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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뭐, 달려만 있으면 됐지
짐작한 바는 있었다. 솔직히, 각오도 하고 있었다. 원래 환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때때로, 인간이었을 시절 환생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삶이 불행하든 행복하든 환생에 대해 알게 된다면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보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스무 살 이후에 빈도가 증가했고 그로 인해 꽤나 환생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했었다.
환생을 한다면, 먼저 국가가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면적은 좁고 인구는 세계의 인구에 비하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다른 국가에서, 다른 인종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거기에 추가적인 변수로 성별이 달라질 수 있다. 전생에 남자였다고 꼭 남자로 태어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위의 문제들을 제쳐두고, 인간이 아닌 생물로 태어날 가능성도 있다. 지금의 나처럼 나무로 태어난다거나 달팽이, 애벌레, 곰, 여우, 등등…….
환생이란 그리 매력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뭐, 잡설은 이쯤하고 결국 나무로 태어나고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서 ‘정령화’라는 것으로 인간의 형태를 꺼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꽤나 고민을 많이 했다.
나무의 성별은 대부분 자웅동체이다. 은행나무와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면 암수 한 쌍이라는 소리다.
비록 아버지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여성형을 띠고 있었지만, 솔직히…… 옷 아래에 어떤 미지의 세계가 있을지 누가 아는가. 자웅동체라도 짝은 필요하니까.
이런. 어머니. 죄송합니다. 상상해버렸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와 핀에게 남겨준 옷을 보고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볼 때 나는 그냥 나무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혹시라도…… 암나무라거나, 자웅동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자웅동체인데 왜 여자 옷이냐고? 내가 자웅동체면 어머니도 자웅동첸데 어머니는 예쁘셨잖아. 그러니까 여자 옷을 남겨주신…….
아. 어머니. 진짜 죄송합니다.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그래서 내가 다행이라고 여긴 최우선 순위는 자웅동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여자가 낫지. 두 개(?) 다 있으면 이상하잖아.
“자웅동체가 아니라 다행이네.”
근데 꽤나 이상하다. 핀의 눈동자에 얼핏 비쳐보였던 나의 외형은, 그게 달려 있다는 것만 빼곤 완전히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솔직히, 아직 어린아이라 그런지 그것도 작아서 다리를 오므리고 있으면 여자아이라고 착각하지 않을까.
“아빠……. 아니, 엄마? 아니……. 엄빠?”
“엄빠라니……. 그냥 아빠라고 부르렴, 핀.”
“그렇지만 그게 없잖아요!”
“……있잖아?”
“털도 없고 근육도 없잖아요! 으앙!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어…….”
성교육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핀이 4차원이라서 그런 걸까.
핀에게 있어서 성별의 구분은 근육과 털로 이루어지나 보다. 근데 핀. 미안하지만 남자라도 이렇게 어리면 근육이고 털이고 딱히 없거든?
근데 털이라면 어디 털을 말하는 거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거기는 아니겠지?
잠깐. 달려 있는데 왜 굳이 털을?
“엄빠, 아니 아빠. 왜 그렇게 태연해요. 이건 비상사태라고요!”
핀에게 언제 어떻게 성교육을 실시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이러다가 미남만 보면 다 여자라고 하는 거 아니야?
“흐음. 핀.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알아서 생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렴.”
핀이 자꾸 나의 성별을 의심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무로 살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성이 둔해지는 것이다.
어째 날이 갈수록 인간처럼 생각하기보단 감정을 배제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이러한 반응은 어째 아버지가 넘겨주신 마력을 받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다.
확실히 인간이었을 때의 나였다면, 벌거벗고 핀 앞에 서 있는 이 순간에 열심히 그것을 가리기 위해 손으로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수치라던가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핀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한 차원 위의 수준에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그저 정령의 모습일 뿐. 나의 본체는 나무다.
어차피 내 본체는 옷도 안 입고 잘만 벌거벗고 있는데 정령의 모습이 벗고 있다고 해서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흐음. 그래도 벗고 있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내 안에 남은 인간성을 확인한 것 같아 조금 기쁘다. 여자아이 같은 남자애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숲 한가운데에 있다니. 내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모습으로 있다가 변태 같은 사람이 몰래 훔쳐보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물론 여긴 지구도 아니고 숲 한가운데니 볼 사람은 없겠지만.
“곰…….”
……한 명 있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곰 녀석이 눈을 지그시 뜨고 내 쪽을 보고 있다.
“야! 너 보지 마!”
“핀. 곰이잖아. 보여도 상관없단다.”
“안 돼요. 아빠는 내건데. 저런 곰 녀석이 보게 놔둘 수 없어요!”
말하면서 핀이 옷을 내민다. 저번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핀이 입고 있는 옷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옷이었다.
“아빠. 이거라도 입어주세요. 곰한테 알몸을 보이면 안 된다고요.”
“굳이 그걸 입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곰이잖니.”
그것도 그렇고 그 옷은 좀. 내 마지막 인간성이 여자 옷을 입는 것만큼은 거부하고 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딜 봐도 여자아이다. 달려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지.
어린아이들은 다 여자아이 같다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법. 목소리도, 외형도 완전 여자아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도 딱히 충격이 크진 않다. 왜, 전생에서도 그런 남자들이 꽤나 많이 있지 않았던가. 여자처럼 예쁜 남자들 말이다.
피아노를 치며 석류를 좋아한다는 광고까지 있었으니 말 다했지.
근데 아버지는 왜 여자아이 옷을 준비한 걸까. 설마 나 암나무인데 전생의 기억 때문에 내가 남자라서 생각해서 정령체가 남자인 걸까.
정신이 빠져나와서 만들어지는 것이 정령체니 남자라고 생각하는 내 정령체가 남자인 것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무로서 나의 성별이 여자라서 이런 어딜 보나 여자인 모습인 걸지도.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언젠간 성인으로 자라나면 알 수 있겠지.
근데 설마 커서도 여자 같은 모습인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곰! 곰! 곰.”
「나는 곰이다! 그리고 신사다! 신사는 여자의 알몸을 훔쳐보지 않는다.」
“너 당당하게 보고 있다만……. 그리고 누가 여자냐.”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아까부터 내 거기만 보고 있잖아. 게다가 눈매가 축 쳐져서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만. 뭔가 실망한 눈초리다.
“고옴. 곰. 곰.”
「주인님이 이런 꼬맹이라니. 게다가 남자. 실망했다.」
“뭘 기대한 거야, 너…….”
“곰곰.”
「나보다 머리 하나 작은 늘씬한 바디의 묘령의 여인을 원했다.」
“소개팅 나왔냐. 소개팅이었어도 첫 대면에 그런 눈빛을 한 남자는 아무도 안 좋아할 거다. 그리고 너 곰이잖아. 설마 인간이랑 사귈 셈은 아니겠지?”
곰이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얼굴은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알아선 안 될 진실을 알아챈 사람의 표정이었다. 곰의 얼굴로.
“곰……!”
「곰이었다……. 나!」
뭘 새삼스럽게 그러지. 그럼 곰인 줄 몰랐냐. 아까 그렇게 개그도 쳐놓고.
충격을 받은 곰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숲으로 향했다.
“어디 가.”
“곰곰…….”
「쑥이랑 마늘 찾으러 간다…….」
……그래. 열심히 찾아서 백일 동안 먹어보렴. 사람이 되나 안 되나. 나도 궁금하니까.
“앗! 아빠! 저도 잠깐 숲에 다녀올게요!”
곰을 따라 핀도 숲으로 사라졌다. 으음. 핀은 왜 가는 거지. 뭐 찾고 싶은 거라도 있나?
핀과 곰이 사라지자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나무로 느끼는 세상과 인간의 모습으로 느끼는 세상은 역시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뭔가 인간성이 좀 돌아온 느낌이야.”
나무로 지내면서도 세상을 볼 수는 있었지만 피부로 직접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간이었을 적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랄까.
꽤나 향수에 젖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인간이라는 느낌은 안 드네. 상관없으려나.”
이렇게 인간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인간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것이 환생이라는 걸까.
환생을 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인간처럼 살 수 있으리라 조금은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미 나무로 환생한 이상 나무일 뿐인 건가. 마치 인간이 동물의 형태로 변했고, 동물의 감각과 능력을 손에 넣었어도 자기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나의 경우는 그게 반대로 돼 있는 것이다.
“자주는 변하지 못하겠네. 숲을 살펴볼 수가 없으니.”
아쉽게도 이 모습으론 숲을 감시할 수 없다.
언제 누가 이 숲으로 올지 모르는데 마냥 팔자 좋게 이 모습으로 누워 있을 수는 없지.
“하지만 역시 나무보단 이 모습이 자기 편해.”
나무 상태론 언제나 만전의 컨디션이라 자도 별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근데 이 모습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살짝 피로감이 느껴진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니 잠이 솔솔 밀려온다. 이 잠들 듯 말 듯, 피곤함이 뻐끔뻐끔 고개를 쳐드는 기분이 좋다. 원래 잠이란 건 피곤할 때 자야 제 맛이거든.
“가끔 나와서 낮잠이나 자야겠네.”
눈을 감고 있으니 졸음이 밀려온다. 이 모습으로 잠을 잘 수 있을까. 궁금하니까 한 번 잠들어봐야지.
잠을 자려고 마음먹은 순간,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보건대 핀이다.
으음. 이제 막 자려고 했는데. 그냥 눈감고 가까이 오길 기다리자.
기다리기가 무섭게 핀이 옆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가랑이와 겨드랑이로 차가운 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졸음이 확 깨버렸다.
“핀…… 뭐하니…….”
“헤헤. 아빠는 식물이니까 이렇게 물을 주면 자랄지도 몰라요.”
“……미안하지만 그건 물을 준다고 자라나는 게 아니란다. 포기하면 편해.”
진짜로 남자의 기준이 그쪽 털이였냐…….
“안 돼요! 난 아빠랑 결혼할 거란 말이에요!”
핀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결혼이라. 마음이 흐뭇하다. 딸아이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이것이 아니던가. 대부분 크면서 없던 이야기가 돼 버리지만, 14살 외모를 가지고도 아직 이 말을 해주다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울먹거리는 핀을 안아주었다. 아. 정령화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방금 알아냈다. 핀을 안아줄 수가 있구나.
나무로는 마력으로 안아주는 것이 최선이었는데. 직접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눠줄 수가 있다.
“흐에엥. 아빠…….”
핀이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핀이 나를 꽉 끌어안는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껴안아주는 게 아니라 핀이 나를 안아주는 형태가 돼 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린 동생을 안아주는 언니로 보이겠는걸.
“핀. 아빠는 남자란다. 걱정하지 마렴.”
“훌쩍.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요.”
“핀?”
“더 많이 뿌리면 자라날지도 몰라요.”
“핀, 아무리 그래도 없는 게 자라나지는……. 흐억!”
핀이 나를 껴안고 숲으로 달려간다. 본체에서 멀어지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충격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아아. 본체에서 고작 10미터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정령의 모습으론 멀리 떨어질 수 없는 것인가.
“으아아아…….”
“아빠?”
“핀…… 다시 나무 쪽으로 돌아가…… 줄래……?”
점점 더 힘이 빠진다. 이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아빠?”
“지금……. 격렬하게 모든 게 귀찮구나……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제 포기다. 나무로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 그냥 이대로 땅이랑 하나가 됐으면.
“으음. 아빠가 이상해……. 하지만 지금이 기회닷!”
핀이 내게 옷을 입힌다. 저항하고 싶지만, 저항하기 귀찮다.
그래. 까짓것 내가 입는 것도 아니고 입혀지는 건데 상관없겠지. 여자 애 옷 따위 입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남잔데도 여자 옷을 입는 취향의 사람들도 있는데.
노곤한 내 몸에 여차저차해서 옷을 다 입힌 핀이 나를 껴안는다. 아. 뭔가 기분은 좋은데 귀찮다.
그냥 나를 땅에 내버려 둬. 나무가 아니라 돌로 태어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으으……. 아빠는 남자여야 하는데…… 흐윽…… 말도 안 돼…….”
“핀…… 남자라니까…….”
“이렇게 귀여운데 여자아이일 리가 없잖아요!”
“끄응……. 핀…….”
태클 걸 힘도 없다……. 조만간 성교육을 해줘야겠다…….
아아. 자고 싶다.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