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42화 (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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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복수와 용서

“안녕? 일어났네.”

그분과 닮은 아이가 내게 속삭이듯 인사했다. 나는 바닥에 꿇린 무릎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다.

일어나라. 일어나.

조금만 힘을 내달란 말이다. 나의 몸이여.

“무리하지 마. 얼마 남지 않은 삶인데 그러면 더 짧아질걸?”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억지로 일으킨 무릎이 비틀거리며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죽어가는 몸에 힘이 빠진 것인지, 그분을 닮은 아이를 만난 충격 때문에 힘이 빠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런 쪽으로만 고집이 쓸데없이 강하네. 뭐, 마음대로 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라……. 사과하는 게 특기네.”

심장의 비수를 찌르는 것 같은 말투에 나는 그분과 이 아이가 확연하게 다른 존재임을 인식했다. 그분이라면 절대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간신히 들어 아이를 보았다. 여전히 손에서 그분을 본 따 만든 조각상을 놓지 않고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다.

“어머니랑 꼭 닮게 만들었네. 드워프는 손재주가 좋구나.”

어머니. 아아. 그렇구나. 그분과 닮은 것은, 그분의 자손이라 그런 거였구나.

심장이 미칠 듯이 달린다. 이렇게 흥분된 적이 얼마만인가. 수명이 다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으리라 생각했거늘, 여기서 그 분의 자손을 만나게 되다니.

의심은 없다. 외모에서부터, 풍겨오는 저 성스러운 분위기에서부터 그 분의 자손임이 확실했다.

드디어, 죗값을 치를 때가 왔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누구에게 죽여 달라 부탁하지도 못한 삶을 살아온 것이 벌써 천 년.

마지막 삶의 종착지로 선택한 엘퀴라즈 숲에서 그분의 자손과 만남은, 역시 그분의 은혜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 아…….”

말해야 한다. 절 죽여 달라고. 죄 많은 저를 부디 당신의 손으로 죽여 달라고.

하지만 애끓는 신음만 나올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눈앞이 흐려진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이의 모습이 눈물 너머로 번져간다.

“우선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지? 일단은 처음 만난 사이니까. 안녕? 나는 위그드라실이라고 해.”

“아……. 저, 저는……. 벨룸……. 벨룸이라고 합니다…….”

그분과 같은 이름이다. 지독한 우연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신음을 뚫고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이야기 나누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나 이거 가져도 될까?”

작은 손으로 조각상을 만지며 아이가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굳어간다. 단 한 가지 외에 생각의 흐름이 멈춰 버렸다.

“죄송합니다.”

“응? 아직 이야기도 시작 안 했는데 왜?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모든 것이 죄송합니다……. 그날의 은혜를 갚지 못한 배은망덕이 죄송합니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숨어버려서 죄송합니다……. 다른 세계수들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처절하게 말했다.

지난 천 년 동안 남들에게 하지 못했던 부탁.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결말.

다른 이들에게 부탁할 수 없다. 죗값을 치르려면, 오로지 그분만이 나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

그분께 죽을 수 없다면, 그분의 자손이라도 상관없다.

그것만이 내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풀벌레 소리만 귀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분이 내게, 나와 용사들에게 지어주던 미소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내 폐부에 남아 있는 마지막 호흡 한 방울까지 쥐어짜 버렸다.

“쓰레기네.”

그분과 닮았다. 그분의 자손이 틀림없다. 그분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분이 아니었다.

무덤덤하게 던진 말 한마디. 거기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것처럼 들려서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것도 이런 어린아이한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말할 수 있어? 그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아. 그래. 아이는 모르고 있다. 내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것을. 왜 나는 아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놓칠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나의 죄를 씻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저는 당신께 죽어야 합니다.”

“왜?”

“당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용사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세상은 그 진실을 모릅니다. 그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입을 닫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제가 진실을 알리지 않았기에, 다른 세계수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숨이 막힌다.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억지로 짜내어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

모든 말을 쏟아냈다. 답변을 기다리는 짧고 긴 시간 속에서, 나는 막혀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그 녀석이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푸훗!”

아이가 웃었다. 어느새 아이는 내 앞까지 다가와서 고개 숙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사실 다 알고 있어. 네 기억을 봤거든. 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왜 나에게 죽여 달라고 하는 건지 다 알고 있어.”

“그럼…….”

그 진상을 모두 봤다면, 틀림없이 나를 죽여줄 것이다. 희망이 생겨나자 몸에 힘이 돌아온다.

하지만 웃음 뒤에 들려온 대답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용서해 줄게.”

“예?”

“용서해 준다고. 천 년 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 숲에 혼자 숨어서 계속 어머니께 사과했잖아. 그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네가 마왕을 이동 시키는데 손을 보탠 것도 아니고.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잖아?”

“하지만, 제가 진실을 알리지 않아서…….”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몸이 녹아버리는 것 같다. 정신이 땅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래서 용서해 준다는 거야.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속죄했으니까. 그 시간이면 네가 저지른 죗값에 걸맞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혹시 고통스러운 걸 좋아하는 거야? 왜 내가 용서해 준다니까 표정이 그렇게 일그러지지?”

내 표정? 손으로 눈물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주름살로 가득 찼던 얼굴이 더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닙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제발. 저를……. 저를 벌해주십시오……. 당신의 가족을 해친 자들의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화나지도 않습니까?”

“화라……. 잠깐 그런 마음도 들긴 했는데, 내가 좀 특이해서 그런지 금방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

어째서. 내 마지막 구원 줄이 끊어지고 있다.

“기분이 어때? 겨우 죽여줄 사람을 만났는데 용서해 준다니까.”

“아아…….”

“사실, 네 기억을 보고 난 다음에 널 어떻게 해야 할지 꽤나 많이 고민했어. 네가 잠든 동안 널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머리에 쥐나도록 고민했지.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너, 너무 욕심이 지나친 거 아니야? 네가 편해지고 싶어서 남한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다니. 전부 너만 행복해지고 싶어서 하는 짓이잖아. 말로는 용서를 구하고 싶다지만, 사실은 도망치고 싶은 거잖아? 그래서 진실도 말하지 않고 숲으로 도망친 거고. 꿈도 포기할 수 없다지만 그 외에 방법은 많이 있었을 텐데? 네가 숲에서 숨어 지내지 않고 그 용사라는 녀석 곁에 남아 세상을 더 평화롭게 할 수도 있었어. 용사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 옆에서 바로 잡아줄 수도 있었지. 진실을 알리는 것 외에,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조각상이나 깎고 있을 동안에 제대로 속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하다못해 용사가 다른 세계수들을 없애 버렸다고 했을 때, 혹시 모르게 남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지.”

“제발, 그만…… 용서를…….”

“그런데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겁쟁이처럼 숲 속에 숨어서 사죄한답시고 조각상만 깎고 있었잖아. 원래 손재주가 좋은 건지, 하도 깎아 대서 실력이 늘은 건지 이렇게 어머니랑 똑같이 생기게 만들면서.”

조각상이 보였다. 내 앞에 조각상을 내려놓고 아이가 말했다.

“그래서 결정했어. 네 소원을 들어주기로. 죗값을 치루고 싶다고 했지? 내가 치르게 해줄게. 하지만 죽이진 않아. 용서해 줄게. 죽고 싶은 사람을 죽이는 건 너만 편하고 나는 찝찝하잖아. 진짜 속죄는 그런 게 아니야. 그건 도망이지. 네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도망치는 거에 불과해.”

힘이 빠져 떨어뜨려진 고개를, 아이가 나의 얼굴을 잡고 들어올렸다. 작고 여린 손이, 쭈글쭈글한 내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에 가려져 검어보였다.

“그러니까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내 곁에서 보내줘. 네가 있는 동안 항상 이 모습으로 지내줄게. 날 보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계속해서 떠올려줘. 그날을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줬으면 좋겠어. 그 편이 숲에서 혼자 조각상이나 깎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날을 기억할 수 있겠지. 더 선명하게 기억할수록 네 속죄는 더욱 진심이 될 거야.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습관처럼 말로만 속죄해봐야 그게 무슨 속죄겠어?”

왜. 나를 용서해 주지 마. 제발. 나를 죽여줘.

용서해 줄 거라면, 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그분처럼 상냥하게 나를 감싸달란 말이야. 왜 그분의 모습을 하고 그분과 다른 언행을 하는 것이냐.

“이번엔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고통스러워하라고. 기분이 어때? 나 나름대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야. 네 도움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으으…….”

“많이 아픈가 보네. 좀 누워서 쉬어도 돼. 내일부터 내 모습을 일분일초도 빠짐없이 보게 될 테니까.”

바닥이 솟아올라 나를 덮쳤다. 내가 바닥으로 쓰러진 것일까? 몸에 감각이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세상이 온통 검다. 마치 그 녀석이 결계를 뚫었던 그 날처럼,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다.

정신이 흐려진다. 어둠 속으로 의식이 사라져 간다.

“은원(恩怨)은 저울에 재어 확실하게 갚아야 한다. 그게 너희 드워프의 방식이라며. 나도 그 방식을 따라줄게. 이게 네가 그동안 속죄해 온 죗값을 뺀 나머지. 나의 복수야.”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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