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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은원(3)
꿰뚫린 막의 틈에서, 마기(魔氣)가 쏟아져 나왔다. 마기는 순식간에 퍼져나가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분이 주신 도끼를 향해 기어갔다. 그분의 도끼가 빛을 내며 주변의 어둠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것은, 나와 그 녀석뿐. 그 녀석의 검 역시 나의 도끼와 같이 빛을 뿜으며 주변의 마기를 모래알갱이처럼 부숴버렸다.
“저질렀다. 저질렀어. 하하하하!!!”
미친놈처럼 광소를 뿜으며 녀석이 허리를 꺾었다.
남은 평생 동안 웃을 수 있는 웃음을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웃기만 하는 녀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녀석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몸을 추슬렀다.
“하아. 하아. 아. 이렇게 웃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요. 다 당신덕분입니다. 비밀을 간직하고 산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전엔 미처 몰랐어요.”
그 녀석은 자신의 검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전에 내게 꿈을 이야기할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사실, 장수하면서까지 인류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세계수를 멸종시키는 계획에서 파생된 차선책이랄까요. 어차피 사라질 나무를 그냥 땔감으로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낭비는 좋지 않습니다.”
“미친놈. 왜 세계수를 멸망시킨단 말이냐. 왜? 나중에 그분의 자식들이 자라나서 복수라도 할까봐? 그리고 대체 지금 행동이 인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냐! 넌 그냥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라니. 말씀이 심하시군요. 제가 언제 허투루 일을 진행하는 거 보셨습니까. 이 모든 게 인류를 위해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녀석은 내게 다가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녀석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눈빛은 여전히 함께 여행하던 때와 달라지지 않아서, 녀석의 옛 모습이 떠올라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이 녀석은 바뀌지 않았다. 미친 게 아니라 원래 이런 녀석이었던 것이다.
“마왕이 나타나서 바뀐 인류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단번에 바꾼 그 파괴적인 힘을. 평화롭게 진행하려고 했다면 영원이란 시간이 주어져도 바꿀 수 없는 인류의 골을 단숨에 메운 모습을. 저, 꽤나 절망했었습니다. 인류의 화합에 필요한 건 화해와 평화가 아니라 공공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거든요.”
공공의 적. 그 단어를 듣고 녀석이 결계를 깨트린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마왕의 기운을……. 마기를 세상에 풀어놓겠다는 것이냐?”
“네. 뭐가 그리 두려우신 겁니까? 마왕이 두려운 것이지 그가 남긴 마기가 두려운 것은 아니죠. 확실히 마물은 강합니다. 인류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죠. 그래서 마물이 필요한 겁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마물이 있는 한 인류가 깨질 위협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왜! 어차피 세상에 마기는 넘치도록 흐르고 있을 텐데!”
“……?”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 혹시 결계에 구멍을 낸 게 세상에 마기를 퍼트리려 그런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그거랑 이거는 별개입니다. 역시, 혼자서 사시느라 머리가 많이 굳으셨군요.”
나를 비꼬듯이 녀석이 자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마기는 충분합니다. 사실, 넘쳐나고 있지요. 생각보다 인간들이 잘 넘어오더군요. 너무 잘 넘어온 덕분에 다른 종족들 간에 상당히 마찰이 일어나고 있어서 말이죠. 이 상황에 혹시 누가 옛날의 추억에 빠져 이 곳으로 오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상식이 있으면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은 구분할 수 있겠지.
그런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는 종족은 역시 인간뿐이었나.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녀석이 연극을 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 그분에게 사죄해야 한다. 아, 그분이 그립도다. 그래. 엘퀴라즈 숲으로 가서 그분께 사죄드리자. 하하. 이런 말들이 조금씩 들리기에 예방책에서 왔습니다. 마기로 숲을 덮어버리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겠지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마기를 뚫고 숲으로 들어올 생각을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결계를 뚫은 건가? 진실을 들킬까 봐 무서워서? 마왕을 해방시켰다는 거냐?”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를 바보라고 생각하시면 섭섭합니다. 이미 미친 용이 만든 결계에 대해선 다 조사가 끝났습니다. 이런 자그마한 구멍 정도로 깨질 만큼 약한 결계가 아니더군요. 역시 그 용은 대단합니다. 어쩌면, 결계가 깨지고 밖으로 나온다면 마왕대신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르겠습니다.”
녀석이 웃었다. 아까와 같은 광소가 아니라, 피곤에 찌든 사람이 짓는 힘없는 미소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녀석의 검에서 빛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빛은 마법진을 그리며 나와 녀석의 아래에서 빛났다.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수십 년 만에 마음에 담긴 말을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내가 전부 이야기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럼 이 세상은 끝이야.”
“그럴 리가요. 당신이 저를 잘 알듯이 저도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다. 전혀 아니야. 함께 여행을 한 것이 십수 년이거늘, 녀석은 나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녀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녀석이 가진 꿈에 대한 광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젠가, 인류가 더 이상 제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해졌을 때,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의 지금의 분노도 식을 테니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겠죠?”
소름이 돋았다. 친구라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친구라니. 녀석의 마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어딘가 망가진 것만 같다.
“그럼 이만.”
눈부신 광채가 나와 녀석을 뒤덮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숲 밖의 차가운 대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도끼만이 내 곁에 있었을 뿐,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너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녀석과의 싸움에서 다친 몸뚱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나를 채찍질해 주는 것 같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도끼에서 그분의 마력이 흘러들어온다. 이런 죄인에게도 그분은 차별 없이 온정을 베풀어주시는구나.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음이 복잡해 그것이 죄책감인지, 고마움에 대한 서러움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억지로 내게 흘러들어오는 마력을 밀어냈다. 오른팔의 상처만 치유되고 나머지 상처는 그대로였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이 상태가 제일 잘 어울린다.
며칠을 걸어 원래 살던 숲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마을로 향했다. 진실을 말하길 포기하고 숲에 은거를 택하면서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가던 그 마을이었다.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을 굴리며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지칠 대로 지쳐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으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거지같은 행색과 다친 몸을 보며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지만, 항상 정체를 숨기고 마을에 내려왔었기에 나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사람들은 다친 이방인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고 끝이었다.
그런 호기심 반, 무관심 반인 사람들의 눈빛마저도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그제야, 나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게 되었다.
기껏 이룩한 그 망할 평화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인간을 포함한 이종족들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마족은 대놓고 인간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성격 급한 아인들은 인간에게 시비를 걸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도 보였다. 심지어 드워프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그 소수의 감정이 언젠간 모두에게 퍼져나갈 것이다.
나는 숨죽여 울었다. 울면서, 숲에 있는 나의 집으로 발걸음을 질질 끌며 향했다.
돌아가는 와중에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집을 가로지르는 대들보에 올가미가 걸려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올가미가 사라져 버렸다. 환상이었다.
진심으로, 녀석은 나를 잘 알고 있다. 녀석의 꿈은 나의 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진실은 세상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동시에 나는 그분께 받은 은혜를 잊지 못한다. 그때 느꼈던 경외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세상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은혜와 꿈. 평화로운 일상과 혼란스러운 세상으로의 회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내가 숨어사는 동안, 세상의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벌어지진 않았을까?
내가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더라면, 용사들만 경멸의 대상이 되고 끝나지 않았을까?
내가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더라면…….
대들보에 걸려 있던 올가미의 환상을 진짜로 만들자.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죽음조차 나에겐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차마 실행할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그 분이라도 계셨더라면 아니, 그 미친 용이라도 있었더라면 제발 날 죽여 달라고 빌었을 텐데.
속죄하자. 내 목숨이 남아 있는 한, 그분께 속죄하자.
침대에서 내려와 천으로 그분께 받은 도끼를 감쌌다. 나는 이 무기를 쓸 자격이 없다. 그래. 봉인하자. 앞으로 나도,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도록.
그리고 죽을 날이 다가온다면, 그 숲으로 돌아가 그 분 앞에 바치자. 이 모진 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 * *
“쿨럭!”
격한 기침에 잠이 깨버렸다. 눈을 뜨니, 어둠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나는 죽지 않았던가……?”
분명 성치 않은 몸으로 힘을 끌어올려 바위를 부수고, 기운이 빠져 바닥에 쓰러졌던 마지막 순간이 기억났다.
전신에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거늘, 어찌 죽지 않은 것일까.
“그분의 보살핌…… 인가?”
나는 도끼를 찾아 손을 더듬어봤지만, 도끼는 내 곁에 없었다.
나 이외엔 만질 수조차 없게 봉인해 두었으니 훔쳐간 것은 아닐 테고, 아까랑 장소가 달라진 것을 보니 누군가 쓰러진 나를 옮긴 것이 분명하다.
“여긴 대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나를 옮겼단 말인가. 그 전에 누가 이 숲에 나 이외에 들어왔단 말인가.
“이상한 일 투성이로군…….”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희한한 일투성이다.
마물도 보이지 않고, 멀쩡해 보이던 다리가 무너지지 않나,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누군가 옮겨주질 않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 죽을 때가 다 된 내가 헛것을 보는 것일까.
“쿨럭…….”
확실히 죽어가고 있다. 몸에서 마력이 지금도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 오늘밤을 버틸 수나 있을까. 역시 무리를 하지 말고 천천히 돌아갈 것을.
“그래도…… 가야겠지…….”
그분께 받은 무기를 돌려주어야 한다. 아직 사죄는 모자라지만, 그분을 생각하며 만든 조각상도 그분께 보여드리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니까.
“……!”
품속에 조각상이 없다.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떨어져 있지 않다. 설마 내가 쓰러졌던 곳에 떨어져 있는 건가?
그때, 어디선가 앳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음.”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수풀을 헤치고 그곳으로 가니, 공터로 보이는 곳에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소녀라고 부르기도 이른, 어린 여자아이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조각상을 손에 들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닮았다. 그분과 너무나도 닮았다. 어린 모습이지만 그 속에 담긴 외형도, 분위기도 전부 그분과 판박이였다.
순간, 나를 향해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이 아이가 그분과 어떤 식으로라도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무릎이 땅에 닿았다.
나를 보며 아이가 웃었다. 그분의 미소가 겹쳐보였다. 아이의 고운 목소리가 내 가슴을 울린다.
“안녕? 일어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