 밀쳐내려 해봤지만, 어린아이의 힘으로 밀쳐낼 압박이 아니라서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핀. 너랑 자는 게 싫은 게 아니야. 가끔은 곰이랑 자고 싶어서 그래.”

“우우……. 근데 왜 저랑 눈을 마주치지 않으시는 거예요.”

왜긴. 착한 거짓말 중이니까 그렇지.

나의 수면 보장을 위해 이런 거짓말은 착한 거짓말로 쳐도 되겠지?

“고호호홈.”

「드디어 주인님이 나의 매력을 깨달으셨다.」

가슴의 털을 쓰다듬으며 내게 매력을 어필하는 곰. 털이 반짝거리는 것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저거 윤기가 아니라 기름기 아닌가.

“곰, 너 대체 언제 씻었니.”

“곰? 곰곰.”

「씻는다? 남자는 씻지 않는다.」

“씻지 않는다고?”

“곰! 곰곰. 곰곰. 곰.”

「그렇다! 씻는 행위는 남자의 수치. 씻지 않았을 때 풍기는 야생의 냄새가 이성을 유혹한다. 그것이 바로 페로몬이다.」

그건 그냥 더러운 거거든? 전형적인 씻지 않는 사람들의 핑계를 대지 말아줄래?

나는 나무로 돌아가 곰을 잡고 숲에 있는 강가로 보내 버렸다. 곰은 강물로 떨어지면서 바동거리며 외쳤다.

“곰!”

「나의 페로몬이!」

그러니까 그건 그냥 더러운 거라고.

“그럼 핀. 잘 자렴.”

“히잉. 알았어요…… 아빠…….”

“곰. 곰.”

「빨리 옆으로 떨어져라. 우리 이제 잘 거다.」

곰을 노려보던 핀은 우리들이 있는 곳에서 옆으로 살짝 떨어져 바닥에 누웠다.

“쳇.”

혀 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정도로 분한 거냐.

“자. 그럼 우리도 누워서 자볼까.”

곰이 먼저 바닥에 웅크리며 누웠다. 내가 생각했던 계획은 곰의 팔이나 다리를 베개 삼아 베고 자는 것이었다.

그 생각은 꽤나 괜찮게 들어맞았고 나는 간만에 편한 마음으로 잘 수 있었다.

“……!”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냄새…….”

강물에 빠트려서 때를 밀듯이 북북 씻어주었건만, 아직 털 깊숙한 곳에 누린내가 남아 있었다. 코를 찌르는 그 향기가, 포근한 잠에 빠져 있던 나를 강제로 끌어내며 시큰한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아직도 냄새나잖아!”

곰을 베고 있던 머리를 일으켜 세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녀석과는 역시 잘 수 없다. 차라리 그냥 땅에 혼자 누워서 자자. 조금 잠자리가 사납겠지만 자다가 냄새에 테러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곰…….”

「도망 못 간다…….」

“히익!”

곰의 거대한 팔이, 순식간에 나를 덮치며 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저항도 못하고 곰의 품에 안겨, 그 풍성한 털 뭉치 속에 코를 박고 말았다.

“우웁.”

냄새의 파도! 이것은 대체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요리만화에서 요리를 먹고, 배경으로 나오는 화려한 오버액션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춤을 추는 무녀들, 꽹과리를 치는 아저씨, 화산폭발과 함께 펼쳐지는 매운맛의 표현.

그것과 같은 환상이 내게 펼쳐진다. 이것은…… 그래. 운동부다.

축구를 좋아하는 건강한 고등학생. 이제 막 어린아이의 티를 벗고 어른의 모습을 보이며 풍기는 그 야리꾸리한 냄새. 운동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하기 전에 양말을 벗어 빨래통에 쿨하게 던져 넣는 그 귀찮은 몸짓.

“아, 빨래하기 귀찮다. 나중에 하지 뭐.”

그런 말로 빨래를 넘긴 것이 벌써 일주일째. 빨래통에 쌓여가는 양말 더미는, 한여름의 습기와 융합해 새로운 냄새의 경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땀에 전 양말, 그 습기를 양분 삼아 피어나는 곰팡이. 하얗던 양말에 번지는 퀴퀴한 푸른색. 베란다에 놔둔 빨래통이건만, 냄새는 그윽하게 흩어져 거실로 풍기고 있었다.

“어디서 나는 냄새지…….”

근원지가 자신의 빨래임은 자각하지 못한 채, 애꿎은 거실만 돌아다니며 수색하는 남학생.

그리고 마침내, 베란다로 나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빨래통을 집어 든다.

“에이. 설마. ……여기서 나는 냄샌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자신의 땀 냄새가 나름 맡기 좋다고 생각한 그는, 양말 하나를 집어 코에 닿을 정도로 얼굴로 가져오는 참극을 벌인다.

아아. 어리석다. 어리석도다.

그런 이미지가 내게 떠올랐다, 양말을 코에 대는 순간,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양말을 집어던졌지만, 나는 후각세포를 파괴당하며 곰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아. 정신이 혼미해진다…….’

냄새 때문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차라리 기절하자. 그것도 자는 거랑 비슷하겠지.

“크엉…….”

하지만 나를 덮치는 곰의 거대한 육체가 보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나무로 돌아와 있었다.

『하아. 언젠간 실험해 보고는 싶었는데……. 이렇게 되는구나.』

정령인 상태에서 육체적으로 큰 데미지를 입으면 나무로 돌아오는 것이었나. 곰 이 자식…….

다시 정령으로 변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누웠다. 핀이든 곰이든 같이 잘 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냥 바닥에 누워서 혼자 자자.

“허전하긴 하네.”

꽤나 허전하다. 이불도, 베개도 없이 바닥에 누워서 자려니 품이 허전하달까. 껴안는 베개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역시 그건 사치겠지.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가…….”

풀이 밟히는 사그락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핀이 내 쪽으로 맹렬하게 굴러오고 있었다. 피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게 굴러온 핀의 손에 붙잡혀 품에 강제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

“아빠아…….”

“너 지금 안 자고 있지.”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숨이 고르다. 확실히 자고 있는 상태가 맞군. 그 상태로 나를 느끼고 굴러 와서 껴안은 거냐. 대체 얼마나 껴안고 자는 걸 좋아하는 거야.

“끄응……. 아. 그렇지.”

나는 정령화를 풀고 다시 나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정령화를 시도하자, 핀의 품에서 멋지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군.

“조금 떨어져서 자야지.”

내가 갈 수 있는 최대 한도인 10미터까지 떨어진 후, 다시 잠을 청했다. 이 정도면 핀도 나한테 오지 않겠지.

하지만 그것은 핀의 잠버릇을 오산한 나의 자만이었다.

“으으……. 껴안을 게 필요해…….”

“핀?”

핀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핀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눈동자에 초점이 풀린 것이 반쯤 잠에 취한 상태인 것 같다.

“푹신푹신!”

“끄악!”

“말랑말랑!”

“그, 그만해! 핀! 일어나!”

“흐에에엑…….”

* * *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

“곰?”

「주인님이 곁에 없다?」

다 귀찮아. 자고 싶다.

곰과 핀이 일어나 내게 인사를 한다. 곰 녀석은 곁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내가 핀과 함께 있는 모습이 의문인 듯하다.

“어라? 아빠? 그런데 왜 나무로 계세요? 곰이랑 같이 주무신 거 아니었어요?”

『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꼭 아빠랑 자야겠니?』

“당연하죠! 아빠랑 자는 게 제일 행복하게 잘 수 있는걸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도 좋고.”

말하면서 손가락이 들썩거리는 걸 보니, 내 몸의 촉감을 즐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탈출구가 있을지 모른다. 저 반응을 보건데, 꼭 껴안고 자야 하는 대상이 나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잘 때 가장 본능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베개가 아니다. 바로 껴안고 잘 수 있는 무언가다.

이불을 덮고 잠을 자도 그걸 뭉쳐서 껴안거나 가랑이 사이에 끼우기도 하고, 베개를 하나 더 꺼내 그걸 껴안고 자기도 한다.

심지어 과거엔 ‘죽부인’이라는 물건을 만들어 껴안는 용으로 쓰지 않았는가. 그것이 더욱 발전해 캐릭터가 그려진 전용베개까지 상품으로 나왔고.

“무슨 생각하세요?”

『일생일대의 중요한 생각.』

내 수면시간을 보장해 줄 희생양이 필요해. 이대로는 안 된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핀에게 껴 안겨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곰? 안 돼. 분명 자다 말고 둘이서 싸움이 날지도 몰라.

그럼 핀 전용 안고 자는 베개라도 만들어볼까? 무리야. 분명 금방 구멍이 뚫리고 말걸. 게다가 만드는 방법도 모르고.

생각하자. 생각해. 두뇌 풀가동!

“뀨우…….”

두뇌를 풀가동하는 순간, 숲에서 들려온 한 줄기 울음소리가 내게 광명을 찾아주었다.

그래. 바로 이 녀석이야.

기억난다. 분명 곰이 일탈에 빠졌을 때 과일을 바치려다가 몸을 바친 토끼(같은 녀석)이 아니던가.

“곰?”

“뀨!”

토끼 녀석은 입에 물고 있던 과일을 곰 앞에 내려놓았다. 너 그때 찾으러 간 거 이제야 가지고 온 거냐.

그런 건 상관없다. 지금 내가 유심히 보고 있는 건 핀의 토끼에 대한 반응이다.

“귀여워라.”

“뀨우…….”

“이리 온. 착하지?”

토끼가 바들바들 떨면서 핀의 쓰다듬을 받아들였다. 핀은 웃으며 토끼의 몸을 손가락으로 살짝 살짝 건드렸다.

“말랑말랑하네. 헤헤.”

그래.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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