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46화 (4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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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딸아이가 점점 치트가 되고 있습니다

공기를 찢으며 주먹을 내지르는 호쾌한 소리. 평범한 숲에선 들을 수 없는 이 숲만의 특산품. 그리고 그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곰 한 마리.

아름다운 미소녀 엘프가 머릿결을 휘날리며 정권을 내지르는 모습은 아마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휴우.”

한 시간이 넘도록 주먹을 내질렀는데 핀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지쳤는지, 아니면 기분 상 그랬는지 숨결을 토해내며 하던 일을 멈췄다.

『핀. 방금 그거 수련이니?』

“네. 이번에 배웠어요. 헤헤.”

내가 보기엔 평범한 정권지르기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무슨 수련이었을까. 그리고 배웠다는 건 무슨 뜻이지?

『누구한테 배웠는데?』

“벨룸이요.”

『벨룸? 그 드워프 용사?』

이미 죽어서 사라진 인물에게 뭘 어떻게 배웠다는 것일까.

한 가지 떠오르긴 한다. 벨룸의 기억. 혹시 거기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걸까.

“네. 할머니의 마력이 흘러들어왔을 때 벨룸의 기억도 같이 들어왔잖아요. 그때 벨룸이 깨달았던 힘이 뭔지 봤어요.”

핀은 쭈그려 앉아 바닥에 손가락을 꽂았다. 손가락은 두부를 찌르듯 땅에 푹 들어갔다.

『흐음. 그냥 힘으로 한 거 같은데.』

“힘이 아니에요. 결(缺)을 보고 따라 넣었어요.”

『결(缺)?』

핀은 손가락을 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무랑 똑같아요. 나무를 자르면 물결무늬가 있잖아요. 그걸 옆에서부터 자르면 자르기 힘들지만 흐르는 모양을 따라서 자르면 쉽게 잘리잖아요. 결이란 그런 거예요.”

『그러니……? 근데 굳이 나무를 예로 들어야 했니……. 나무를 예로 드니까 좀 무섭구나.』

꼭 나를 예로 드는 것 같아서 무섭다. 으음. 나도 결을 따라 자르면 쉽게 잘릴까? 생각하지 말자.

“헤헤. 근데 아직 이론만 알지 숙련된 게 아니라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답니다.”

핀이 팔을 들어 근육을 과시한다. 매끈한 팔에 근육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팔뚝을 보여주며 만지는 핀은 꽤나 사랑스러워서 만족했다.

“아빠를 지키려면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해야죠.”

이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하긴, 핀을 이길 만한 사람이 이쪽세계에 몇이나 있을까. 소설로 따지자면 거의 치트급 아닌가. 핀이 사춘기였을 때만해도 오히려 급박한 성격 때문에 오는 족족 쳐죽이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그 걱정도 사춘기가 끝나고 유해진 성격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

『그나저나 결(缺)이라. 벨룸처럼 쓸 수 있는 거니?』

“으음. 아직 연습 중이긴 한데. 한 번 보여드릴게요.”

말하자마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곰에게 핀이 달려들었다. 곰은 깜짝 놀라면서도 유연한 몸놀림으로 핀의 손길을 피하려 했다.

“고, 곰?”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핀은 그런 곰의 몸놀림을 예측했다는 듯이 자석처럼 곰의 신형을 쫓아 그 털을 움켜쥐었다.

“곰…… 곰.”

「저번에 잡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짠.”

멋지게 곰을 머리 위로 들고 내게 자랑하는 핀. 위에서 「이제 내려달라!」라며 버둥거리는 곰. 아무리 봐도 남동생을 괴롭히는 누나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흠. 이제 나도 둘에게 적응 돼 버렸군. 보통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

『신기하구나. 근데 그것도 결이니? 그냥 전보다 빨라져서 잡은 것 같은데.』

“빨라지진 않았어요. 그냥 곰이 이동하는 바람의 결을 따라 저도 이동했을 뿐인걸요.”

일종의 열추적 미사일 같은 개념인가.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나도 핀이랑 함께 벨룸의 기억을 봤었지만, 벨룸이 얻은 깨달음은 보지 못했다.

직접 마력을 흡수한 핀에게만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쉽다. 나도 저런 신기한 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싶었는데.

나무로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이고 정령으로 변하는 것도 충분히 신기한 능력이긴 하지. 욕심이 너무 지나쳤나.

『어쨌든 강해졌다니 다행이구나. 핀. 근데 곰은 이제 그만 괴롭히면 안 되겠니.』

머리 위로 든 곰을 뱅글뱅글 돌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핀의 모습은, 포커스를 핀에게만 맞추면 참 즐거워 보이는데……. 곰에게 맞추면 괴롭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 같이 놀아주는 거예요. 곰이 또 쓸쓸해할 수도 있잖아요.”

“고오오옴!”

「이런 관심은 필요없다아아!」

『핀. 이제 그만 괴롭히고 놔줘…….』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동생에게 괴롭힘 당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단 말이야.

누나도 아니고 여동생인데 왜 괴롭힘을 당했냐고? 뭘 모르시나 본데 오빠가 되면, 또는 형이 되면 의외로 행동에 제약이 많다. 다른 집은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그랬다.

조금만 장난치면 쪼르르 부모님한테 달려가서 일러바치던 내 동생.

동생의 고자질을 듣고 부모님은 항상 나한테 한소리 하셨지.

“넌 오빠가 돼가지고 동생이나 괴롭히니.”

“오빠니까 네가 좀 더 참아야지.”

진짜 항상 궁금했다. 다른 집 여동생들도 내 여동생과 똑같은지. 영악하게 부모님을 이용해서 날 골탕 먹이고 뒤에서 혀를 빼꼼 내밀며 사악하게 웃고 있던 그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중에 고등학생쯤 되선 서로 친해졌지만 그 전까진 항상 티격태격 싸웠고 그 패자는 나였다.

그래서 곰을 괴롭히는 핀의 모습은 고등학생 이전의 날 괴롭히던 동생 모습이 떠오른다.

크윽. 핀. 제발 기억폭력 좀 하지 말고 멈춰줘.

한참을 돌리던 핀이 곰을 내려놓자, 처음 비행기를 탄 시골청년이 땅의 소중함을 깨닫고 바닥에 입맞춤하듯이 곰이 쓰러졌다. 상당히 어지러운지 입에서 신음까지 흘러나왔다.

『그래……. 확실히 대인전에서 네 공격을 피할 사람은 없겠구나.』

핀의 괴력을 생각하면 잡히는 순간 게임 끝이겠지. 벨룸 이 자식. 꽤나 쓸 만한 기술을 주고 갔구나.

그나저나 세계수의 마력은 가까이 있는 사람의 기억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는 걸까.

아버지도 그렇고 벨룸도 그렇고. 마력을 넘겨받을 때마다 기억이 흘러들어오니 신기하다. 심지어 벨룸은 기술까지 핀에게 전수하고 간 꼴이 돼 버렸다.

언젠가 어머니가 용사들에게 준 무기들의 마력을 전부 흡수하면, 설마 그 용사들이 썼던 기술까지 핀이 다 흡수하는 게 아닐까.

……록맨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록맨이잖아.

“곰. 엄살 부리지 마. 너 때문에 아빠가 괴롭힌 줄 알고 의심하잖아.”

“고옴…… 곰…….”

「세상이 돈다…… 곰이 돌면 회전문…….」

개그 할 여력이 있는 걸 보니 상태는 괜찮군. 심지어 조금 웃겼다.

“자. 치료해 줄 테니까 엄살 피우지 마.”

핀의 손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와 곰의 몸을 감쌌다. 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곰?”

「힘이 넘친다?」

『핀?』

방금 뭐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힐을 해준 것 같은데.

내 의문을 느끼고 핀이 대답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알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제게 따로 마력을 주셨다는 걸. 그리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걸.”

『그냥 변신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구나?』

“네. 그냥 할아버지의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상상하면 그대로 이루어져요.”

『상상한대로? 뭐든지?』

그건 또 뭐야! 완전 용언마법이잖아! 거의 최종보스급 치트 능력 아니냐!

“뭐든지까지는 모르겠는데……. 한 번 해볼게요!”

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든다. 몸 주변으로 아버지의 마력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염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몸 주변으로 흘러나온 마력이 핀의 손으로 모였지만, 검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흐에……. 안 되네.”

『뭘 하려고 했는데?』

“검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엄청 두껍고, 무겁고, 조잡한 철퇴 같은 검아 나와라! 하고 생각했는데 안 나오네요.”

……용이라도 잡을 생각이냐. 그런 검이 필요한 세계라면 절망뿐이잖아.

재차 시도해 보지만 핀의 손앞으로 마력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일의 반복이었다.

모인 마력의 모양은 창, 도끼, 활, 검 등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뭘 만들려고 했는지는 묻지 말아야겠다. 분명 세기말에서나 쓸 법한 무기들일 것 같다.

“불이랑 다른 건 잘되는데.”

다시금 핀이 손을 내밀자, 거기에 불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불 위로 물이 생겨나더니 불을 꺼버렸다.

아무래도 물건은 못 만드는 모양이다. 하긴, 거기까지 가능하면 거의 창조의 영역이니 신이라고 해도 되겠지. 역시 치트라곤 해도 신급은 안 되는 모양이다.

『신기하구나. 핀이 강해지니 이제 아빠도 한시름 덜겠는걸.』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 마법이면 마법, 치유면 치유. 전천후만능캐릭터가 따로 없다.

“헤헤. 이것도 돼요.”

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그물침대에 누운 것처럼 공중에서 편하게 누운 핀은 하늘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제가 누구랑 싸운다고 해도 안 말리실거죠?”

『응? 싸움?』

갑자기 웬 싸움? 아침부터 내게 이것저것 보여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그래. 누구랑 싸운다고 해도 핀이 다치거나 할 걱정은 없겠다.』

“아빠. 이거 약속한 거예요.”

『싸워도 안 말리겠다는 거?』

“네.”

『……으음. 상대를 보고 판단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치. 아빠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걱정이야 항상 하지. 아빠니까. 핀이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뭐, 딱히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 들어주자.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와아! 헤헤.”

뭐가 그리 좋은 걸까. 그래도 웃는 모습을 보니까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다.

근데 공중에 뜰 거라면 하늘 높이 뜨는 게 더 기분 좋지 않을까. 핀은 왜 나보다 낮은 곳에서 둥둥 떠 있지?

『핀. 그 이상으론 못 뜨는 거니?』

뜨끔한 표정으로 핀이 어깨를 움츠렸다.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설마…… 아직도 높은 곳이 무서운 건가!

“소녀가 어찌 아버지보다 높은 곳을 오를 수 있겠나이까…….”

『양갓집 규슈 같은 말투로 말해도 이미 다 들켰거든? 오랜만에 높이 높이닷!』

“으아아아! 아빠! 왜!”

『왜긴! 곰의 복수닷! 그리고 중학생 때의 나를 위해!』

“무슨 소리예요!”

핀을 잡아 하늘 높이 올려주었다. 구름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핀은 경치 구경할 생각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내려달라고 빌었다.

“내려주세요!”

『으하하하! 어떠냐! 이 망할 여동생아!』

“여동생이 아니라 딸이에요!”

지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곰이 씨익 웃었다. 그 표정은 인간시절 여동생이 부모님 뒤에서 지었던 표정 같았다.

“곰.”

「쌤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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