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39화 (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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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은원(1)

나의 가족은 모두 죽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삼촌, 당숙, 사촌. 우리들은 모두 전사였다. 전사는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가지고 적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들 역시 아버지라 불리는 적을 베고 누군가의 동생을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그때는 그랬었다. 다른 인종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일상인 것이 상식처럼 내게 뿌리내려 단단하게 고정되었었다.

그것은 나 혼자만 남은 뒤에도 계속 되었고 우리들의 왕국이 멸망한 뒤에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갑옷처럼 내게서 벗겨지지 않았다.

“사람? 아니, 드워프…… 괜찮습니까?”

우연한 만남이었다. 사막에서 희망 없이 죽어가던 내게 신기루처럼 그가 나타났다.

유목민들조차 숨어버리는 모래바람 안에서 그와 만났다. 나중에 그에게 왜 그곳에 있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고 말했다.

무엇을 믿고 내게 손을 내밀었냐고 묻자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나와 닮아 보여서’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었고, 나는 드워프였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원수.

그러나 그것은 종족의 이야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드워프는 은원을 잊지 않는다. 네게 받은 은혜를 갚을 때까지 함께해 주지.”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사막에 쓰러져 죽어가던 나를 살려준 은혜만 갚고 떠날 생각이었다.

은원(恩怨)은 저울에 재어 확실하게 갚아야 한다.

그것이 드워프의 관습. 나의 핏속에 흐르는 본능. 은혜를 갚고 떠난다. 그리 생각했었다.

* * *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아인…….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웃긴 일이라는 이 현실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의 꿈을 듣고 나 역시 웃어버렸다. 대륙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혼자서 막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는가.

그가 은인만 아니었다면, 헛소리꾼 취급하며 얼굴에 침을 뱉어 줬을 것이다.

증오는 끊을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 모든 일의 시작을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신이 있다면, 투견처럼 이 세상에 우리들을 풀어 놓고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을 구경하며 즐기는 악질이라 생각한다.

단 하나의 종족이 남을 때까지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과연 이자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지 호기심이 생겼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끊임없이 되뇌며, 전쟁은 멈출 수 없다고, 이자가 좌절하는 모습을 눈에 그리며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매력적이었다. 함부로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자애롭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했다.

그는 용감했다. 필요에 의하면 상냥한 얼굴을 바꾸고 전사가 되어 상대를 베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지혜로웠다. 싸우지 않고 다른 종족들의 분쟁을 만남과 소통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유쾌했다.

그는 남에게 다가가길 좋아했다.

그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알았다.

그는, 그는, 그는…….

나는 그를 존경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죠.”

“나라를 만들지 않았나. 자네는 이제 왕일세. 저 국민들을 보라고. 이게 자네가 꿈꾸던 일 아니었나?”

나는 그가 좌절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대신 꿈을 이루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세운 나라는 그가 원하던 대로 분쟁 없이 살 수 있는 나라였다.

전쟁에 지친 자. 소중한 것을 잃은 자.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자가 한데 모여 그의 발걸음을 따라 왔다.

거기엔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마족도, 아인도 서로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어깨를 빌려주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작지 않습니까. 나라가 아니라 마을에 불과합니다. 이걸로 제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없죠. 제가 원하는 건 대륙에 사는 모두가 이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욕심이군.”

욕심이다. 같은 종족만 모여도 분쟁의 씨앗은 싹 틔우길 기다리고 있다. 분노, 이기심, 절망이 땅에 뿌려지길 기다린다.

한 방울이라도 땅에 떨어지면 씨앗은 순식간에 자라나 모든 것을 삼킨다.

욕심이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했다.

이제는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간절하게 바랐다. 그와 함께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증오의 갑옷이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행보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왕이 나타났다.

* * *

그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는 자는 없었다.

시체가 널린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났다.

신이 전쟁에 미친 대륙의 종족들을 벌하기 위해 강림시켰다. 먼 옛날부터 땅 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다가 우연히 깨어났다…….

그저 추측으로 이루어진 무성한 소문들만 떠돌았다.

마왕이 어디서 무엇을 하다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엔 서로 누구의 종족이냐 어느 국가의 비밀병기냐 언성을 높이며 싸워대던 이들도 마왕의 행보가 지속될수록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마왕에게 입을 다물어지게 되거나.

어느 쪽이든 조잘대는 아가리는 꾹 다물어졌다.

마왕은 어딘가를 향해서 똑바로 진격하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우리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며 진격하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살육에 미쳐, 비명을 지르며 숨고 도망치는 자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개미들이 버글거리는 길 위를 걷는 것처럼 그저 우리들은 밟히면 죽고 밟히지 않으면 간신히 살아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왕이 지나가는 길을 비워줄 수도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은 기운들이 자리 잡아 우리들이 마물(魔物)이라 이름 붙인 존재들을 만들어냈다.

짐승이든 몬스터든, 인간과 엘프, 드워프와 마족 모두 종족에 상관없이 그것에 닿으면 그저 한 마리의 마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마기(魔氣)라 이름 붙이는 것 말곤 감히 없앨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언제까지 서로 싸움만 계속할 것입니까!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남이 아닙니다. 인류(人類)라는 이름 아래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에게 좋은 기회로 찾아왔다.

멋으로 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가 만난 수많은 종족들이 그의 언성에 동의하고 그에게 찾아왔다. 그가 만든 나라에 들어오길 거부하던 자들도 위기의 순간이 되자 그와 함께하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평화를 원해 평화롭게 일을 진행할 땐 헛소리 취급을 당하다가, 이제 와서 모두가 그의 의견에 찬사를 보내며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다니.

압도적인 적이라는 공포가 오히려 모든 종족을 인류라는 하나로 만들었다.

하나로 뭉친 인류는 마왕에게 대항했지만, 그를 쓰러트릴 방법은 없었다. 압도적인 강함이란 별거 없었다.

말 그대로 압도적. 개미가 수억 마리 뭉쳐봐야 불어오는 태풍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이 용사로군요.”

그리고 인류가 마왕이 가는 길을 막아서기 위해 어느 숲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아니, 나는 그분을 만났다.

“이것을, 여러분께.”

인류를 대표하는 일곱 명의 강자. 용사라 불리는 우리들에게 그분께선 자신의 몸을 깎아 만든 무기를 주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그분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돋이를 보았을 때의 그 전율. 가슴이 벅차올라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느낌.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사막에 모래에 누워 나를 덮쳐온 모래폭풍과 같은 두려움을 마왕이 주었다면, 그분은 반대로 봄의 태양과 같은 따스함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에게 받은 무기로 인해 마왕을 없앨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절대로 없앨 수 없으리라 믿었던 마기도 이 무기를 사용하면 없앨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왕을 감싸고 있는 마기를 뚫고 그에게도 상처를, 죽음을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무기를 받은 용사 모두가 인류의 미래를 걸고 마왕과 사투를 벌이던 그 순간, 유일하게 나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도끼를 손에 쥐었다.

그분을 지키고 싶다. 마왕이여. 이 앞으론 절대 나가갈 수 없다.

* * *

전쟁, 마왕과 인류의 사투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려보지만, 그것은 신기루 같은 환상이 아니었다.

마왕에게 치명상을 입고 바닥에 누워 그를 노려보던 그 순간. 아직 움직일 수 있던 세 명의 용사가 발동한 마법.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광경.

“일어나셨습니까. 반년이나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그분은 어떻게 됐지?”

“…….”

누워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화를 터트렸다.

“은혜를 원수로…….”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었겠죠.”

“그럼 왜!”

“그래서입니다. 그 방법이 아니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었으니까요. 오로지 그것만이 세상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한 일? 네가 말하는 대의란 세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거냐?”

“그건……. 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얼굴이 불타버릴 것 같다. 목에서 분노가 응어리져 터져 나오지 않는다.

“당신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미친 용조차 마왕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일곱의 용사들조차, 셋이나 죽었음에도 그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했습니까? 그 방법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 분도, 인류도 모두 멸망했을 겁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부상이 낫지 않아 속도도 힘도 실리지 않은 주먹이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내 주먹을 맞아주었다.

그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필요 없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꿈? 네 꿈이겠지.”

그는, 그 자식은 거부하는 내 손을 강제로 잡아 나를 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아직 몸이 낫지 않은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테라스에 끌려온 나는 도시를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반년이란 잠들었던 시간 동안 세상은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다.

도로를 정비하고, 집을 세우고 사람들이 웃으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다른 인종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마족으로 보이는 자와 함께 웃으며 장난을 치는 사람. 아인으로 보이는 자가 운영하는 과일가게에서 흥정을 하는 사람. 서로 사랑하듯 손을 붙잡고 거리를 걷는 엘프와 아인.

“어떻습니까. 이곳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은 없습니다. 그분의 희생이 만들어낸 평화입니다. 제게 은혜를 말하셨지만 저는 잊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고 그분의 희생을 기억할 것입니다.”

“……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 네가…… 우리들이 저지른 죄악을.”

우리. 그래. 나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다. 그곳에 있었는데 막지 못했으니까. 죄책감이 나를 짓누른다.

“아뇨.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죠.”

“쓸데없는? 쓸데없는!”

그를 때리려고 주먹을 쥐었다가, 나는 손을 풀고 그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갔다. 그를 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편찮으신데 어디를 가십니까.”

“모두에게 진실을 말할 거다.”

“……진심이십니까.”

“왜? 막으려고? 염치없는 새끼! 이게 세상의 평화를 위한 거라고? 네 꿈을 위한 거겠지! 네가 바라던 세상을 보여줬다고 내 분노가 식을 거라고 생각했나? 천만에! 예전에 말했을 텐데? 드워프는 은원을 확실히 한다고. 그분께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모두 낱낱이 폭로할 거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놈은 나를 막지 않았다.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온 나는 거리의 모두에게 시선을 받았다. 붕대를 칭칭 감은 것으로도 시선을 끌기 충분한데, 용사인 나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용사님이다!”

“드워프의 전사이신 벨룸 용사님이야.”

그들은 경외의 시선을 담아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시선은 내가 그분께 보내던 시선을 떠올리게 해서 더더욱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말을 하려던 순간, 제일 앞에 앉아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지켜보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은, 마치 세상의 축소판처럼 엘프와 인간, 드워프와 마족, 아인들이 섞인 한 무리의 꼬맹이들이었다.

“와. 봐봐. 진짜 용사님이야.”

“멋지다. 나도 용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약속했잖아. 나중에 커서 모험을 떠나자고. 모험가가 돼서 여행하다보면 저분처럼 될지도 몰라. 우리 엄마가 용사님도 처음엔 모험을 떠났다고 했거든.”

서로 외모가, 종족이 달라도 친한 친구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 내가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드워프는 은원을 확실히 하길 좋아한다.

엘프는 세계수를 신처럼 여기며 숭배한다.

아인은 집단생활을 좋아하며 배신에 민감하다.

마족은 강한 자를 좋아하지만 치사한 것은 굴욕으로 여기며 경멸한다.

인간은…… 인간은? 인간은 어떻지?

‘말해야 해. 말해! 빨리 말하라고!’

몸이 떨려온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한마디가 저 아이들을 나처럼 만들 수도 있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사막에 혼자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던 나처럼 만들 수 있다.

‘은원은 확실하게……. 확실하게!’

“용사님? 아.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으셨군요!”

“나는, 나는…….”

나는 말할 수 없다. 진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선택할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의 꿈에 물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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