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30화 (3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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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름은 함부로 지어주지 말자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로망은 무엇이 있을까.

멋진 대기업의 사장이 되어 안경에 정장을 입은 여비서가 로망일까.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입고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여인과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것이 로망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이자 첫사랑과 헤어져 성인이 된 후 인연처럼 만나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로망일까.

로망이 어떤 것이든 간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그 로망 역시 개성처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중에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이런 환상을 꿈꾸곤 한다.

예쁜 여자가 메이드 복을 입고 시중을 들어주는 상상을 말이다. 하루 일과에 지쳐 집에 들어오면, 청소도 밥도 전부 완벽하게 끝내놓은 상태로 미소 지으며 인사해 준다면, 그 날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이다.

근데 말이지…… 아무리 메이드 복이 좋다고 해도…….

『핀. 그거 당장 벗어.』

“싫어요. 할아버지가 준 거란 말이에요.”

내 딸이 입는 건 안 돼. 내로남불이라고, 내 딸이 그런 옷을 입는 건 싫단 말이야.

이 경우엔 반대인가? 내불남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낳은 마력을 물려받은 후로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이전의 크기가 가로수 길을 수놓은 은행나무 정도의 크기였다면, 지금은 시골 마을 어귀에서 가끔씩 찾아볼 수 있는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만큼이나 커져 있다.

게다가 전에는 핀에게 말을 걸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인지 말을 거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이제는 입으로 말하듯 자연스러워졌다.

말뿐만이 아니다. 내가 가진 마력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수가 성장하면서 각성하는 하얀 마력은, 보통의 평범한 마력과 다르게 전혀 공격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대신, 부정한 것을 없애고 남을 치유하거나 보호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기억 속의 어머니 역시 마력으로 물건을 이동시키거나 하지 못했는데, 나는 하얀 마력도 일반적인 마력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용인 아버지의 마력이 섞여 들어와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 특성이 진하지 않아서 이렇게 이동시키거나 기체인 바람을 만드는 정도밖에 못하지만.

『핀. 착하지. 아빠가 옷 새로 만들어줄게.』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잖아요. 전 이게 더 좋아요.”

『……할아버지가 준 거라서가 아니라?』

핀이 들켰다는 듯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혀를 빼꼼 내밀었다.

품에 끌어안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디자인의 옷을 핀이 손으로 쥐어 헝클어졌다.

크기는 작지만 똑같은 디자인의 옷. 으음. 여벌인가. 아니면…… 설마 내 건 아니겠지……?

내가 성장한 만큼 핀 또한 함께 자라났다.

기본적으로 판타지 세계에서 엘프란 장수종이기에 앞으로 핀이 성장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핀은 내가 성장하면 함께 성장하는 것 같다.

평범한 엘프가 아니라 하이엘프라서 그런가.

어쨌든 지금 핀은 5살 외모의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막 초등학생의 티를 벗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14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키도 전보다 두 배 가량 커졌고 2차 성징기의 여자아이의 모습이 살짝 드러나고 있었다.

『아빠 말 안 들을 거야? 그 옷은 나쁜 옷이야. 여자아이가 입으면 안 돼.』

“거짓말. 예쁜 옷이기만 한데요.”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자라서 슬프다.

예전 같았으면 ‘아빠 알았어요. 여기요’ 하고 냉큼 벗어서 줬을 텐데 이제는 반항까지 한다.

핀이 입고 있는 옷은 정확하게 말하면 메이드 복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취향인 검은 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 벌 옷일 뿐이었다.

하지만 프릴을 메이드 복처럼 달아놔서 메이드 복과 일반 드레스의 그 중간에 존재하는 옷으로 보였다. 특히 하얀색이 앞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더더욱.

『핀. 그 옷 벗으면 아빠가 옷 만들어 준다니까?』

“아빠가 만든 옷은 안 예쁜걸요.”

『……아빠 나뭇잎으로 만든 건데도?』

“그래도 안 예쁜 건 안 예쁜 거예요.”

『크헉!』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빙글빙글 돌며 좋아하던 핀의 얼굴이 멀어져간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인 양 소중하게 끌어안았던 그때 그 모습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환청이 들려온다.

‘헤헤.’

‘네! 아빠 몸으로 만든 거잖아요.’

‘배고플 때 이거 먹어도 돼요?’

……자라난 딸의 옛 모습을 떠올렸더니 갑자기 슬퍼진다.

“아빠?”

『응. 왜 그러니 핀.』

핀이 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핀이 자라난 만큼 나도 자라나서 양팔을 끝까지 뻗어도 나를 감싸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그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충분했다.

“그냥요. 슬퍼하시는 것 같아서요. 헤헤.”

『핀…….』

아직 옛날 모습이 남아 있었구나.

핀의 변화에 눈을 돌리고 옛날 모습이 더 좋았다고 그리워하는 것은 좋은 아빠가 아니겠지. 변화한 핀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그리고 여전히 핀이라는 사실을 ‘헤헤’라는 웃음이 증명해 주었다.

안아 주자. 성장한 후에 마력을 조종하는 힘도 더 늘어나 진짜 손발처럼 움직이고, 그 촉감 또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핀을 안아주었다. 으음. 프릴이 잡히는군. 그래. 이대로 위로 쭉 끌어올려서…….

“아빠. 벗기지 말아요.”

『미안.』

핀이 몸에 힘을 팍 주니 핀의 주변에서 움직이던 나의 마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핀, 너도 더 강해졌구나.

“아빠. 근데 이제 할머니처럼 정령이 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으음. 아마도? 이제 적응도 다 됐으니까.』

“저 보고 싶어요!”

『그럴까. 어디 보여줘 볼까나?』

잠깐, 그냥 순순히 보여주기에는 좋은 기회 같은데? 이걸 협상카드로 쓴다면?

『대신 그 옷 벗고 아빠가 만들어주는 옷 입는 거다?』

“아앗. 아빠!”

『안 그러면 안 보여줘.』

“치사해요!”

『후후. 이게 바로 어른의 세계라는 거란다. 핀.』

내 말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결국 포기했는지 핀이 옷을 벗기 위해 단추를 풀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드디어 내 딸에게서 저 파렴치한 옷을 벗길 수 있겠…….

“곰!”

“어? 곰? 살아 있었구나!”

옷을 벗으려던 핀이 손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다 성공했는데. 감히 이런 중요한 순간에 방해꾼이 나타날 줄이야.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한 마리의 평범한 사이즈의 갈색 곰이 우리를 보며 두 발로 서 있었다.

“아하하하. 곰이구나. 너 왜 작아졌니? 이리 와. 안아줄게.”

“곰.”

껴안으려는 핀을 곰이 한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핀이 달려가며 껴안으려는 그 모습 그대로 멈춰 버렸다.

“곰?”

“곰. 곰곰. 곰.”

“……?”

『핀. 남자는 함부로 여자한테 안기지 않는다고 자기를 껴안지 말래.』

아무래도 이 녀석. 전에 그 핀을 태우고 놀아(?)주던 그 녀석이 분명하군.

크기는 작지만 하는 짓이나 우리에게 찾아온 걸 보면 확실히 그 녀석이다.

그런데 전의 모습은 갈색털이랑 곰이라는 종족인 것 빼곤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다. 2층 개인주택만 하던 크기는 어디가고 이렇게 작아진 걸까?

“아빠. 곰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음. 그럼. 물론이지. 아빠잖니?』

거짓말이 아니다.

세계수의 힘을 깨닫고 난 후로 여러 가지로 이 몸에 완전히 적응되니 변화가 생겼다.

세계수란 언어가 아니라 ‘사념’을 통해 대화한다. 그 말은 즉, 단어와 소리가 아니라 생각을 전달하여 상대에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상대의 언어를 몰라도 그 속에 담긴 뜻이 전해져 온다.

지금 곰이 ‘곰’ 하고 말하는 것도 그 안에 담긴 뜻이 내게 전해져왔다.

비유하자면 별로 안 친한 친구랑 헤어질 때 ‘나중에 밥 한 번 먹자’라거나 여자친구가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데 라면 먹고 갈래?’라고 하는 말을, 누가 해석해 주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속뜻을 아는 것과 같았다.

“곰.”

곰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짧은 다리로 양반다리를 하려고 낑낑대다가 뒤로 굴러 넘어졌다. 그래도 양반다리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계속 시도하다가 결국엔 그냥 다리를 쭉 펴고 앉는 것으로 타협했다.

“곰. 꼭 사람 같아. 어떻게 된 거야.”

“곰. 곰곰.”

『으음. 그러니까 검은 기운에 삼켜져서 정신을 잃었는데 갑자기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서 몸속에 있던 이상한 기운이 커지더니 이렇게 됐다는구나.』

뭔가 짧게 말했는데 속뜻이 길다. 신기하군.

짐작 가는 바가 있다. 곰은 내가 예전에 ‘곰’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세계수는 다른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힘의 일부를 나눠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에게 힘을 받은 곰은 어째 하는 짓이 인간스럽다.

잠깐. 그렇다면 예전에 이름을 지어줬던 나무들도 설마 곰처럼 된 건 아니겠지?

나는 시선을 돌려 예전 그 나무들에게 갔다. 나무들은 조용히 바람을 맞으며 잎사귀를 흔들고 있었다.

『너희도 설마 말할 수 있니?』

대답을 기다렸지만 말이 없다. 뭔가 잎사귀가 잠깐 멈칫한 것 같은데 그것 외엔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지어줄 때 가진 성의의 차이인가. 하긴, 엄청 대충 짓긴 했지. 임팩트가 강한 토마스 외엔 다른 녀석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니까.

딱히 곰이라고 성의 있게 지은 건 아니다만. 아마 이게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동물과, 자아가 없는 식물의 차이인가.

다시 곰과 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럼 너 이제 필살기도 쓸 수 있는 거야?”

“곰.”

그런 만화 같은 일은 하지 못한다.

“우와. 대단해.”

“곰!”

내 말을 좀 들으라고!

역시 전혀 대화가 되고 있지 않다. 핀은 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자기 페이스 대로 끌고 가고 있다. 둘의 대화가 잘되도록 내가 해석해줘야지.

새로운 힘을 얻어놓고 하는 짓이 번역가라니. 흠. 싸움보단 낫군.

“곰. 곰곰.”

「내가 나선 이유는 주인님이 범죄자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인님이라지만 이런 소녀의 옷을 벗기는 건 위험한 짓이다. 신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너 그거 인형 옷이지. 안에 사람 들어 있지?

“곰곰.”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대장은 위험하다. 대장이 곁에 있으면 주인님이 언제 범죄자가 될지 모른다.」

대장이라면 핀을 말하는 거로군. 하긴. 한 번 진 적이 있었지.

“곰!”

「고로, 이 자리에서 대장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뜬금없이 이건 또 뭔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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