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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노인(老人)(1)
남을 방해하는데 고전적인 함정은 무엇이 있을까.
현실이 로맨스라면, 주인공과 히로인을 맺어주기 위해 으슥한 골목길에서 불량배들이 튀어나와 어깨를 툭, 하고 부딪히는 함정이 있을 것이다.
현실이 공포, 호러물이라면 같이 길을 걷던 친구가 알고 보니 연쇄살인마였다거나, 첫 눈에 반한 여자가 사실은 귀신들린 여자라 주인공을 공격하겠지.
현실이 추리소설이라면, 친했던 친구들이나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살인범이 되어 고립된 산장에서 하나 하나 죽어나가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 팠다.”
그렇게 본다면, 곰과 엘프가 함께 바닥에 구멍을 파고 있는 이 현실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둘 사이에 로맨스 따윈 없으니까 그냥 단순한 코미디라고 해야 하나.
“곰.”
「고수는 이런 함정 안 걸린다.」
“흥. 곰. 네 말 아직 믿는 거 아니거든?”
구멍 파기를 끝낸 둘은 그 구멍에 가지를 가로로, 세로로 겹쳐서 튼튼하게 만든 후 그 위에 잎이 넓은 나뭇잎을 덮은 후 흙을 뿌려 위장시켰다.
겉보기엔 평범한 산길로 보여서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하고 노인은 함정에 빠질 것이다.
『얘들아……. 굳이 이런 짓까지 해야겠니?』
흐음. 곰의 ‘고수다’라는 발언 이후, 바로 함정을 준비하는 적극성을 보인 이 둘을 말리지 않은 나도 한패나 마찬가지로군.
일단 핀이 노인을 공격하는 것은 막았지만 핀의 ‘그래도 아빠랑 마주치게 둘 순 없어요’라는 말에 나는 노인이 더 이상 숲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로 합의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노인을 번쩍 들어 숲 밖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말을 걸어 귀신인 척하고 협박을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다. ‘고수’라니. 보고 싶잖아.
그래서 핀과 곰이 어떻게 행동하나 가만히 지켜봤더니 둘은 옛날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악당처럼 웃으며 아주 고전적인 함정을 파고 노인이 거기에 걸리길 기다리고 있다.
삼류악당이냐. 핀은 그렇다 쳐도 곰 너는 왜 그러는데. 저 노인, 고수라며. 고수는 이런 함정 안 걸린다며.
한 번 물어봤더니 대답이 이렇다.
“곰. 곰.”
「대장은 바보라 직접 시도해 보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는다. 그래서 돕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너도 재미있어하는 얼굴인데.
묘하게 입 꼬리가 올라가 있다. 곰이 웃는 모습은 개가 웃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군.
“왔다.”
노인이 도착하자 핀과 곰이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둘 다 표정이, 노인이 함정에 빠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하는 표정이다.
이것도 놀이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것 같다. 하긴, 이 숲에서 놀 만한 상대도, 놀 거리도 없으니 이런 일이 즐거울 수밖에.
“으음, 이쪽이 맞던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이 함정이 있는 길로 향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핀과 곰의 표정이 낭패를 본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지……. 이쪽이 맞겠지……?”
“장난 하냐!”
“곰!”
숨어 있던 핀이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벌떡 뛰어올랐지만 곰이 머리를 꾹 눌러 다시 집어넣었다. 노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핀과 곰이 숨은 바위를 쳐다보고 ‘끄응’ 하고 신음을 냈다.
“죽을 때가 되니 환청까지 들리는군. 엘퀴라즈 숲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자기 평가가 너무 박하신거 아닙니까. 환청 아닙니다. 진짜로 사람 있어요.
엘프랑 곰이지만.
“자.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노인은 등짐에 메고 있는 하얀 천을 쓰다듬고는 함정이 있는 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평범하게 통과하고는 핀과 곰이 볼 수 없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 왜 안 빠지지?”
바위에서 나온 핀이 의아해하며 함정 위로 올라갔다. 발을 한 발짝 딛는 순간, 와지끈하며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핀의 신형이 사라졌다.
“으아아악!”
함정은 멀쩡하구나. 근데 왜 노인은 빠지지 않은 거지? 체격이 작으니 너무 가벼워서 그런가?
하지만 등짐의 무게까지 합치면 빠져야 할 텐데. 설마 진짜로 고수인 건가.
“왜 작동하지 않은 거야.”
“곰.”
「대장이 노인보다 무겁다는 증거다. 」
“이잇!”
함정에서 점프하는 것만으로 빠져나온 핀은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에 보여줬던 살기와는 다른, 포기할 수 없다는 집념의 분노였다.
“반드시 빠트리고 만다!”
그 집념을 다른 데 써주면 참 좋을 텐데. 살기를 품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 * *
“후후.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노인의 말로 추정했을 때, 이 숲은 엘퀴라즈 숲이라 불리는 것 같다.
엘퀴라즈 숲은, 단순히 광활한 숲이 아니다. 산도 있고, 깊은 협곡도 있다. 하나의 숲에 이런 다양한 지형들이 넘쳐흐르듯 범람하고 있다.
그 숲에서, 노인이 향하고 있는 앞길엔 협곡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깊고 넓은 협곡은 돌아서 가기엔 그 시작점이 보이지 않았고, 내려가기엔 가파르고 아래에 터 잡은 거센 강물이 방해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슬아슬한 절벽처럼 얇고 긴 한 줄기 절벽으로 된 길뿐이다. 옆으로 발을 삐끗하는 순간, 끝없는 절벽 아래로 추락해 강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핀. 그냥 다리를 다 부수면 되지 않니?』
그 길을, 핀은 중간 지점을 부숴 버리고 또 아까와 비슷한 함정을 설치해 놓고 노인이 빠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힘 조절을 어찌나 잘했는지 중간부분만 절묘하게 부수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엮은 뒤, 나뭇잎 대신에 흙을 뿌려두었다.
“포기하지 않아요. 반드시 빠트리겠어요.”
『너무 티가 난다만.』
돌로 만들어진 길 한가운데만 유일하게 흙이 뿌려져 있으니 티가 안 날래야 날 수밖에 없지. 노인의 눈이 침침하기를 비는 수밖에 없나.
“왔다! 아빠. 빨리.”
노인이 드디어 협곡에 도착했다. 나는 핀과 곰을 들어서 협곡 반대편 숲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둘은 그곳에 아까처럼 숨어 노인을 관찰하였다.
“곰.”
「고수는 이런 협곡 정도는 날아서 건넌다.」
“말도 안 돼는 소리 하지 마. 사람은 새가 아니야.”
“곰. 곰.”
「고수는 사람이 아니다. 인외(人外)의 존재다.」
곰. 너희 둘도 인외(人外)의 존재거든. 특히 곰, 너는 자꾸 잊는 것 같은데 인외(人外)를 넘어서 그냥 인간의 범주에 안 들어가.
“흐음. 기억나는군. 이 길이지. 맞게 가고 있었어.”
과연. 이번에는 함정에 걸릴 것인가. 나까지 기대된다.
걸리면 죽음이 확실시되는 함정이라 더더욱.
……흠. 타인의 죽음을 이렇게 쉽게 보게 되다니. 내 자신이 무섭다.
하지만 노인이 발을 딛는 순간, 갑자기 핀이 설치해 둔 함정이 있는 부분부터 균열이 발생하더니 바위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길이 부서져 버렸다.
역시, 절묘한 힘 조절처럼 보였지만 핀이 그런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아앗! 안 돼! 내 함정!”
이것으로 함정 놀이는 끝인가. 저 먼 곳으로 돌아가기엔 노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 이 자리에서 길이 끊어진 충격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허어. 여기를 건너야 하는데…….”
함정을 걱정하는 핀, 그리고 건너야 할 길을 걱정하는 노인.
둘을 지켜보던 나는 그냥 노인을 건너게 해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노인이 건너야 계속 관찰하는 맛이 있을 것 같고, 핀도 좋아할 것 같으니까.
“흐음. 바람이 부는군. 어쩌면 될 지도 모르겠어.”
협곡이니 그 일대에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일. 노인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듯이 눈을 감고 멈췄다. 거센 바람에 노인의 가냘픈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잖아!
“우와…….”
“곰.”
「역시 고수다.」
바람결을 타고 그 위를 미끄러지듯이 노인의 신형이 공중에서 이동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지만 떨어질 위험은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일까.
그대로 앞을 보지 않고 바람에만 몸을 맡긴 채 날아오던 노인은 협곡 반대편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후우. 성공해서 다행이군. 처음 해보는 시도였거늘.”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핀과 곰이 생각나서 녀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멋지다…….”
아무래도, 노인의 모습에 반해 버린 듯하다.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다.
핀. 아까까지만 해도 죽인다느니 뭐라느니 하지 않았니?
감정의 변화가 심한 것 같다만. 겉모습에 현혹되어 버린 거니?
곰이 쓰는 태극권 비스 무리한 것을 핀도 배우고 싶어 하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노인에게 꽂힌 모양이다.
더불어 나도 꽂혀 버렸다. 방금 노인이 보여준 기행은 꼭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기술이 아니던가. 흥미가 안 갈래야 안 갈수가 없다.
노인이 다음엔 무엇을 보여줄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겠어.
* * *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겠지?”
『이젠 빠트리는 것엔 관심이 없구나.』
“곰.”
「고수는 이런 것쯤은 단숨에 부순다.」
흥분된 표정으로 바위벽을 보는 핀의 모습은 즐거워 보여서 좋긴 한데, 어째 가면 갈수록 당초 계획이랑 멀어지는 것 같다.
지난번의 실패 이후, 핀과 곰은 노인이 지나갈 길목 중에 함정을 설치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젠 빠트리는 것에 의의를 두지 않고 노인이 어떤 방식으로 함정을 해쳐 나갈지 기대하는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꼭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역경을 해쳐나가는 모습을 즐기는 독자의 모습이랄까.
“후후. 진짜 고수라면 이것도 부술 수 있겠지?”
이미 그 발언으로 네 함정의 의미가 퇴색돼 버렸구나. 함정은 방해하기 위한 것인데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변해 버렸다.
핀과 곰이 설치한 함정이란 이름의 시험은 또 다른 협곡에서 이루어졌다.
전의 협곡이 아래로 뚫린 구멍이라면, 이번 협곡은 위로 솟아난 형태로서 양옆이 산처럼 높고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거길 핀이 집채만 한 돌을 들고 와서 막아버렸다.
그 모습이 꼭 개미가 바위를 드는 것 같아서 위태로워 보였지만 성장한 이후로 더 힘이 강해진 핀이라 손쉽게 해내었다.
『근데 이거 전처럼 날아서 지나가면 그만 아니니?』
“그럴지도?”
즐기고 있군. 또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냐. 나도 보고 싶긴 하다.
하지만 아래로 뚫린 협곡과 위로 뚫린 협곡의 차이점은, 이곳은 바람이 심하게 불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인이 한 행동으로 봐선 바람을 타고 이동한 것 같으니 여기에서도 과연 그것이 될까?
“쿨럭. 길이 막혀 있군. 역시 천 년 전이랑은 다르구먼.”
기대하는 마음으로 노인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도저히 그냥 흘려 넘길 수 없는 말을 듣고 말았다.
천 년 전? 그럼 노인은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단 말인가? 대체 정체가 뭐지?
확실히 인간은 아니로군. 진짜로 드워프인가? 드워프도 그렇게 오래 살던가?
“바람도 약하군. 돌아가기엔 시간이 없으니.”
노인은 바위산이라 불릴 만큼 큰 돌덩어리에 손을 대고 또 전처럼 눈을 감았다.
노인의 몸속에서 꺼져가고 있는 마력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마력은, 보통의 생물이 숨 쉴 때 내뿜는 양만큼이나 작아 바위를 어찌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결…… 찾았다.”
마력이 바위에 흘러들어 갔다.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이동하듯 스며든 마력이 바위 전체로 퍼져나갔다. 퍼지면 퍼질수록 농도는 옅어져 나조차도 느끼지 못할 수준이 되었다.
“후우.”
노인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바위에서 손을 떼었다. 바위는 여전히 굳건하게 노인의 앞을 막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약하고 산뜻한 그런 바람이다. 산들바람이라고 해도 되는 그런 바람.
그 바람에 바위가 윗부분부터 실려 나갔다. 바람이 지우개처럼 바위를 지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반 정도 바람에 바위가 지워졌을 때, 먼지가 되어 바위는 주변으로 흩어져 버렸다.
뭐냐. 저거. 그 말로만 듣던 이중극점이냐.
바위가 먼지가 되다니.
“우와…….”
“곰!”
「역시나!」
“쿨럭!”
핀과 곰이 감탄하는 사이, 노인은 격렬한 기침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노인을 보며 어떻게 할 것인지 잠시 고민하였다.
노인을 관찰 대상으로 여기고 호기심 여리게 지켜볼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죽어가는 몸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힘이라면, 핀이 강하다고 해도 노인과 닿는 순간 먼지가 되는 모습이 내게 떠오른다.
곰이 제아무리 물 흐르듯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스치는 순간 바위와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위험하다. 호기심이란 내게 어떤 위험도 없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 나는 노인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쓰러진 노인이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본 순간, 나는 그 마음을 다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돌을 깎아 만든, 어느 여성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리고 노인의 말 한마디에 확신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위그드라실 님……. 아직 도착하지 못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