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31화 (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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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최강의 방패

곰과 핀이, 서부의 무법자처럼 지는 해를 받으며 서로를 노려본다. 주홍빛의 석양이 둘의 눈동자에 머물며 눈빛을 한층 더 불태웠다.

야생동물들은 대부분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은(인간을 포함하여) 그 무리를 이끌 리더가 필요하며 리더 외에도 서열을 매겨 명령을 내리는데 있어 하극상이 없게 한다.

“고옴……. 곰. 곰곰. 곰곰곰.”

「주인님을 보필하기엔……. 대장은 너무 촐싹거린다. 주체하지 못하고 숲으로 가서 놀기 바쁘다. 그래서야 주인님을 지킬 수 없다.」

“아니야. 아빠는 내가 지켜. 넌 나보다 약하잖아.”

“곰? 곰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대장은 이제 날 이길 수 없다.」

“곰곰. 곰곰곰.”

「나는 내 안의 힘이 커져갈 때 무엇이든지 이루어 줄 것 같은 기분에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은 이루어졌고 이제 대장은 날 이기지 못한다.」

으. 번역하는 것도 귀찮네. 소원으로 사람처럼 말하게 해달라고 빌지 그랬냐…….

“곰. 곰. 곰곰. 곰.”

「덤벼라. 대장. 대장은 여자니까 때리지 않고 이겨주겠다. 난 신사니까.」

곰이 양팔을 부채처럼 휘젓더니 자세를 낮추며 포즈를 잡았다. 마치 숙련된 무림고수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어느 일정한 흐름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곰. 곰.”

「고수는 하수에게 삼 초 양보하는 법. 먼저 와라.」

핀이 예전에 싸웠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갚아주는군. 이거 조금 흥미진진하다.

“흥. 곰곰 하고 우는 곰은 진짜 곰이 아니야!”

도발에 넘어간 핀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았다. 제비처럼 공중에서 멋지게 킥을 꽂는 핀이 함성처럼 크게 외쳤다.

“곰은 ‘쮸쀼쮸쀼’하고 운다고!”

응. 아니야 핀. 곰은 그렇게 안 울어. ‘곰’ 하고 우는 것도 아니지만.

곰이 우아하게 몸을 옆으로 틀어 핀의 발차기를 피했다. 목표를 잃은 발차기는 땅에 박혀 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주변으로 튀어 오르는 자잘한 바위조각과 흙더미들. 보통의 곰이라면 그 덩치 때문에 필연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빗나간 공격의 잔여물들을, 곰은 또다시 연어와 같은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거스르며 핀에게 다가갔다.

“곰. 곰.”

「1초 양보했다. 2초 남았다.」

“이익!”

구덩이에서 뛰어오른 핀이 곰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멀리서 하는 공격보다 확실하게 끝내기 위한 근접일까. 핀이 곰과 껴안듯이 가까워졌다.

핀의 다리가, 곰을 넘어트리기 위해 다리 사이로 들어가 뒤에서부터 걸어 넘겼다.

곰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는 듯싶더니 풍차처럼 회전하며 핀과 떨어진 곳에서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곰곰. 곰. 곰.”

「방금 건 공격으로 치지 않겠다. 어설픈 다리걸이라니. 제대로 해라. 대장.」

“요리조리 피하기나 하고. 이건 어떠냐!”

핀이 또다시 곰에게 파고들었다. 이번엔 다리걸기가 아니었다. 그대로 곰을 끌어안고 럭비공을 박듯이 바닥에 처박았다.

핀의 가공할 속도가 여기에 더해지니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이제 도망 못가겠지?”

핀이 곰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한쪽 팔이 당장에라도 곰의 얼굴을 묵사발로 내겠다는 듯이 꽉 쥐어져 있었다.

저걸 맞으면 아마 곰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게 성장하기 전의 핀의 힘조차 바위를 부수고 아버지의 날개를 뽑았는데, 성장한 지금이라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력이겠는가.

“곰.”

「무슨 소리.」

하지만 나의 걱정을 무시하듯 곰은 참기름을 바른 듯 미꾸라지처럼 또다시 핀에게서 빠져나왔다.

대체 저 덩치에 어떻게 저런 유연함과 민첩성이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곰. 곰. 곰곰. 곰.”

「1초 남았다. 대장은 역시 힘만 세지 별거 없다. 주인님은 내가 지킬 테니 대장은 숲에 가서 철부지처럼 놀아라. 그 편이 잘 어울린다.」

“까불지 맛!”

슬슬 인내심이 바닥난 줄 알았던 핀은, 작전을 세운 것인지 곰의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분신술처럼 핀의 잔상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고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굉음처럼 숲에 퍼졌다.

“곰.”

「얄팍한 계책이다.」

곰이 말을 하는 순간, 핀이 공격을 개시했다. 곰의 옆, 앞, 뒤, 위, 아래 전 방위에서 핀이 모습을 드러내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곰은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핀의 주먹이 닿을 듯 말 듯 곰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곰이 스치듯 회피했다는 편이 옳다. 마치 취권의 고수처럼 무방비한 모습으로 핀의 공격을 모두 피한 것이다.

“곰. 곰.”

「삼 초는 끝났다. 이제 그만 포기해라.」

“흥! 피하기만 할 줄 알지 한 번이라도 맞으면 넌 끝이야.”

“곰. 곰……. 곰.”

「어리석다. 포기를 모른다……. 그럼 어디 때려봐라.」

“그럼 어디!”

핀의 주먹에 마력이 맺힌다.

나와 같은 하얀, 세계수의 마력이다. 세계수의 마력은 공격력이 없지만, 핀은 그것을 자신의 신체를 강화하는데 쓰는 것 같다.

“아빠는 내 거야!”

아버지의 비늘을 꿰뚫은 주먹이니 저걸 맞으면 진짜 사망이다. 하지만 곰은 무덤덤하게 서서 핀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핀의 주먹이 곰의 배에 정통으로 꽂혔다.

하지만 땅이 울리는 진동도, 곰이 날아가는 폭풍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곰.”

핀의 의구심 섞인 목소리와 함께 곰의 등 뒤로 갑작스러운 폭풍이 몰아닥쳤다.

뒤쪽에 자라나 있던 나무들이 그 폭풍에 휘말려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콤콤콤콤콤콤콤!!!”

……해석할 필요도 없다. 그냥 웃는 거다.

곰은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핀의 공격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곰. 곰.”

「대장의 공격은 날 상처 입히지 못한다. 아니, 누구의 공격도 날 상처 입히지 못한다.」

폴짝 폴짝 나비처럼 움직이는 곰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곰. 곰곰. 곰. 곰곰.”

「이 힘. 주인님이 주신 이 힘이 커졌을 때 나는 소원을 빌었다. 대장에게 맞아도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몸은 작아졌지만 이렇게 강해졌다.」

……아프지 않은 거지 강한 게 아니잖아 그건. 아니, 그 전에 강하게 해달라는 소원은 빌 생각 없던 거냐.

“곰. 곰곰. 곰. 곰.”

「나는 깨달았다. 몸이 크다고 전부가 아니다. 힘이 강하다고 진짜 강한 게 아니다. 진짜 강함은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강한 거다.」

현란하게 몸을 움직이는데도 곰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곰곰. 곰. 곰곰. 곰.”

「몸은 작아졌지만 나는 어떤 공격도 흘려버릴 수 있다. 날 때리는 건 소용없다. 때려도 그 공격도 흘려보낼 수 있다. 그리고 체력도 여유롭다. 대장이 지칠 때까지 버틸 수 있다.」

“곰……. 곰. 곰!!!”

「대장은 그냥 강한 창이다. 하지만 나는 최강의 방패다. 방패가 이긴다!!!」

“시끄러워. 내가 이길 거야!”

“곰……. 곰. 곰. 곰곰.”

「안타깝다. 포기를 모른다. 대장 때문에 주인님이 지루해하신다. 주인님의 지루함을 달래야겠다.」

딱히 지루하진 않지만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궁금하긴 하다.

곰은 단순히 핀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내 쪽을 바라보며 이상한 개그를 하기 시작했다.

곰이 핀의 공격을 피하던 도중, 물구나무를 서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곰.”

「문.」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개그는 아니겠지?

이번엔 피하다 말고 의자에 앉은 자세로 멈췄다.

“곰곰……. 곰!”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곰이다!」

이번엔 또 분노한 표정으로 말한다.

“곰. 곰곰……. 곰?”

「대장의 밑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마음으로 버텼다. 쓸개를 핥는……. 웅담은 나한테 있다?」

대체 무슨 개그야, 이게.

둘의 싸움이 길어지니 점점 딴생각이 든다.

왜 내가 이름을 지어주는 애들은 다들 지구인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내가 지구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 내가 이름을 지어주어서 내 힘의 일부를 받아간 애들은 다 이렇게 지구인 같아지는 걸까.

진실이 뭐든 간에 앞으론 절대 남한테 이름을 지어주면 안 되겠다. 이 곰처럼 이상한 애들이 늘어나는 건 사양이다.

“곰. 곰. 곰. 곰.”

「지겹다. 대장. 마지막으로 한 대 때릴 기회를 주겠다. 포기해라.」

핀이 공격을 멈췄다. 고개를 푹 숙인 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난 것이다.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나를 지켜주겠다고 항상 말하는 핀은, 저런 이상한 곰조차 이기지 못하는 게 분한 것이다.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곰은 정말 대단했다.

솔직히 이제 핀을 이길 만한 상대는 없으리라 여겼다. 오랫동안 마왕과의 싸움으로 약해졌다곤 하지만 아버지까지 이긴 게 핀 아니던가. 게다가 성장까지 했으니 적수는 없으리라 여겼는데, 무적과 같은 회피술과 방어술로 핀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곰이 대단해 보였다.

『괜찮아. 핀. 이기지 못해도 상관없어.』

핀이 울먹거리듯이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우는 게 아니었다.

화가 난 듯이, 야차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핀?』

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요동친다.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머리카락이 일그러진 공간을 따라 위로 솟구쳐 핀의 얼굴이 보였다.

“후후후…….”

떠오른 머리카락이 점점 뿌리부터 검게 물들어갔다.

이윽고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든 핀의 머리카락은 예전의 황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피부 역시 조금씩 검어지더니 선탠이라도 한 것마냥 짙은 갈색으로 변해 버렸다.

『핀! 정신 차려!』

핀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다.

감겨 있던 핀의 눈동자가 떠졌다. 호수 같던 파란색의 눈동자는 사라지고, 보석 같은 붉은색의 눈동자가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눈동자는 마치 파충류처럼 동공이 세로로 갈라져 있어서, 붉은색이 거기에 더해져 곰을 죽이겠다는 살기마저 엿보였다.

“으하하하!!!”

광소를 터트린 핀의 입가에, 전에 볼 수 없었던 뾰족한 덧니가 생겨났다.

파충류 같은 눈빛, 날카로운 덧니,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원래 피부색과 검은색이 융합된 것 같은 갈색피부.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그리운 마력.

“감히 이 몸을 화나게 하다니!!!”

환영이 보인다.

핀의 말투가, 그리고 핀의 등 뒤에 퍼져 있던 아지랑이가 내게 평안 너머의 누군가를 보여주었다.

그분은 인간 형태의 모습으로 기묘하게도 꼭 스탠×처럼 서서 코를 쓱 닦으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 진짜 스×드는 아니시겠지?

아아! 내 귀여운 핀이……. 저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 어째 광기가 서린 게 핀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 대체 손녀딸한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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