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40화 (40/200)

=======================================

[40] 은원(2)

누군가를 마주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만나서 밝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분이 떠올라 견딜 수 없다.

용사라고 칭송할 때마다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진실을 이야기했을 때 벌어질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내게 미래를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불가능한 꿈이다.

그래서 나는 숨었다. 마물이 남아 있는 숲으로 들어가 혼자서 평생을 지내기로 결심했다. 겁쟁이처럼 현실에서 도망가기로 한 것이다.

숲으로 찾아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물들에게 죽고자 하는 이가 아니라면 숲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을 리 없으니까.

때때로 누군가 찾아왔다 생각이 들어서 밖으로 나가보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물이었고, 마물을 죽이고 난 날은 꿈속에서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재현되며 나를 괴롭혔다.

때때로 생필품을 얻기 위해 정체를 감추고 마을로 내려갈 때마다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내 한마디에 그들의 평온한 생활이 부서질까 두려워 필요한 물건만 사고 도망치듯 숲으로 떠나기를 반복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숲에서 홀로 지내다보니 한 가지 취미가 생겨났다.

취미…… 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속죄라고 말해야 할까.

그분을 닮은 조각상을 만들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상을 알고 있는 남은 자들 중에 그날의 일을 후회하는 자가 있을까. 그날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이가 있을까.

죽을 수 없다. 언젠간 진실을 말할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만이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큰 상처로 죽어가던 몸이 다 나았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바깥 생활과 동떨어진 이곳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가끔 들리는 마을의 모습도 변해 있었다. 생필품을 사는 가게는 아버지를 돕던 아이가 자라나 어느새 그 가게를 물려받았다. 장난감 칼을 들고 모험가 놀이를 하던 꼬마아이들은 어느새 진짜 모험가가 되어 마을을 떠났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나만이 그 날 이후로 멈춰 있다.

그렇게 숲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내게 배달되었다. 그 녀석이 보낸 물건이었다.

나에게 책을 건네준 사람은 뛰어난 기사인지 마물이 판치는 이 숲을 상처 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대왕께서 네게 책을 전해주라고 했다며 거만하게 말했다.

대왕이라. 이제 그 녀석은 대왕이라 불리는 것인가.

나는 책도, 대왕이라 불리는 녀석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그가 가지고 있던 검이 거슬렸다.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검의 손잡이는, 그분과 같은 세계수로 만들어져 있었다.

“잠깐. 그 검은 뭐지?”

“아, 이 검 말인가?”

그는 내가 용사인 것을 모르는지 내게 반말로 말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대왕께서 내게 하사하신 보검이지. 그 귀한 세계수로 만들어졌다. 드워프라 그런지 보는 눈이 있군.”

기사는 자랑하듯이 내게 그 검이 얼마나 뛰어난지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내 귀엔 그가 흥분하며 떠들어대는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저 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추측하고 있었다.

그분은 사라졌다. 그 분에게 무기를 받은 것은 일곱의 용사가 전부였다.

저 검은 그 녀석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든 거지? 그 분이 사라지고 남은 파편이라도 있던 건가?

기사가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자리에 돌덩어리처럼 굳어져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 가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결말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그 녀석을 한 번만이라도 믿고 싶었다. 같이 여행할 때의 영웅과 같았던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생각을 멈추니 기사에게 받은 책을 보았다.

딱딱한 책의 표지가 안에 담긴 내용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표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류의 승리.

인류의 승리라. 인류. 그 단어로 묶인 세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집 안에 퍼졌다. 낡은 책이다.

왜 이것을 나에게 보냈지? 의구심이 앞섰지만 내용을 살펴보기로 했다.

책의 내용은 인류의 과거부터 현재까지가 적혀 있는 역사서로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서라기보단, 그 녀석이 나오는 부분이 더 많았다.

인류의 역사서가 아니다. 그 녀석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화자가 그 녀석으로 바뀌었다.

그 녀석이 자라온 환경. 인류를 하나로 만들고자 한 꿈을 다짐하는 모습. 그 녀석이 대륙을 떠돌며 벌여온 영웅적인 행보.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인류의 역사서인가. 그 녀석의 회고록인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읽었다. 녀석의 행보는 마왕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내가 알던 것 이상으로 각색되어 이젠 인간인지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정의롭고, 용감하고, 상냥하고, 현명한 인간으로 그려져 있었다.

과연 마왕과의 최후의 전투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어쩌면, 진실을 담아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마왕과의 전투는 진실을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분이 한 일이라곤 우리들에게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를 준 것 외엔 적혀 있지 않았으며, 마왕에게 그나마 가장 피해를 입힌 미친 용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분의 희생은 단 한 문장, 한 글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설마…….”

계속해서 읽었다. 손이 떨려온다. 책이 흔들려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정신을 집중해서 읽었다.

용감하게 덤벼든 용사들 중 네 명이 마왕에게 죽는 장면이 나왔다.

지금 이렇게 살아서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 장면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였나. 그 기사의 태도. 나는 이미 죽은 것인가.

최후의 순간, 마왕을 죽인 명예는 세 명의 용사에게 돌아갔다. 그 세 명의 용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육체적으로 다른 종족보다 허약하고, 마법을 다루는 능력 역시 다른 종족보다 약하며, 장수종도 아니라 오래 살지 못하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남아 마왕을 죽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류는 하나라며. 모든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싸운 그 전투를 어째서 인간이 결정적으로 해결한 것처럼 은연중으로 비추고 있는 것이냐.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차라리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용사가 독백하는 장면에서 책을 찢어버렸다.

믿을 수 없다. 있어선 안 된다. 최악의 결말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받은 이 무기는 마왕조차 쓰러트릴 수 있는 힘이 담겨져 있다. 거기에 세계수에게 받은 포션은 어떠한 상처도 치료했으며 더불어 마력까지 증가하는 굉장한 위력이 담겨져 있었다.

정말 불경한 생각이지만, 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세계수로 만든 포션과 무기가 더 있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구매했을 텐데.』

그 생각은 도움을 준 세계수에게 은혜를 모르는 불경이었기에 나는 곧 머리를 휘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 * *

믿을 수 없는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분께 받은 무기를 손에 들고, 그분이 있던 숲으로 향했다. 쉬는 시간조차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달리면서, 그분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째서 저희를 돕는 것입니까?’

우리가 처음 무기를 받은 그날, 그 녀석이 물었던 질문이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 이 세계가 좋아요. 그리고 이 세계엔 저희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미친 용과 성스러운 세계수의 자손들을 누가 건드릴 것인가.

‘다른 곳에도 세계수가 있었습니까?’

그 녀석의 말도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순간부터 모두 계획된 일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네. 언젠간 아이들이 자라서 저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다른 세계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분에게 도움을 받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수는 그저 크고 아름다운 나무에 불과했다. 세계수에 신경 쓰는 종족은 엘프들뿐이었다.

아마 그들도 세계수가 가진 힘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세계수로 포션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 생각 따윈 해본 적 없을 테니까.

마지막 전투가 있던 숲에 도착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마물이 나의 길을 가로막는다.

마왕의 마지막 종착지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마물들은 약하고 적었다. 이것도 다 그분 덕분일까.

그리고 잠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그분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나는 확인해야 한다. 그 기사가 가지고 있던 검이 그분이 죽고 남은 잔재로 만든 것이기를 빌었다.

이것조차 미칠 듯이 화가 났지만 차라리 이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자손들로 만든 것이 아니기를.

그분이 있던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엔, 그 녀석이 있었다. 나이가 든 모습으로 수염을 기른 모습이 중년을 막 넘긴 모습이었다.

“아……. 역시. 드워프시군요. 그 때랑 전혀 변한 게 없으십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하하.”

녀석은 혼자였다. 마치 들켜선 안 되는 일을 하러 온 것처럼 기사도, 마법사도 없이 단 혼자였다.

“그나저나 저희는 운명이라 해도 될 정도입니다. 이런 날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뭘 할 셈이냐.”

그분이 있던 곳엔 어둠으로 가득 찬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다가 등을 돌려 그 어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마왕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두 지켜봤죠. 그 미친 용이 하는 짓을.”

“죽지 않았다고?”

“이 아래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자세한 건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저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왕은 죽은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왜 진작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거지?”

“당신이 알았더라면, 이곳으로 바로 달려왔겠죠. 그 죽어가던 몸으로요. 그날 당신이 저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말씀드렸을 텐데.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마왕이 죽었든 부활했든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묻고 싶었다.

“세계수는……. 그분의 자손들을 어떻게 한 것이냐. 왜 책에 그런 말들을 적어 둔 것이냐! 네 녀석이 대체 원하는 것이 뭐기에!”

“받아보셨습니까. 그걸 읽으셔서 여기로 오신 거였군요. 기대는 하고 있었는데 예상대로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녀석이 웃는다. 설마 내가 그걸 읽고 여기로 오리라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아무리 저라도 도저히 쉽게 저지를 만한 일은 아니라, 누군가 말려줬으면 싶었습니다.”

녀석은 칼을 빼들었다. 그분께 받았던 그 무기가, 환하게 빛을 내며 나를 가리켰다.

“저를 말려주시겠습니까?”

말리다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죽여주지.”

녀석이 고맙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 * *

강하다. 예전에도 강했지만 이젠 나 따위는 상대도 안될 만큼 강하다. 처절하게 녀석에게 패배하여 그 때처럼 바닥에 몸을 눕혔다. 거친 숨이 바닥에 부딪히며 단내를 풍겼다.

“후우. 후우.”

“많이 약해지셨네요. 제가 강해진 걸까요.”

“어떻게…….”

“당신도 아시잖아요. 이러면 더 자세하게 아시려나.”

녀석이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종이를 찢듯이 얼굴 가죽을 잡아 뜯었다.

그 아래엔, 젊은 시절의 그 녀석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세계수란 젊음까지 유지해 주는 모양입니다. 마력까지 증가시켜 주는데 젊음까지 주다니. 이런 신의 축복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아. 그렇군.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결말이 사실이었다.

“그분의 자식들을……. 이용한 것이냐!”

“이용이라니. 정확하지 않군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투자? 투자! 네 녀석의 강함을 위한 것이 투자란 말이냐! 대체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계수를 희생한 거냐!”

“한 그루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분처럼 강한 세계수가 없어서 말이죠. 마법사들이 열심히 성장을 재촉할 방법을 찾고 있긴 한데, 쉬운 일이 아니네요. 성과가 없습니다.”

땅에 떨어진 얼굴 가죽을 품에 갈무리한 녀석이 표정을 굳히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젊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두 인류를 위해서입니다.”

남은 힘을 모두 끌어내어 나는 도끼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녀석은 필사적으로 뻗은 내 손을 짓밟았다.

“크윽…….”

“역사란,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인류가 하나로 뭉쳤지만, 언젠가 먼 훗날이 되면 다시 갈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래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 갈라질 것인가.”

내게 쭈그려 앉아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자세는 이제 용사라기 보단 뒷골목의 무뢰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첫째, 멍청한 후계자가 나타난다. 언제나 왕이 될 사람이 성군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녀석이 나타나면 기껏 이룩한 이 평화가 언제 깨질지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제가 계속 왕으로 군림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사람이 계속 살아서 왕을 하면 주변에서 불만이 나올 수 있으니, 이렇게 늙어가는 척 위장하면서 신분을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제 자식 대신에 왕을 하면 되니까요.”

“제 자식을 대신해서 왕이 되겠다고? 그럼 그 자식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 미소에 담긴 뜻을 알아채 버려서 소름이 끼쳤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이 녀석은 이제 용사가 아니다. 인간도 아니다. 인간과 용사의 탈을 쓴 무언가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아. 그러고 보니 저한테 물어보셨죠? 세계수를 어떻게 하셨는지.”

그 분이 있던 구멍이 있는 곳으로 녀석이 걸어갔다. 녀석이 손을 뻗자, 갑작스레 마력으로 만들어진 막이 생겨났다.

녀석은 그것을 칼로 찔렀다.

“인류를 위해, 세계수는 사라져야 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