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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끝과 시작
벨룸이 쓰러졌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벨룸을 보았다. 돌처럼 가만히 굳어 땅에 몸을 눕힌 벨룸의 얼굴은 바닥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죽었나.”
벨룸의 코로 손가락을 대었다. 뜨겁고 미약한 숨결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나는 벨룸의 등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은 들어가는 즉시, 무엇인가에 밀린 듯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치 맞지 않는 가방 안에 억지로 큰 물건을 쑤셔 넣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시도해 봤지만 벨룸의 몸은 내 마력을 거부했다.
“이번에도 도망치는 거냐.”
나는 손을 떼고 벨룸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땅에 처박힌 벨룸의 얼굴이 궁금해져서 얼굴을 살짝 들었다.
고통과 괴로움, 슬픔을 한데 섞어 버무리면 이런 표정이 나올까? 차마 눈뜨고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괴이한 표정이었다.
“하아. 예상대로구나.”
끝까지 나의 마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벨룸은, 곧 그 미약했던 숨조차 끊어졌다. 녀석의 몸속에서 꺼져가던 마력의 촛불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끝까지 겁쟁이였군.”
녀석의 기억을 들여다봤을 때, 단순히 기억만 내게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나는 진짜로 녀석을 용서하고 어떻게든 설득했을 것이다. 드워프라니. 그것도 용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가.
하지만 그 기억과 함께 녀석의 마음도 같이 흘러들어왔다. 그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겪은 솔직하고 거짓 없는 마음이었다.
“참, 이기적인 녀석이야.”
천 년. 숫자로 쓰면 간단하지만 그 기간은 감히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길고 긴 시간이다.
십 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는데 갈대 같은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화무쌍할까.
하지만 이 녀석의 마음은 몇 번의 변화밖에 없었다. 처음의 죄책감과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 시간이 지나선 괴롭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 마음이 닳아 없어졌는지 그저 죽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숲에서 어머니에게 사죄한다며 깎아대던 조각상은 그저 하루일과가 된 지 오래였고, 인류에 대한 화합의 꿈도, 은혜를 갚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바라고 있던 것은 오로지 죽음 끝에 찾아오는 안식뿐. 입에 발린 용서와 속죄는 말뿐인 것이었다.
“조금이나마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너무 가혹했나.”
예전의 죄책감을 다시 떠올리길 바란 것도 있지만, 그저 마냥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려 보고 싶었다.
그게 대체 무슨 사죄고 사과고 용서를 바라는 것인가.
안식만을 바라는 이기심밖에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런 녀석을 용서해도 되겠는가.
“뭐, 이제 끝났으니까…….”
“끝났네요?”
“히익!”
등골이 서늘해지며 털이 곤두서는 충격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귀에 속삭인 숨결이 간지러워 손바닥으로 귀를 비볐다.
“핀. 갑자기 그러지 말아줄래?”
“헤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이 모습일 땐 뒤에서 나타나도 볼 수 없단 말이야.”
달빛이 핀의 금발과 부딪혀 주변으로 흩어졌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눈웃음을 짓고 있어서 더는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핀은 어머니가 용사들에게 준 도끼에서 마력을 흡수한 후로, 또 성장해 버렸다.
14살 외모의 핀은 이제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커져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외모까지 성장한 것이다.
이래저래 많은 곳이 자라났지만, 성격도 변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는 이제 좀 끝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어째 갑자기 뒤에서 장난을 치는 게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드워프에게 내가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게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흠. 장난쯤이야 칠 수도 있지. 어른스러워진 거겠지?
아니, 잠깐만. 그래도 나 아빤데. 따끔하게 말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또 이러는 거 아니야?
“드워프는…… 역시 죽었네요.”
“……응.”
기분이 착잡하다. 여기 와서 죽은 자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
시체를 보는 것은 전생을 포함해서 이번이 두 번째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경험은 첫 번째 경험을 되살려 준다.
복잡한 마음이 부동심에 의해 가라앉았다. 그리고 시체를 보고 있어서 그런지 다시 복잡해진다. 근데 이 요상한 특이성은 내 마음을 또 가라앉힌다.
……그만해. 무한동력이냐. 언제까지 반복할 거야?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하는데,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나를 끌어안았다.
내 배를 쓰다듬듯이 미끄러진 팔이 나를 반 바퀴 감아 끌어당기니, 나는 그냥 거기에 몸을 맡기고 푹신한 온기에 몸을 맡겼다.
“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빠 잘못이 아니잖아요.”
“……원인 제공은 내가 했다만.”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삶이었잖아요. 아빠는 이야기만 조금 나눴을 뿐이구요.”
“하아……. 편리한 사고방식이구나.”
“아빠가 너무 복잡한 거예요.”
그 말에 나는 힘을 쭉 빼고 핀에게 완전히 몸을 기댔다. 어째 이런 건 아빠인 내가 해줘야 하는 건데 말이야. 반대로 핀에게 당하고 있으니 조금 부끄럽다.
그래도 기분은 좋으니 그냥 있자.
남과 체온을 나눠본 것이 언제였을까. 머리가 자라난 후론 부모님과 포옹 한 번 하는 것도 부끄러워 못했으니 까마득한 옛날이구나.
“그나저나 이 아빠는 핀이 난리 칠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 가만히 있어줬구나.”
“헤헤. 칭찬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근데 아빠가 칭찬했는데 왜 네가 아빠 머리를 쓰다듬는 거니.”
“그럼 쓰다듬어 주세요.”
낑낑거리며 팔을 뻗어 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수리가 아니라 관자놀이까지밖에 팔이 닿지 않아 얼굴을 쓰다듬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아. 아빠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본체는 저렇게 큰데. 정령체는 언제쯤 자라나는 것일까.
“저도 이제 나서야 할 일이랑 나서면 안 되는 일 정돈 구분할 수 있어요.”
“그러니? 참 다행이구나.”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꾸해 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핀의 심장 소리가 박자를 타고 내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파동에 맞춰 핀의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와 같은 마력만 가지고 있던 핀이지만, 아버지가 저지른 알 수 없는 일로 인해 그 균형이 깨져 있었다.
흰색이 우세에 있어야 하는데 검은색이 우세에 있었다고 할까. 그런데 이번에 흡수한 어머니의 마력 덕분에 다시 흰색이 우세로 들어섰다.
마력이 늘어난 탓일까. 조금(?) 급박한 성격까지 예전처럼 온화해졌다.
역시 핀의 사춘기는 아버지 때문이었나. 아버지의 마력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암.
“끄응.”
근데 뒤통수가 푹신한 것이 기분은 좋은데……. 아빠로서 꽤나 부끄러운 일이라 이제 그만 핀의 품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핀. 너무 꽉 끌어안은 거 아니니?”
팔을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다. 몸을 버둥거려 보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거 안고 있는 거야 아니면 도망 못 가게 붙잡고 있는 거야.
“도망 못 가요. 아빠.”
도망 못 가게 잡고 있었냐.
“이대로 나무로 돌아가서 또 혼자 끙끙거리시려고요? 제 임무상 그럴 수 없답니다.”
“임무라니?”
“하이엘프는 세계수를 지켜줘야 되잖아요.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봤어요. 할머니를 지켜주고 있던 모습을요.”
“……전에는 딱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야죠.”
“그런 거였니…….”
풀려나는 것은 포기다. 힘으로 핀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이대로 있다 해도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잖아.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하나, 아니 한 마리 있구나.
“곰은?”
“저기 뒤에 있어요.”
핀이 몸을 돌려 뒤쪽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엔, 곰이 울먹이며 손을 깨물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곰의 얼굴로 저런 애처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하다.
“곰. 왜 울고 있어.”
“곰.”
「엄마와 딸 사이에 낄 만큼 나는 눈치 없는 곰이 아니다.」
“엄마와 딸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현실이 슬퍼서 울고 있다네요.”
“이제 통역 안 해줘도 알아듣는 거니?”
“하이엘프니까요.”
“흐음.”
귀찮으니 더 고민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자.
근데 곰 녀석. 우리 사이에 끼고 싶은데 끼이지 못하는 현실에 울고 있는 걸 보니 안타까운데.
아니 근데 엄마와 딸이라니. 그건 좀……. 아. 모르겠다. 겉으로 보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지.
“고호호홈!”
「나도 인간이 되고 싶다아아아아아!」
울면서 저 멀리 어두운 숲속으로 곰이 빠르게 달려갔다. 너 진짜로 인간이 많이 되고 싶은 거였구나. 농담이 아니었군.
“쟤 안 따라가도 되려나.”
“곰은 워낙 밝은 애잖아요. 하룻밤 혼자 두면 괜찮아질 거예요.”
“너 곰한테만 너무 박정한 거 아니니.”
“동생 같은 느낌이라. 헤헤.”
“하아. 그래. 동생이긴 하지. 나중에 이름을 지어줬으니까.”
이렇게 가만히 핀에게 안겨 있으니 졸음이 밀려온다. 눈을 감고 핀에게 소곤거리며 잠을 청했다.
“이제 사춘기가 끝났구나. 우리 핀도 이제 어른이네.”
“어른이라뇨. 전 언제까지나 아빠 곁에 있을 거니까 평생 어린애예요. 그리고 사춘기 같은 건 겪은 적 없어요.”
“다들 그렇게 말하지. ‘난 사춘기 따윈 겪은 적 없는데?’라고 말해.”
“전 진짜 없는데요?”
“전 이제 어른입니다. 아.버.지. 저를 언제까지 아이처럼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 그건…….”
“크윽. 오른손아. 진정해. 지금 저 곰 녀석을 해치울 거니까. 너무 날뛰지 말라고.”
“아아아! 안 돼요, 아빠!”
“아뇨. 제 인생에 후회 따윈 없습니다.”
“하으아응……. 그만해 주세요…….”
아. 재미있다. 더 놀리고 싶은데…….
“으음…….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졸립구나.
* * *
품에 껴안은 아빠이자 소중한 사람이 잠이 든 후, 핀은 조용히 그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키스이자 한 가지 맹세였다.
“아빠 혼자 너무 떠맡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제부턴 제가 다 해결할 테니까.”
그리고 힐끗하고 등 뒤에 남아 있던 드워프 용사, 벨룸의 시체를 쏘아보았다.
핀의 눈동자가 순간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처음에 바랐던 대로. 아빠는 제가 지켜드릴게요.”
드워프의 시체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뱀처럼 일렁이는 불꽃은 그 시체 위에서 춤을 추듯 펄럭였다.
핀이 아빠를 끌어안고 나무 아래로 향한 후에도 불꽃은 계속해서 타올랐고, 시간이 지나 불이 꺼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