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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
『오오…….』
나는 지금 꽤나 흥미진진한 일을 맞이하여 굉장히 기분이 좋다. 이 숲에 인간으로 생각되는 한 노인이 들어온 것이다.
응? 왜 ‘인간으로 생각되는’이냐고? 그게 노인이 어째 인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숲으로 들어온 노인은, 산타클로스처럼 새하얗고 풍성한 수염을 가진, 작달막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키가 얼마나 작은지 예전의 핀보다 조금 큰 수준이었다. 마치 영화 속 ‘호빗’이 있다면 저 정도 키가 아닐까 싶은, 그런 작은 키였다.
아버지에게 받은 기억 중에 ‘호빗’이라는 종족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혹시 ‘드워프’일지도 모르겠다.
꽤나 마른 체구의 노인은 겉보기엔 상당히 허약해 보였지만, 신기하게도 험한 숲 속을 무리 없이 잘만 걸어 다녔다.
나무뿌리에 걸리는 일도 없고, 돌에 차이는 일도 없이 천천히, 느긋하게 숲 속을 산책하듯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가 아닐까?
원래 겉보기엔 허약해 보이는 노인들이 더 세잖아. 무협지에서 항상 단골로 나오는 멘트로 ‘어린아이와 노인은 조심해라’라는 말도 있고.
꼭 보면 그런 애들이 있다니까.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반로환동한 숨은 고수라거나,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마교의 고수 내지 은거한 기인이라거나.
설마 이 노인도 그런 고수이진 않겠지? 아니면 은거하러 숲에 들어온 건가?
……잠깐. 여긴 판타지 세계잖아. 무협지가 아니라고.
잠시 딴생각으로 빠졌지만, 나는 노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꽤나 고민하고 있다.
인류가 무엇인가. 다시 태어난 나의 부모님들을 죽인 원수가 아니던가. 그런 원수가 숲에 들어왔는데 내가 가만히 둘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 당장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는 게 복수를 위한 길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딱히 복수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무가 되니 마음까지 인간이 아니라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인류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모두를 증오하거나 최소한 아니꼬운 눈초리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나무라는 생명체는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계수라는 종만 특이한 것인지 상당히 유니크한 특성이 있다.
『일단 관찰해 볼까.』
바로 마음의 평정심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
아버지의 기억을 보고 처음엔 인류에 대해 분노했었다.
비록 세 명의 용사가 저지른 짓이라 해도, 그들은 ‘인류’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채 안되어 나의 분노는 식어버렸다.
과연 인류가 잘못했을까? 그 세 명의 용사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은 아니었을까? 인류의 대부분은 마왕의 광기에 숨죽이며 공포에 떨고 있었을 텐데?
범죄자가 인간이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들며 분노가 식어버렸다.
그 후론 화를 내고 싶어도 마음이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무거운 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 물에 천천히 깎여나가듯 나쁜 감정 역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것이 나무, 또는 세계수의 특성이라 결론지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굉장히 특이한 용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첫 만남부터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머니 역시 나처럼 부동심(不動心), 또는 심신을 단련하는 수도승들이 말하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잘못 말했다. 어머니가 나를 닮은 게 아니라 내가 어머니를 닮은 것이겠지.
어쨌든, 나는 지금 딱히 인류, 그러니까 그 인류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종족,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인간들에게 딱히 복수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복수해야 할 상대가 살아 있다면 모를까, 이미 다 백골이 되다 못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니까.
과연, 진정한 복수는 원수보다 오래 사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뭐, 그래도 아직 인류에 대한 꺼림칙한 기분은 남아 있는지라 노인에게 호기심이 간다고 해도 호감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호감이 갔다면 먼저 말을 걸어봤겠지만 관찰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쿨럭. 쿨럭.”
멀쩡하게 잘 움직이던 노인이 격한 기침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등에 매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무에 기대 휴식을 취했다.
과연. 저 보따리는 무엇일까.
어째 보따리에 자꾸 눈이 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따리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양옆으로 길쭉하게 삐져나온 하얀 천으로 감싼 물건이 궁금하다.
깨끗한 천으로 둘러싸져 있는 그 물건의 외형은 꼭 도끼 같아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판타지 세계의 무기라. 멋지지 않은가. 지구에서 그런 무기를 실물로 볼 기회는 아주 없었으니까.
“후우……. 죽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죽기 전이라. 확실히 노인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노인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노인의 몸속에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내가 그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마력은 곧 생명력이다. 그 안에 깃든 마력, 살아 있다면 누구든 가지고 있는 그 생명력은 거친 들판 위에 바람막이 하나 없이 놓인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노인이 죽기 전에 가려는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 숲에 특별한 장소라곤 없다.
아니지. 하나 있구나. 어머니가 계시던 그곳이.
혹시 인류에게 세계수는 널리 알려진 존재일까? 하긴, 마왕을 무찌르는데 세계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신성한 나무로 떠받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인류를 위해, 세계수는 사라져야 합니다.”
……아닐지도. 용사가 그렇게 단언했으니 그 반대로 나쁜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역사란 승자에 의해 쓰여 지는 거니까. 그곳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이 어떻게 세상에 알렸는지에 따라 달렸겠지.
꽤나 고민이 되는군. 노인의 목적은 둘째 치고, 인류는 세계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흠. 만나본 적이 없으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명쾌한 해결법을 알고 있다. 그냥 넘기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이 노인한테 물어봐도 되고, 또는 다른 인간들이 들어오면 물어보면 되지 뭐. 그래서 인류가 세계수와 적대적이라면 전부…….
나도 모르게 섬뜩한 생각을 해버렸군.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나저나 핀이랑 곰이 노인에 대해 몰라야 할 텐데. 특히, 곰은 몰라도 핀은 알면 안 된다.
핀은 나와 같이 아버지의 기억을 본 사이인 데다가, 나처럼 부동심이 없다. 사춘기 특유의 변화로 인해 급박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으니, 노인을 보면 바로 죽일지도 모른다.
“곰. 인간이야. 죽이자.”
“곰.”
『……핀, 곰.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거니?』
“숲을 탐험하는 중이었어요. 아빠. 인간이에요!”
『그래. 그건 아빠도 알지. 오늘 아침에 탐험하러 간다고 아빠한테 말했잖니. 근데 여긴……. 집에서 너무 먼 곳 아니니?』
내가 볼 수 있는 숲의 가장 끝부분인데. 게다가 오늘 아침에 나갔는데 이제 겨우 정오다. 반나절 만에 이 넓은 숲을 주파했단 말인가.
이상하진 않군. 둘 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강하니까. 모험이 아니라 달리기 시합이라도 한 것 같지만.
“내가 먼저 갈게. 곰.”
『잠깐! 핀, 설마 지금 저 사람을 공격하려는 거니?』
“당연하잖아요. 할아버지랑 할머니의 원수!”
핀의 눈동자와 피부색이 변하고 있다. 변신하려는 것인가! 감정의 조절을 못 하고 있다.
『핀, 핀. 자. 진정하고 아빠 말을 들으렴. 우리 핀 착하지?』
“으으……. 죽인다…….”
『자. 핀. 나쁜 말은 쓰면 안 되지. 착한 말 써야지.』
“으으……. 목을 따버린다……?”
『……조금만 더 착하게.』
“묻어버린다?”
『조금만 더.』
“쓰러트린다?”
『그래. 그 정도로 하자.』
휴우. 겨우 진정했군. 이제 말려보자.
『자. 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인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들은 이미 옛날에 죽었단다. 핀도 알지? 할아버지가 아주 오랫동안 갇혀 계셨다는 걸.』
“그래도 같은 인류잖아요. 복수해야죠!”
『아빠 말을 더 들어보렴. 그렇게 복수를 할 거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아빠가 알기론 인류엔 인간도 있고 마족도 있고 아인도 있단다. 심지어 핀이랑 같은 엘프도 있는데. 복수하려면 엘프도 죽, 아니 쓰러트려야 하는데?』
“괜찮아요. 핀은 할 수 있어요.”
『아니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거란다. 만약 곰이 아빠를 때렸다고 치자, 그래서 핀은 곰을 혼내주고 싶어 해. 그런데 곰이 보이지 않아. 그런데 다른 평범한 곰이 보이네? 그럼 핀은 그 평범한 곰을 혼내줄 거니?』
“으음……. 아니요. 잘못한 건 이 바보잖아요.”
“곰!”
『그렇지? 인류도 똑같단다. 그 때 핀도 봐서 알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건 용사들이랑 할아버지, 할머니뿐이었잖니? 용사들이 잘못을 저지른 거지 인류가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에요. 게다가 그때 살아 있던 사람들은 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돼서 다 고이 잠드셨단다. 핀이 지금 하려는 행동은 곰이 나쁜 행동을 했다고 다른 곰들한테 화풀이 하는 거랑 같은 거란다.』
“그래도…… 으으……. 알았어요…….”
겨우 납득해 줬군. 허술한 언변이었는데 다행이다.
그때 용사들이 저지른 것이 맞긴 하지만, 마물들을 막고 있던 다른 인류도 한통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까도 생각했지만 인류가 세계수를 적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사실 저 노인이 죽는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냥 흥미로운 관찰 대상에 불과하니까.
이 점은 인간성이 사라진 것 같아 조금 섭섭하다. 사람의 죽음을 그냥 책 읽듯이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다니.
그래도 나와 내 가족에게 피해가 오는 것은 싫다. 나는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든.
근데 지금 핀을 말리지 않으면 앞으로 숲에 누가 오는 족족 없애 버릴 것 같아서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응? 핀은 충분히 강한데 왜 말리냐고? 누가 찾아오면 또 쓰러트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연히 말려야지. 판타지의 법칙이 있잖아.
주인공이 강해진다. 적이 나타난다. 손쉽게 이긴다. 적과 알던 사이가 싸움을 걸어온다. 또 이긴다. 적과 알던 사이가 속해 있던 조직이 찾아온다. 이번에도 이긴다. 그 조직이 속해 있던 더 큰 조직이 나타난다. 또 이긴다. 악명이든 명성이든 뭔가 퍼진다. 전국 각지에서 싸움 좀 한다는 녀석들이 다 달려든다. 또 이긴다. 이제는 국가차원에서 덤벼든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평생 싸움만 하는 테크트리로 자진해서 들어가겠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아니라 핀을 위주로 노릴 텐데. 핀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진 않다고.
인생에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게 할까보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곰이 지긋이 노인을 보다가 말을 시작했다.
“곰. 곰.”
「대장 못 이긴다. 노인 강하다.」
“뭐? 너가 어떻게 알아.”
“곰……. 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저 노인은 고수다!」
“내가 너보다 세니까 내가 고수잖아. 내가 보기엔 약해 보이는데.”
“곰.”
「대장은 힘만 센 바보라 모른다.」
“이게!”
두 사람은 그냥 싸우도록 놔두자.
흠. 근데 고수라니. 확실히 신경 쓰이긴 하는데?
허약해 보이는 몸. 죽어가는 마력. 갑자기 나오는 격한 기침. 그런데도 이 험한 숲속을 산책하듯이 걷는다?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