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45화 (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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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가족의 이름

무릎을 꿇고 있는 곰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본 적이 없다. 곰이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군림하고 있는, 숲의 제왕.

제아무리 단련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맨손으로 곰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같은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호랑이조차 새끼 곰이나 소형종의 곰이 아닌 이상 싸움 자체를 기피한다.

“홈!”

그런 곰이 무릎을 꿇고 내 앞에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획하고 돌렸다.

“……하아. 곰. 뭐가 문제니.”

“곰.”

「곰은 인간 말 못 알아듣는다.」

“그럼 지금 대답은 어떻게 한 거냐…….”

“곰.”

「혼잣말이다.」

어째 단단히 삐져 있는 모양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탈선까지 하고. 핀 다음엔 너냐.

전생에 있었던 부모님의 한탄이 떠오른다.

나도 여동생과 한 살 터울이었던지라, 연년생은 키우기 힘들다며 엄청 한탄하셨다.

오빠가 젖 떼면 동생이 기다리고 있고.

오빠가 유치원가면 다음 해에 동생도 보내야 하고.

오빠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동생도 금방 또 들어가고.

오빠가 중학교 가니까 동생도 따라 들어가고.

나중에 대학 보내려면 엄청 힘들겠네.

크윽. 어머니의 한숨 섞인 혼잣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다.

과거 이야기는 그만 생각하고, 나는 지금 정령으로 변해 곰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핀의 사춘기는 그냥 내게 말대꾸를 좀 하고 독선적인 성격이 강해졌던 것에 반해, 곰의 사춘기는 완전 일탈이다.

선로를 벗어난 폭주기관차라고 할까. 이대로 두면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근데, 대체 어떻게 타일러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남자애랑 여자애는 또 사춘기 감성이 다르단 말이지.

“곰. 그러지 말고 말해봐. 뭐 섭섭한 거라도 있니?”

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망울이 크게 흔들리며 동요하는 것을 보니 섭섭한 게 있나 보다.

대답 대신에 곰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는 볼일 없다는 듯이 숲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두진 않는다.

“고옴? 아빠가 말씀하고 계시잖니. 버릇없게 뭐하는 짓이야.”

물론 내가 아니라 핀이.

사춘기가 끝난 후로 톡톡히 곰의 누나 노릇을 하려는 모양이다.

곰의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 아니다. 곰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잖아.

“고, 곰!”

“으응? 아프다고? 그러니까 빨리 앉아.”

고요한 폭력에 굴복한 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전처럼 요상한 몸놀림으로 핀의 손길을 피하는 모습은 이제 못 볼 것 같다.

다시 자리에 앉은 곰의 표정을 보아하니 대답을 듣기는 글렀고, 섭섭하다는 말에 반응은 있으니 그 원인을 찾으면 될 것 같은데.

곰이 섭섭할 만한 일이 뭐가 있었을까.

자. 생각해 보자. 두뇌 풀가동. 최근 곰과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자.

「주인님. 걸어 다니는 곰을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나? 틀렸다. 곰은 원래 걸어 다닌다.」

이상한 개그…… 에 웃어주지 않고 한숨을 내쉬어서 삐졌나? 아니야. 그 정도로 삐질 만큼 곰의 낯짝은 얇지 않다. 얼굴 가죽이 두꺼운 녀석이라고.

‘곰. 미안한데 너랑 자면……. 냄새가 좀…….’

으음. 이걸지도 모르겠다. 핀이랑 함께 자는 나에게 곰이 함께 자자고 했을 때 내가 한 말이다.

근데, 진짜로 동물 냄새가 너무 심해서 같이 못 자겠는걸. 누린내가 너무 심하단 말이야.

“아. 설마. 곰. 너…….”

그래. 그때 드워프 용사가 죽은 날. 그날 이후로 곰이 우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거리를 벌리더니 일탈행위까지.

“인간이 되고 싶은 거야?”

곰이 흠칫 놀란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아직 대답은 없지만, 조용히 곰이 말하길 기다렸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마침내 곰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곰…….”

「나만 인간이 아니다…….」

“고옴…….곰…….곰…….”

「주인님도, 대장도 인간인데…… 나만 동물이다…….」

“고호옴…….”

「나만 왕따다…….」

단추 구멍 같은 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항상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 아니었구나.

곰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춘기 소년에게 섣불리 말을 건네기엔 조심스럽지 않으면 큰 상처를 줄 것만 같아서 두렵다.

곰이라고 너무 생각 없이 지낸 건 아닐까 하고 과거의 내 태도를 반성해 본다.

“곰…….”

어설픈 말 대신에, 나는 가까이 가서 곰을 껴안아 주었다. 곰의 몸에서 나는 누린내도 이렇게 맡으니 그다지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말해놓고선, 그동안 곰을 애완동물이나 손님 취급한 것은 사실이다.

동물이니까. 가까이 하기엔 내게 아직 낯선 모습이었다.

그래서 거리감을 둔 내 행동을 자책하고, 곰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곰.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야. 핀에게 그랬듯이 네 이름은 내가 지어줬잖니. 나는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아이들을 전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걸.”

“곰. 곰.”

「그래도 싫다. 인간 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중에 인간은 없는걸. 너 뭔가 착각하고 있어.”

“곰?”

“나는 나무고, 핀은 애벌레였어. 지금 이 모습은 정령이고, 핀은…… 원래 특별하잖니.”

윽. 핀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럴 땐 얼렁뚱땅 넘기는 게 최고다.

“그리고 나한텐 너도 특별해. 세상에, 말하는 곰이라니. 개그 하는 곰이라니. 그런 곰이 또 어디에 있겠어.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너 같은 곰은 없어. 너는 내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곰이자 특별한 내 가족이야.”

“곰…….”

「주인님…….」

“주인님이 아니라 아빠라고 불러도 돼.”

곰이 망설였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며 내게 말했다.

“곰…… 곰.”

「거기까지는……. 나중에…….」

아빠라 불러도 괜찮은데. 역시 남자애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힘들다. 근데 아빠보다 주인님이 더 부끄럽지 않냐?

“자. 그럼 우리 가족이라는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해볼까. 핀. 이리로 와.”

“네,”

지금이야 이렇게 마음이 풀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마음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지금부터 가족이라는 이름을 단단히 고정시켜 줄 쐐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선 자세로 말했다.

“지금부터 가족이름을 정하겠다!”

“…….”

반응이 없다. 으으.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아.

만화처럼 멋지게 명대사를 외쳐본 거였는데. 역시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인가.

“하으으…….”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이 뜨겁다. 5분, 아니 1분 전으로 돌아가서 과거의 나를 꾸짖고 싶다.

“가족이름이 뭔가요. 아빠?”

“흠흠. 아. 가족이름이 뭔지 몰랐구나.”

다행이군. 몰라서 반응이 없던 거였나.

“가족이름이 뭐냐면 우리들의 이름 끝에 우리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이는 거란다. 가족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이름이지.”

“으음. 그러니까 가족만 쓸 수 있는 이름이라는 거네요? 좋아요!”

“곰!”

「나도 좋다!」

다들 동의해 주는군. 좋아. 그럼 지금부터 가족이름을 정해볼까.

처음엔 한국의 성씨처럼 앞에다가 붙이는 이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이름도 그렇고 핀도 그렇고 곰도 그렇고 앞에다가 붙이는 성씨는 꽤나 위화감이 있다. 흔한 성씨인 ‘김’을 붙여보자.

‘김위그드라실.’

‘김핀.’

‘김곰.’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나와 핀의 이름은 서양식이고, 벨룸의 경우를 봤을 때 여기는 서양식의 이름을 쓰는 것 같으니까 이름 뒤에 붙이는 패밀리 네임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생각해 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지금부터 두 가지 이름을 가질 거야. 중간에 하나로 된 이름과 마지막에 붙이는 가족이름. 내 이름이 기니까 그걸 잘라서 ‘위그 D. 라실’이라고 지어봤는데 너희들은 어떠니?”

“으음……. 아빠. 저는 위그드라실이라는 이름이 더 좋은데…….”

“곰.”

「나도 그렇다.」

“위그드라실이라고 불러도 돼. 너희들에게 나랑 같은 이름을 주고 싶어서 나눠봤어. 핀은 핀 D. 라실이고, 곰은 곰 D. 라실이 되겠네.”

어차피 이름으로 안 부르고 너희들 다 ‘아빠’ 아니면 ‘주인님’이잖아.

그런데 내 말을 듣고서 핀이 숨을 삼켰다. 표정이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인다.

“헉……! 아빠…….”

“마음에 안 드니?”

“우리…… D의 일족이었어요?”

“응?”

“우리도 이제 바다로 나가서 해적이 돼야 하나요?”

그 말이었냐! 조금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4차원적인 핀의 사고방식은 그대로였다.

“아니야. 핀. 바다 안 가. 가기 전에 아빠가 무기력증으로 죽을걸? 10미터도 못 벗어나는데…….”

“아쉽네요.”

그렇게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봐도 안 돼. 핀. 바다라니.

전생에서도 타본 적 없는 배를 이런 무기력에 절여진 몸으로 가라니. 넌 아빠를 죽일 셈이냐!

“그래도 아빠 이름이라서 좋아요. 라실. 헤헤.”

옆에서 곰도 뿌듯하게 웃고 있다. 다들 좋아해 주니 다행이다.

이제 좀 진짜 가족 같네. 음. 어감이 이상하다. 가족 같다?

……그냥 넘어가자. 오랜만에 하이개그가 나와 버렸다.

* * *

“대장. 아무것도 없어.”

한 여성이 오두막 안에서 나오며 손을 털었다. 먼지가 묻은 손가락이, 결벽증에 빠진 여자에겐 견딜 수 없이 짜증스러웠기에 말투에 가시가 돋쳐있었다.

“아무것도?”

“응. 아무것도.”

동료의 투덜거림에도 대장이라 불린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역시 세상엔 편한 일이 없군. 보수가 좋아서 수락한 의뢰였는데 숨겨진 내막이 있는 건 아닐까. 대장이라 불린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면 보수는 못 받는 건가요?”

옆에서 대장의 얼굴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 바라볼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특이한 점은 기다란 귀를 가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엘프라는 점이었다.

“그건 아니다. 내가 알기론 의뢰는 이미 끝났다. 오두막에 살고 있는 드워프의 생사여부 확인이 의뢰 내용이었다.”

그런 엘프 옆에, 정반대의 타입인 근육질의 덩치 큰 남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니 마치 곰과 인간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투덜거리며 오두막에서 나온 여자는 손에 남아 있는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손수건은 다시 빨아서 사용해도 되는데도 여자는 더러운 물건을 버리듯 바닥에 흘려 버렸다.

“그럼 뭘 고민하고 있어. 그냥 가자. 대장. 임무는 끝이잖아.”

“아직 생사여부를 모른다.”

“딱 보면 모르겠어? 죽을 때가 됐으니까 어디로 사라진 거겠지. 혼자 살던 노인네니까 마지막에 추한 모습 보이기 싫었나 보지.”

“추한 모습이라뇨?”

엘프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여자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넌 사람 죽는 꼴을 못 봐서 모르나본데, 사람은 죽으면 똥오줌을 질질 흘리거든. 여기 살던 노인네도 혹시라도 누가 왔는데 그런 모습 보일까 봐 죽을 자리 찾아서 떠났겠지. 드워프들은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으니까. 으엑. 나였으면 벌써 강물에 뛰어들었을걸?”

“으…….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상상되잖아요.”

“무슨 상상? 내가 똥오줌 흘리면서 죽는 모습? 싫다~”

“놀리지 마세요.”

어린아이 놀리듯 엘프를 놀리던 여성은 다시 대장을 보며 물었다.

“대장. 뭘 그렇게 고민해. 내 말대로 라니까?”

“추가 의뢰가 있었다. 드워프가 죽었다면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가져오라는 내용이었지.”

“물건?”

대장은 고민을 끝내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수상쩍은 의뢰지만 어차피 모험가인 그들에게 위험은 언제나 옆에 있는 친구와 같은 법. 그는 추가 의뢰까지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다.

“도끼. 찾아오면 이번 보수를 열 배로 지급.”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며 대장만 뚫어져라 보았다.

“뭐? 열 배? 뭐하고 있어! 당장 하자고!”

딱 한 명만 빼고.

그 부추김에 응답하듯이, 대장이 말했다.

“에르나르. 추적마법을 사용해 봐. 여기서부터 흔적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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