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29화 (2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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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버지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벨루스는, 그녀의 유산을 건네받은 세계수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살펴 줄 부모도 없이, 인간과 짐승들의 본능과 악의 속에서 이 어린 세계수가 이렇게 훌륭한 모습으로 자라주었다는 만족감에 흐뭇하게 웃었다.

어린 세계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유산이 아이에게 어떻게 적용될지 몰랐던 벨루스는, 갑작스러운 성장에 어린 세계수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어린 세계수가, 오랫동안 영혼 속에 담아두어 스며든 자신의 기억을 보고 있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훌륭하게 자랐구나.』

결계 안에서 마왕과의 싸움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보고 있는 세계수는 고작 20~30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루스는 이 세계수가 자아를 가지고, 하이엘프에게 말을 걸었음을 기억했다.

과거 위그드라실이 해주었던, 자아가 생겨나려면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멋지게 깨부수는, 자신과 같은 별종이었다.

“우리 아빠한테…… 손대지 마…….”

『흐음. 꽤나 힘들어 보이는구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영혼을 볼 수 있는 벨루스에겐 아직 어린 이 하이엘프와 세계수의 영혼이 두껍고 튼튼한 하나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끈은 그 무엇도 자를 수 없는, 마치 하나의 영혼이 둘로 분리된 것만 같은 유대감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아가야. 나는 이 아이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단다.』

“거…… 짓…… 말…….”

참을 수 없는 졸음을 억지로 이겨내듯이 하이엘프, 핀이 말했다.

핀은 세계수가 벨루스에게 힘을 받고 급격히 성장하는 순간부터 함께 잠들 것 같은 수마가 쏟아졌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용을 앞에 두고 아빠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아빠는…… 내가 지켜…….”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용에게 자신의 각오를 말하곤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잠들었나. 역시 너희들은 특별하구나. 과연 나와 그녀의 아이들답군.』

잠이 든 핀을 보며 벨루스는 이 아이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챘다.

핀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마력은 믿기지 않지만 그와 위그드라실의 마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그때의 그 마력이었기 때문이다.

『손녀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여러 가지로 듣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그가 말 한마디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그녀의 유산을 어린 세계수에게 건네준 것은 아직 마왕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핀의 공격이 강력한 타격을 주긴 했지만 그것으론 육체에 깃든 검은 기운을 없애고 마왕의 영혼은 잠시 주춤하게 만드는 정도일 뿐이었다.

벌써 마왕의 영혼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과거, 용사의 배은망덕한 발언을 들은 이후, 벨루스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노린 마왕의 공격에 승기를 잡은 입장이 뒤집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이대로 가다간 언젠간 마왕에게 완전히 몸을 빼앗기게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옷조차 입지 않은 것인가.』

의식이 없었기에 자신이 옷을 태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벨루스는 핀을 보며 과거의 추억에 잠겼다. 예전에 나도 이런 적이 있었지. 그때를 떠올리니 조금 부끄럽군.

『선물을 조금 해줘도 괜찮겠지.』

부서져 가는 비늘 중에 그나마 상태가 좋은 비늘을 뜯어내 마력으로 실처럼 가느다랗게 뽑아냈다. 그리고 마력으로 다른 색의 실들을 만들어낸 후 실들은 빠른 속도로 얽히고설키더니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두 벌의 여자아이용 드레스가 완성되었다.

벨루스는 마법으로 핀에게 그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그리곤 앞으로 성장할 아이를 위해 자동적으로 몸에 맞춰 크기가 조절되는 마법을 걸어주었다.

『아이야. 그 아이를 지키기엔 너는 너무 나약하구나.』

과거, 마왕과의 싸움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가버린 검은 용의 육체와, 그 영혼과의 사투로 이성조차 남지 않아 마력을 쓸 생각조차 없는 자신을 상대로 큰 위협을 느끼다니.

벨루스는 이 정도로는 언젠간 있을 위협에서 핀이 세계수를 지킬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네 마력을 빌려야 하니.』

마지막으로 그가 해야 할 일에는 핀의 마력이 필요했다. 순수한 세계수의 마력은 벨루스가 다룰 수 없었지만, 그의 마력이 섞여 있는 2세대의 세계수의 마력이라면 사용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제 막 힘을 넘겨받고 잠이 든 어린 세계수에게 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벨루스는 핀의 몸에서 마력을 뽑아냈다.

흰색의 마력 속에 자신의 마력이 섞여 들어간, 위그드라실과 함께 만들었던 그 마력이 확실했다.

『대신 남아 있는 나의 힘을 모두 주마.』

마력이란 이 세계에서 생명의 근원과도 같은 것.

쇠약해진 육체에 남아 있는 마력은 전성기의 1/10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남은 마력을 모두 짜내 핀에게 건네주니 벨루스의 육체는 모래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잊을 뻔했군. 너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지.』

영혼 속 깊숙한 곳에, 위그드라실의 유산과 함께 보관해 두었던 한 송이의 하얀 백합.

마왕의 영혼이 들러붙어 검게 물들어가고 있는 벨루스의 영혼에서 그 꽃이 빠져나와 바람을 타고 땅으로 내려앉았다.

핀에게서 뽑아낸 마력, 그 마력이 벨루스의 영혼에 스며들어갔다.

그녀의 유산을 살아남은 아이에게 무사히 건네주었다. 이제 걱정은 없다. 유일하게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는 지금 곧 끝낼 생각이다.

『인류는 마음에 안 들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마왕의 영혼이, 세계수의 마력이 스며든 벨루스의 영혼에게서 도망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마왕과 벨루스의 영혼은 반쯤 동화되었기에 마왕의 영혼은 도망칠 수 없었다.

완전히 마력을 흡수한 벨루스는, 예전에 본 위그드라실의 마지막 광경을 떠올렸다.

마왕의 힘과 세계수의 힘은 상극. 그 두 가지 힘이 한데 섞여 영혼조차 피해를 입히는 마력의 폭풍이 일어났던 그때를.

마왕의 영혼도, 벨루스의 영혼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지금이라면, 그 폭풍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영혼의 죽음은 곧 존재의 소멸.

벨루스는 그녀를 잃었을 때와 같이 신경을 곤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마왕의 영혼이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또다시 계속해서 싸워야 할 것이고 그 끝은 벨루스의 패배로 정해져 있었다.

마왕이 다시 재림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은 상관없지만, 마왕은 세계수를 먼저 파괴할 것이다.

그렇게 둘 수 없다. 벨루스의 영혼은 각오를 다졌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마왕이여.』

벨루스와 마왕의 영혼이 두둥실 떠올라 구름 위까지 부유했다.

『……■■■■……. ■■…….』

싸움이 계속 되고 나서부터 마왕의 영혼은 더 이상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괴이한 잡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대체 이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벨루스는 영혼이 반이나 동화된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체 「지구」가 뭐길래 그리 끊임없이 찾는 것이냐.』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 속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

마왕이 제정신이었다면 꼭 한 번 묻고 싶었지만 끝까지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벨루스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세계수의 마력을 완전히 흡수했다.

『크윽…….』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한다. 각오를 다졌건만 공포가 정신을 지배한다. 벨루스는 당장에라도 세계수의 마력을 방출하고 싶어졌다.

벨루스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이곳에서 마왕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이 몸은 위대한 용. 벨루스다!!!』

흑백의 마력의 폭풍이 구름 위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폭풍이 사라진 후, 그곳에 있던 두 개의 영혼은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

* * *

누군가의 기억, 아니 누군가가 아니다.

나의, 이 세계의 내 아버지의 기억이 끝났다. 아버지의 기억은 마지막엔 나와 핀을 보는 것으로 끝나 있었다.

검은 용,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의 마지막을 보건데 분명…….

울고 싶어졌다. 인간이었을 때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모든 것을 잊고 자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소녀를 방치할 수 없었다.

『핀.』

핀이 울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조금은 성장한,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외모로 변해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한 벌의 옷을 입고, 그와 똑같은 어린아이의 옷을 껴안고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것일까.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할아버지…… 제가 죽였어요……?”

『핀…….』

너도 본 거니? 그 기억들. 너도 봐버렸구나.

“제가…… 할아버지를 죽인 거예요.”

『아니야. 네가 그런 게 아니란다. 핀.』

당장에라도 기억 속의 어머니처럼 정령으로 변해 핀을 달래주고 싶다. 하지만 건네받은 마력은 내 몸에 모두 담아둘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아직도 천천히 흡수하는 중이었다.

나는 마력을 움직여 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푸른 눈동자에 고인 물기가, 핀이 느끼고 있는 마음처럼 슬프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마왕이랑 싸우고 계셨어. 오히려 네가 구해준 거란다.』

“그렇지만…….”

『핀이 아니었으면 할아버지는 마왕에게 먹혔을 거야. 그랬으면 할아버지는 많이 슬퍼하셨을걸?』

핀의 슬픔이 전해져 온다. 나 역시 슬프다. 전생에서 가족을 잃고 절망했는데, 이곳에서 알게 된 나의 부모님들마저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내게 핀이 남아 있었다. 핀은 지금 전생의 나처럼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전생의 나처럼 의지할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슬픔을 감춰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고, 핀의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 역시 슬프지만, 핀이 예전의 나처럼 절망에 빠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핀이 잠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말해주셨단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니까 핀. 슬퍼하지 마렴.』

내 말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내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같은 입장이었다면 분명 고마워했을 것이다.

“꽃…….”

핀이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웠다. 하얀 백합이 어제 막 꽃을 피운 듯 아름답게 봉우리를 활짝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꽃. 이 꽃의 꽃말이 무슨 의미인지 식물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분명 두 분에게 잘 어울렸을 것이라 믿는다.

『핀. 할아버지를 위해 무덤을 만들자.』

“무덤이요?”

『그래. 그리고 그 꽃을 심어주자. 분명 할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렴. 핀은 웃는 게 더 예쁘단다.』

“……네.”

핀이 울면서 억지로 웃어주었다. 입 꼬리가 떨리는 슬픈 웃음이었지만, 어떻게든 힘을 내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질 수 없다. 슬픔을 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자.

가족을 위해서.

* * *

엘퀴라즈 숲 중심에는, 성 하나가 들어갈 만큼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져 있다.

이곳을 마왕에 맞서 일곱 명의 용사와 한 그루의 세계수가 싸운 마지막 장소라 인류는 알고 있다.

숲의 중심까지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인류는, 어느 날 그 구덩이 앞에 생겨난 작은 무덤을 알지 못한다. 설사 발견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세계수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한 마리의 검은 용도 함께 기리기 위한 무덤이라는 사실은 인류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도, 묘비도 없는 이름 없는 무덤 그 앞엔 작고 하얀 백합 한 송이가 무덤을 지키듯이 피어 있다.

이름은 받지 못했지만, 과거에도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지금도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자라난 이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 무덤 앞에서 환하게 웃는 것처럼 꽃을 피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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