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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노인(老人)(2)
위그드라실. 그것은 나의 이름이자 어머니의 이름. 기적과도 같은 우연인지, 세계수로서 이어진 필연인지 모를 운명으로 이어진 이름.
노인에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처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였고 그 생각이 빠르게 지나간 다음 어머니를 떠올렸으며 품에서 꺼낸 어머니의 조각상을 다시 한 번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노인은 어머니를 알고 있다.
노인이 발언한 천 년의 삶. 그리고 어머니의 조각상과 이름. 퍼즐조각이 맞춰지며 노인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 숲에서 일어났던 천 년 전의 마왕과의 사투. 그곳에 이 노인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알지도 모르는 노인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다.
나는 노인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고, 조각상을 들고 기도를 하다 땅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진 노인의 몸을 관찰하였다.
방금 전, 바위를 부수는 기행을 벌인 터라 위태위태하던 몸속의 마력이 꺼져가고 있었다.
『치료되어라.』
하얀 마력을 노인에게 불어넣었다. 육체에 난 상처가 아니라 생명력 자체가 떨어져가고 있는 것이기에 이것으로 치료될지는 의문이었다.
“아빠……. 죽은 거예요?”
“곰. 곰, 곰.”
「고수는 죽지 않는다. 다만, 우화등선 할뿐이다.」
상황에 맞지 않는 곰의 개그는 무시하고, 핀의 질문에 대답할 시간도 없이 나는 노인의 상태를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치료에 뛰어난 세계수만이 가진 하얀 마력이 노인의 전신에 퍼졌지만, 노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치료라는 것은 다친 사람을 원상태로 복구하는 것. 노인의 몸은 다친 것이 아니라 그 삶이 다하고 있었다.
마치 깨진 그릇 안에 물을 채워 넣는 것처럼, 노인의 몸속에 불어넣은 나의 마력은 곧바로 빠져나와 버렸다.
그래도 조금은 효과가 있었다. 꺼져가던 노인의 마력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의 바람 앞의 촛불 상태는 간신히 넘겼다.
『죽지는 않았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야.』
앞으로 넘어진 노인의 몸을 보따리가 누름돌마냥 깔아뭉개고 있어서 기껏 살려놨더니 깔려 죽을 것만 같아서 나는 쓰러진 노인의 보따리를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내가 보따리를 들어 옮기려는 순간, 갑자기 스파크가 일어나며 내 손발이 되어주던 마력이 보따리에서 기화하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제가 잡았어요.”
노인의 몸 위로 떠올랐던 보따리가 떨어졌지만 다행히 핀이 잡아주었다. 정신을 잃은 노인에겐 꽤나 치명상이 됐을지도 몰랐는데 다행이다.
“으음……. 왜 안 풀리지?”
『핀. 남의 물건은 함부로 열어보는 거 아니야.』
핀은 내가 말했음에도 계속해서 보따리를 열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요즘 핀에게 애정을 쏟아주어서 말을 잘 듣는다 싶었더니 다시 반항기의 시작인가.
『핀.』
“아. 죄송해요. 아빠. 근데…….으음……. 보따리가 자꾸 신경 쓰여요.”
말을 하면서도 핀의 시선은 보따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것을 찢어 안의 내용물을 꺼내고 싶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기엔 조금 정도가 지나치다.
핀이 그러니까 괜스레 나도 보따리에 신경이 쓰인다. 나는 이번엔 보따리를 관찰만 해보았다.
하얗다는 점을 빼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보따리인데 마력을 퉁겨내는 그 장치는 뭘까. 특별한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걸까.
조금 세밀하게 관찰해 보자.
보따리를 잡는 것이 아닌, 마력으로 훑듯이 표면만 살펴보았다. 보따리는 비단으로 짠 듯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내구도 역시 뛰어나보이진 않아서 성인남성이 손으로 잡아 양쪽으로 쥐어뜯으면 뜯겨질 것…….
『핀. 왜 그러니.』
“으아? 어……. 내가 왜 이러지…….”
생각하는 사이에 또 핀이 보따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 핀은 보따리를 잡고 양쪽으로 쭉 뜯어버리고 있었다.
핀의 힘이면 진즉에 찢겨져야 할 보따리는, 신기하게도 찢어지지도, 늘어지지도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핀의 상태가 이상하다. 행동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모습도, 마력도 이상하다.
나와 같은 마력을 지녔던 핀은, 아버지가 벌인 모종(?)의 일로 마력의 색이 나와 달라졌다.
아버지의 마력은, 색으로 표현하자면 검은 기운과 다르게 밝게 느껴지는 검은색이다. 그 검은색과 어머니의 하얀 마력이 합쳐져 약간의 짙은 음영을 띤 것이 나와 핀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핀은 아버지가 벌인 일로 인해 그 색이 달라져 버렸다.
내 추측으론 아버지가 핀에게 마력을 주신 것 같은데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하얀 바탕에 검은 선이 그려져야 할 그림이 검은 바탕에 하얀 선이 그려진 것처럼 반전된 것이다.
핀의 성격의 변화는 단순히 육체의 성장에 맞춘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마력도 한 손 거든 것 같다.
마이페이스인 것부터 해서, 변신했을 때 그 성격은 완전 판박이니까.
그 아버지의 검은 마력이 지금 핀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변신한 것은 아니지만 눈동자도 점점 붉어지고 있고 피부도 옅은 갈색이 올라오고 있다. 이대로면 완전히 변신해서 천이 찢어질 때까지 공격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으으……. 왜 안 찢어지는 거야. 감히……!”
『핀. 아빠가 할 테니까 잠시 뒤로 물러나 있으렴.』
“괜찮아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아빠 말 들어야지. 핀.』
“내가 아빠보다 힘이 센데…….”
투덜거리며 핀이 보따리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내가 보따리를 푸는 걸 실패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겠다는 듯이 발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보따리를 노려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보따리의 표면을 마력으로 훑었다.
풀리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 어딘가 내가 모르는 장치가 돼 있을 것이다.
손끝으로 촉진하듯이 보따리를 검사해 보았다.
‘이건……. 미로 같네.’
옅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보따리엔 마력으로 그림을 그리듯 선이 그려져 있었다.
복잡한 구조로 그려진 마력의 그림은 꼭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그 마력으로 그려진 선부분에 마력을 집중하자 아까처럼 마력을 퉁겨내었다. 반대로 그 선이 없는 부분에 마력을 집중하니 물에 스며들 듯이 마력이 보따리에 스며들었다.
그렇군. 마력으로 빈 부분을 채우면 열리는 구조인가. 자물쇠와 비슷한 구조구나.
비어 있는 부분을 따라 마력을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길은 좁고 복잡해서 한붓그리기로 미로를 함정에 빠지지 않고 통과하는 느낌이다.
벽에 너무 닿으면 마력이 튕겨 나오니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핀이 언제 달려들지 모른다는 촉박함까지 옆에서 어시스트를 하고 있어서 부동심이 없었다면 꽤나 고행이 될 뻔한 일이었다.
『열었다.』
유리가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보따리에 그려져 있던 마력의 미로가 사라졌다.
묶은 부분이 보이지 않던 보따리는 미로가 사라진 자리가 예리한 칼로 베인 듯이 잘려 나가며 내용물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도끼였다. 도끼날은 묵직한 은빛을 띄고 있었고 날이 곤두서서 내려치는 모든 것을 두 동강 낼 수 있는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아무런 문양도 새겨지지 않았지만 단조롭다거나 평범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도끼날을 달고 있는 손잡이를 본 순간,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의 정체, 어째서 노인이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어째서 어머니와 닮은 조각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노인이 이곳으로 온 이유까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용사들은 인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 마족, 엘프, 드워프, 아인. 그리고 인간 셋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모두 죽은 듯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쓰러진 인물 중에, 가장 키가 작은 드워프의 용사. 죽는 순간까지 손에서 도끼를 놓지 않고 몸을 눕혔던 용사.
그 용사의 손에 쥐어져 있던, 어머니의 가지로 만든 도끼. 용사들에게 선물했다던 그 도끼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용사인가?』
인간 용사 셋을 제외하면 전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었다니.
나는 도끼를 다시 보며 거기에 묻어나오는 어머니의 마력을 느꼈다.
어머니의 자손인 다른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졌으리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어머니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마력을 옅게 가지고 있어 구분할 수 있다.
이 도끼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때 묻지 않은 완벽한 하양. 어머니의 마력이 확실하다.
……음. 아버지의 마력이 때라는 건 아니고. 그냥 검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쨌든 이것은 확실히 어머니가 용사들에게 만들어주었다는 그 무기가 확실하다. 그리고 노인을 용사라고 생각하자, 기억 속에서 쓰러져 있던 그 드워프 용사가 노인과 겹쳐보였다.
그 시절의 모습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검고 풍성하던 수염은 눈처럼 세었고, 돌덩어리를 뭉쳐 놓은 듯한 근육들은 사라지고 없었으며 팽팽하게 당겨지던 피부는 늙은 고목처럼 주름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일치하는 부분이라곤 키와 세었지만 여전히 무성한 수염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용사라 확신했다.
외모가 달라졌다고 해서 노인의 행동까지 변하지는 않는다. 노인이 보여준 행동들은 그가 천 년 전의 용사라 말해주고 있었다.
어머니께 드리는 사죄와 말투에 배어 있는 짙은 후회는, 어머니의 죽음을 용사인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는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드워프도 오래 사는구나. 천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살아 있다니.
문득, 핀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걱정되었다. 나와 같이 아버지의 기억을 봤으니 어쩌면 도끼를 보고 노인의 정체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핀은 노인에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두 손으로 도끼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핀의 몸에서 아버지의 마력이 빠져나와, 도끼에 서려 있던 어머니의 마력을 끌어당겼다.
“아빠…….”
핀은 울고 있었다. 본인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울고 있던 눈을 조용히 감으며 쓰러졌고, 옆에서 보고 있던 곰이 핀을 허둥지둥 안아 들었다.
어머니의 마력을 모두 흡수당한 도끼는 그 광택과 신비함이 사라져 평범한 도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머니의 가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나는 노인과 도끼, 곰과 핀을 공중으로 띄워 올린 후 내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어……. 이제 알겠군.』
어머니의 마력에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자의 기억을 일부 흡수하는 것일까.
어머니의 마력을 흡수한 핀에게서, 노인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아마 잠이 든 핀도 그것을 보고 있겠지.
기억은 중간에 끊어져 있었지만, 노인이 이 숲을 찾아온 이유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나는 내 곁에 모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인, 드워프 용사 벨룸을 보며 그의 기억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