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32화 (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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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5살이니까 이젠 자연스러운 것

충격적인 일을 맞닥뜨렸을 때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긍정적인 사고’가 있다.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컵에 담긴 반잔의 물을 보고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컵에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네’라고 말하지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하는 예가 있다.

나는 아버지의 알 수 없는 뭔가로 변화한 핀을 보며 긍정적인 사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피부가 한여름 바닷가에서 태운 것처럼 갈색이 되어버렸다. 피부 이곳저곳에 딱지처럼 붙어 있는 저건 설마 비늘인가……?

비늘은 둘째 치고 건강해 보여서 좋군. 긍정적 사고 완료.

두 번째. 호탕하게 웃고 있는 입 안으로 보이는 기다란 송곳니. 상당히 뾰족해서 물리면 아플 것 같다.

나뭇잎만 먹고 지내서 영양 상태가 걱정됐는데 이제 고기도 먹겠군. 긍정적 사고 완료.

세 번째. 검게 변한 머리카락과 그 안쪽으로 보이는 작은 뿔 하나.

머리야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여자애라면 염색 한 번 해보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뿔은…… 액세서리인 셈 치지 뭐. 긍정적 사고 완료.

네 번째. 눈동자. 파란색 눈동자는 사라지고 붉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심지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파충류처럼 길고 좁은 세로 동공이다. 광기가 엿보인다.

이것도 액세서리의 한 부류로 치자. 요즘 젊은 애들은 컬러렌즈가 유행이라던데. 저것도 컬러렌즈인 셈 치지 뭐. 긍정적 사고 완료.

마지막, 성격. 성격…….

원래부터 쾌활하고, 사랑스럽고, 에너지 넘치던 핀의 성격은 기묘한 포즈로 외치는 대사로 보건대…….

“할아버지의 마력은 세계 제이이이이일!!!”

안 돼! 이건 안 돼! 100%다! 중2병이야! 말려야 해!

핀의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으론 육체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5살 외모였던 시절의 순수했던 핀이 14살 외모가 되자 내게 반항했던 것을 보면 확실하다.

14살. 슬슬 사춘기가 오고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며,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아니던가.

이 시절은 까딱 잘못하다간 흑역사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시기라 특별히 더 주의해서 지내야 한다.

나로 예를 들자면,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된 이후로 나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데 주변에 사춘기가 와서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무시하는 애들을 보고 ‘후. 나는 사춘기 따위 오지 않았는데. 대체 사춘기가 왜 오는 거지? 이해가 안 되네’라며 그 친구들을 무시했다.

물론 사춘기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가 몰랐을 뿐. 지금 생각하면 낯 뜨거운 소리를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노래가 유행을 타면 ‘헉. 얼마 전까진 인기도 없고 나만 듣던 그런 노래였는데 왜 갑자기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지? 설마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나?’라거나…….

해외 어딘가의 전쟁뉴스를 보고 학교에 가서 ‘후. 죄다 철없이 뛰어 놀고 있고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지금 지구 반대편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라거나…….

으으. 생각했더니 또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

어쨌든 핀을 말려야 한다.

지금이야 자기가 최고고 자기가 하는 말이 모두 멋진 어록처럼 느껴지겠지만 중2병이 끝나면 그 후유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지금 말리지 않으면 이 시절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흑역사로 점철될 수 있다고.

『핀! 괜찮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겠어? 돌아올 수 있으면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렴.』

“괜찮아요. 아버지.”

아, 아버지? 안 돼. 이미 늦었다. 중2병이 발동해 버렸어.

『아버지라니. 핀, 아빠라고…….』

“아뇨.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순 없죠. 전 이제 어른이니까요.”

『피, 핀! 아빠는 상관없단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고 불러도 돼. 그리고 너 아직 어른 아니야.』

가능하면 어른이 돼서도 아빠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내 희망사항이지만……. 지금의 핀을 보니 무리일지도.

“전 이제 어른입니다. 아버지. 저를 언제까지 아이처럼 생각하시면 안 돼요!”

소리를 높여 내게 대들은 핀은 자신의 손을 들어 매서운 눈빛으로 보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주먹을 쥘 듯 말 듯 애매하게 힘을 주고 있었다.

“크윽. 오른손아, 진정해. 지금 저 곰 녀석을 해치울 거니까. 너무 날뛰지 말라고.”

『……핀. 자꾸 그러면 나중에 후회한다, 너?』

“아뇨. 제 인생에 후회 따윈 없습니다.”

오른손을 불끈 쥐고 핀이 하늘로 높이 쳐들었다.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한 자세이다.

“이 마력! 분명 할아버지의 마력이야! 그래! 할아버지는 죽었어! 더는 없어! 하지만, 내 등에, 이 가슴에, 하나가 되어 계속 살아가! 이제 할아버지의 힘을 가지고, 내가 아버지를 지키겠다! 할아버지처럼 후회하지 않겠어!”

『핀! 그만해! 더 이상했다간……. 후폭풍이 온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내 공격을 받아주겠다고 했나. 곰? 그럼 어디 받아봐라. 나와, 할아버지의 힘을!”

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핀의 주먹에 맺혔다.

모인 마력의 힘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 내가 가진 마력과 비슷할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꿰뚫는 힘!”

“고, 곰! 곰! 곰!”

「대, 대장! 내가 졌다! 그만해라!」

곰의 요청을 무시하고 핀이 곰의 몸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곰은 그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핀의 주먹에 빨려 들어가듯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먹에 맞아버렸다.

“고오오옴!!!”

곰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숲의 나무들을 뚫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시선을 돌려 살펴보니 엄청 멀리까지 날아가서 바위에 거꾸로 박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핀의 주먹에 맞은 배를 보니 털들이 소용돌이처럼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크큭. 이것이 바로 나선력인가…….”

『응. 아니야. 핀, 그냥 네 마력을 조금 회전시킨 거야. 나선력 아니야.』

뭐, 곰을 보아하니 죽은 것 같진 않고 괜찮겠지. 문제는 핀이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간 세계정복이라도 하겠다고 소리칠 것 같다.

“그럼 다음은 세계정복인가. 후후.”

……너 왜 이렇게 템포가 빠르니. 따라가기가 힘들잖아…….

『핀. 그만하고 이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순 없는 거니? 곰도 쓰러트렸잖니.』

“하지만 아버지! 이 세상은 썩은 것들 투성이라구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복수도 해야죠! 그 간악한 용사 놈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화가 안 풀린다고요!”

핀이 분노하며 말했다. 눈동자가 더 붉어지고, 주변에 마력이 몰아친다. 엄청나게 화가 난 게 확실히 느껴졌다.

『확실히 이 아빠도 화가 나긴 하지만, 그때 용사들은 벌써 죽었을걸?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잖니.』

기억 속에서 봤던, 마법진을 펼쳤던 세 명의 용사는 분명 인간이었으니까 지금쯤이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도 모르고 나의 형제들을 죽였을지 모르는 인간들이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무차별 학살을 막아야겠지. 지금 핀의 상태를 보건대 밖으로 나가면 눈에 띄는 족족 다 죽이고 다닐 것 같다.

얼굴도 모르는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내 딸이 살인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핀. 그래도 안 돼. 나중에, 좀 더 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꾸나.』

“으으……. 그렇지만…….”

『괜찮아. 그리고 지금 복수를 하러 떠난다면 이제 아빠랑 못 만나는데? 그래도 괜찮겠니?』

나는 나무니까 따라갈 수 없다. 정령화를 한다고 해도 기억 속의 어머니를 보건대 본체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듯하니…….

이 숲을 벗어날 수나 있으려나.

“괜찮아요. 제가 뽑아서 안고 갈게요.”

『……이 아빠를 말려 죽일 셈이냐.』

“히잉, 복수하고 싶은데…….”

다행이군. 아직 징징거리는 게 원래의 핀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보인다.

『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니? 아빠는 지금 모습도 좋지만 원래의 핀이 더 좋구나.』

“빛의 핀으로요?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빛의 핀……?』

“후후. 지금 저는 어둠의 핀이랍니다. 원래의 저는 빛의 핀이고요.”

그건 또 뭐냐. 천년퍼즐이라도 맞춘 거냐.

무섭구나. 중2병.

“그 대신에…….”

핀이 팔짱을 끼고 내게 말했다.

“아버지의 정령화된 모습을 보여주세요. 안 그러면 원래대로 안 돌아갈 거예요.”

크윽. 내가 했던 협박을 그대로 따라 하다니. 이래서 애들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언젠간 정령의 모습으로 변해볼 생각이었으니까.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 그래. 보여줄 테니까 빨리 원래대로 돌아오렴. 계속 보고 있자니 걱정이 되니까.』

“헤헤.”

핀의 주변에 있던 마력이 한순간에 증발하며 사라졌다.

왜곡된 주변 경치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머리카락에서 검은색이 빠져나가며 금발로 돌아왔고, 다음으론 피부가 점차 하얗게 변하면서 비늘도 사라지고 원래의 피부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송곳니와 눈 색도 정상으로 돌아오자, 핀이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자리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아아아……! 부끄러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괜찮아. 괜찮아. 원래 그땐 다 그런 거니까.』

역시 후폭풍이 있군. 하긴, 아무리 핀이 활기차고 엉뚱하다곤 해도 아까의 행동은 조금 지나친 감이 있긴 했지.

근데 원래 핀이랑 어둠의 핀이랑 내가 볼 땐 큰 차이는 못 느끼겠다만.

본인이 느끼기엔 다른가.

주저 않은 핀이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힐끔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 빨리 보여줘요.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래. 지금 보여줄게.』

꽤나 긴장된다. 얼마 전에야 겨우 힘을 다 흡수하고 지금 처음으로 선보이는 거니까.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분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불안하기도 하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내 내면에 의식을 모았다.

나의 정신이, 어린아이의 젖니가 흔들리며 빠지듯이 내면의 공간에서 흔들리다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광활한 숲을 내려다보던 시야가 한순간에 점멸되며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그리고 땅을 밟는 발바닥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인간의 형태를 가진, 나무의 형태가 아닌 예전 전생의 감각이 돌아온다.

역시 예상대로다. 어머니처럼 익숙했다면 나무로서의 나의 감각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 미숙하다보니 정령의 신체밖에 느낄 수 없다.

이러면 숲에 누가 들어오는지 감시할 수 없는데.

뭐,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능하니까. 되도록 나무로 지내야겠군.

“흐음……. 아아.”

오랜만에 입으로, 그리고 성대를 이용해서 목소리를 내보았다. 어린아이 특유의 맑고 높은 소리가 귀를 통해 들렸다.

“아…… 빠?”

익숙지 않은 목소리를 듣자니 내가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주저앉아 있던 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본다.

파란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춰 보였다.

어머니를 닮은 은발. 하지만 아버지의 마력이 섞인 탓인지 옅은 녹색 대신 옅은 검은색이 힐끗 엿보인다.

눈동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색과 같은 붉은색. 그리고 미숙한 탓인지, 아니면 내가 어려서 그런 건지 예전 핀과 같은 5살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그럼 어디…….”

나는 조심스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

외형은 상관없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있네.”

다행이다. 혹시나 했는데 달려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핀은 반대로 놀란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어!”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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