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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연년생은 이래서 힘들다
오늘도 하늘은 파랗구나. 날씨는 화창. 바람은 선선.
아침에 일어나, 나를 껴안고 잠든 핀의 몸에서 억지로 빠져나와 나무로 돌아간다.
숲을 살펴보는 일은 나무로 돌아가야만 가능하기에, 정령체로 더 있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다.
정령체로 변하면 이 점이 불편하다. 세계수로 있을 때와 다르게 숲을 살펴볼 수 없다.
그냥 평범한 인간처럼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넓은 숲을 눈으로 보기엔 불가능하며, 또 본체에서 10미터 이상 떨어지면 한여름의 개처럼 몸이 축 늘어지니 꽤나 불편하다.
하지만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장점이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피곤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잠이란 언제 깊이 잠들 수 있는가. 소위 ‘꿀잠’이라 불리는 그것은 어떻게 영접할 수 있는가. 바로 피곤할 때 자면 되는 것이다.
나무로 지내면 피곤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령체로 있으면 가만히만 있어도 피곤해지니 꿀잠을 자는데 있어서 적합한 신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그 모습으로 지내고 싶지만, 그래도 일할 땐 해야지. 백수로 놀고먹는 모습을 딸한테 보여줄 수는 없잖아?
이걸 일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도 되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도 하루일과 시작이다.
보인다. 숲의 경치가. 초록의 나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나무가 보인다. 그 뒤에 나무. 나무.
그리고 돌산. 산. 절벽. 협곡.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아빠. 멍하니 뭐 하세요?”
『으응? 핀, 일어났니? 아빠 일하고 있었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핀이 내게 등을 기대고 있었다.
깜짝이야. 멍 때리느라 일어난 줄도 몰랐네. 매일 똑같은 경치만 보다보니 이것도 고역이라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있었다.
“에이. 거짓말. 멍 때리고 계셨잖아요. 숲이 하나도 안 보이던데.”
『아, 아니야. 진짜란다. 아빠 일하고 있었어.』
“이렇게 아빠랑 기대고 있으면 아빠가 보고 계신 경치가 저한테도 보이는걸요.”
『윽…….』
들켰다. 몸을 맞닿은 것으로 시야를 공유하다니. 이것도 하이엘프의 힘인가!
『잠깐 쉬는 중이였단다.』
“헤헤.”
그 웃음은 뭐냐. 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으윽……. 이게 내 일이라고 했으니 앞으론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겠군.
멍 때리기를 그만두고 다시 숲의 경치를 살펴본다. 벨룸처럼 또 누군가가 숲으로 침입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매일 같이 살펴봐야지.
그의 기억에서, 우리가 있는 숲은 엘퀴라즈 숲으로 불리는 것 같다.
과거 용사가 아버지가 쳐둔 결계의 구멍을 내서 마기가 숲을 뒤덮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숲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러니 누가 접근하겠냐마는, 그래도 전직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생물이지 않는가.
고층 빌딩에서 매달리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긴다거나, 하늘 위에서 뛰어내리는 위험천만한 일을 즐기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목숨을 건 스릴을 즐기고 웃을 수 있는 종족. 그러니 위험하다고 알려진 이 숲에 인간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빠. 아빠는 인간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핀이 내 마음을 읽은 듯이 예리한 질문을 날렸다.
인간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 파괴의 주범으로서 나무인 내게 있어서 천적이나 다름없다. 그건 전직 인간 출신인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 천적관계는 여기서도 변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딱히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세계수를 노린다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아마 나를 보면 ‘심봤다!’ 하고 덤벼들지 않을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이는 것이지만, 예전에도 말했듯이 죽이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니다. 판타지 소설의 가장 정석적인 루트가 적을 죽이는 것이지 않는가.
눈앞에, 인간을 죽였을 때의 미래가 보인다.
숲에 멋모르고 인간들이 들어온다.
죽인다.
그 인간이랑 친한 사람(가족이나 어떠한 끈으로 연결된)들이 숲으로 찾으러 들어온다.
죽인다.
소문이 퍼진다. 국가에서 조사차 나온다.
죽인다.
이름난 기사나 마법사, 수련을 거듭한 초인들이 호기심에 몰려든다.
죽인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국가에서 군대를 파견한다.
죽인다.
전 세계에서 숲을 주목한다.
『으으. 그건 안 돼.』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숲에 들어왔는데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려나.
이 넓은 숲에서 나를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나는 아직 어머니처럼 무지막지하게 크지도 않으니까 조용히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역시 고민하시네…….”
『응? 핀? 뭐라고 했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헤헤.”
분명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 중요한 말은 아니겠지.
그나저나 핀이 계속 몸을 맞대고 나랑 시야를 공유하니까 왠지 껄끄럽다.
핀이 싫다는 건 아니고, 내가 일을 하나 안 하나 감시당하는 느낌이랄까. 으음. 일하는 시간이 나만의 시간이었는데 이러고 있으니까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다.
『핀. 심심하지 않니?』
이 말의 속뜻은 ‘핀. 이제 그만 보고 다른데 가렴’이다.
“아뇨. 아빠랑 같은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걸요.”
통하지 않았다. 제길. 다른 수를 써보자.
『곰이 심심해 할 텐데 곰이랑 놀아주렴. 저번에 꽤나 충격이 컸던 것 같은데.』
핀과 내 사이에 끼지 못하고 겉돌던 곰은, 그 저녁 이후로 어째 행동이 좀 거시기 해졌다.
나나 핀에게 말도 잘 안 걸고. 뭐랄까. 사춘기 소년 같다고 할까.
잠깐.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곰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 곰을 한 번도 못 봤다. 어디에 있지.
숲 구석구석으로 시야를 돌려 곰을 찾아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곰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음. 멀쩡해 보이는데. 딱히 다른 점은 안 보인다.
“곰!”
「먹을 걸 바쳐라!」
……멀쩡하지 않다. 대체 뭐하는 거야 이 녀석.
곰은 바위에 임금…… 이 아니고 골목길에서 담배 피우는 불량배 마냥 쭈그려 앉아서 다른 동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물들은 손에 과일이며 꿀이며 온갖 음식들을 입에 물고 곰 녀석의 앞에 쌓아두고 있었다.
“뀨…….”
“곰? 곰! 곰.”
「아무것도 없다. 너! 먹을 건 어디 있냐.」
“뀨우…….”
토끼처럼 보이는(머리에 뿔이 나 있다. 토끼는 뿔 안 달렸잖아)동물이 구슬픈 눈으로 곰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토끼는 먹을 걸 못 가져왔나 보다. 눈치를 보던 토끼가 음식들 위로 뛰어오르더니 파들파들 떨며 거기에 누워 눈을 감았다.
“곰! 곰!”
「곰은 육식 안 한다! 과일을 가져와라!」
……야. 너 진짜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곰 아니지? 그렇지? 너 등 뒤에 살펴보면 지퍼백 있어서 그거 열면 사람 나오지?
바들바들 떨던 토끼가 재빨리 숲으로 뛰어갔다. 꼭 학교 불량배가 ‘야 빵 사와라’라는 말에 매점으로 뛰어가는 선량한 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으윽. 곰이 불량배라니……. 전혀 안 어울리잖아.
“곰.”
곰이 손짓하자 원숭이 같이 생긴 동물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곰은 나뭇잎을 돌돌 말아서 입에 물었다. 저거 내 나뭇잎이잖아! 언제 가져갔냐!
원숭이 같이 생긴 동물은 손을 모으더니 자그마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역시 판타지 세계. 동물들도 평범한 녀석이 없다.
“고오홈…….”
나뭇잎을 담배삼아 쭉 빨더니 연기를 뱉는 곰의 표정이 흐리멍덩하다.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내 나뭇잎이 그런 효과가 있는 걸까.
뭐가 됐건, 지금 곰이 삐뚤어져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핀의 사춘기가 끝나나 싶더니 이번엔 너냐. 전형적인 남자애들의 일탈 현장이잖아 이건!
“곰? 뭐하니?”
주변의 동물들이 전부 화들짝 놀라며 숲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너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도망 가냐. 라고 생각했지만 핀의 모습을 보니 도망갈 만하다. 등 뒤로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그나저나 핀. 전보다 더 빨라졌네. 눈치채기도 전에 도착해 버렸다.
“곰.”
곰이 다리를 까딱거리며 담배…… 가 아니라 나뭇잎을 빨았다.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간다. 그리고 침을 뱉었다.
구강구조상 침 뱉기 어려운 구조인건지, 익숙하지가 않은 건지 걸쭉한 침이 입에서부터 이어져서 턱을 따라 대롱대롱 매달렸다.
으아. 완전 꼴사납다.
“응? 상관하지 말라니? 나는 네 누나잖니.”
“곰!”
턱에 흐른 침을 닦으며 곰이 일어섰다. 이 와중에 나는 통역을 안 해줘도 되는 상황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대장이기 전에 누나야.”
좋구나. 핀. 곰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전에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아빠로서 기분이 흐뭇해진다.
“곰. 곰곰. 곰. 곰.”
“신경 쓰지 말라니? 네 멋대로 하겠다니. 그리고 가족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곰!”
그렇게 말하고는 곰은 숲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려고 했다.
“곰. 아직 이야기 안 끝났거든?”
“콤콤콤콤. 곰.”
“흐응…….”
참고로 말하자면, 마지막에 곰이 한 말은 ‘큭큭큭큭. 어차피 변신 안하면 넌 날 막을 수 없다’라는 뜻이다.
아니, 나 누구한테 설명하고 있는 거야. 계속 애들이나 지켜보자.
“과연 그럴까?”
“곰?”
핀의 손이 순식간에 곰의 멱살, 이 아니라 목덜미의 털을 붙잡았다. 곰이 그 특유의 몸놀림으로 손아귀에서 빠져나왔지만, 핀은 그 흐름을 읽고서 미리 팔을 뻗어 다시 곰을 붙잡았다.
“너 같은 문제아는 변신 안 해도 충분해.”
“곰!”
사태가 심각하다. 예전의 곰과 핀의 싸움은 장난치듯이 서로를 봐주며 싸웠다.
특히나 곰 녀석은 자기가 신사라며 핀을 때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진지한 표정과 몸짓을 보니 핀을 공격할 심산이다.
『애들아! 싸우면 안 돼!』
두 사람을 급하게 말려봤지만, 이미 늦었다.
곰의 몸 주변에서 소용돌이 같은 물결이 휘몰아쳤다.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나가며 흙먼지가 주변으로 비상했다.
그 안에서, 곰은 바람처럼 몸을 흘리며 핀의 복부를 향해 발바닥을 내질렀다.
“곰!”
참고로, 지금 한 말은 ‘회웅장(回熊掌)이닷!’이라는 뜻이다.
이제 나는 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미안. 조금 아플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핀은 주변에 몰아치는 폭풍을 뚫고 곰의 등 뒤로 돌아가 목덜미를 수도로 내려쳤다. 곰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곰도 대단하지만, 핀. 너 어디까지 강해진 거냐.
“그럼 아빠. 지금 갈게요. 어휴. 곰도 사춘긴가 봐요. 사춘기라니. 왜 그런 시기를 경험하는지 모르겠네.”
곰을 들쳐 매고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으로 온 핀을 보며 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