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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광룡(狂龍)(5)
나는 인간들을 하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육체가 나약하고, 그들의 지식이 빈약한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그들을 하등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반목한다.
서로 평화롭게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고 그것을 실현할 능력도 있지만 결코 실행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마족과 아인(牙人), 엘프, 드워프, 다른 모든 종족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하등하게 여긴다. 아니, 여겼다.
마왕(魔王)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왕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고, 세상 모든 분노를 응축한 화신(化身)인 양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리고 마왕이 나타남으로서, 하등하다 여겼던 그들은 인류(人類)라는 구호 아래 하나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조차도 그들을 구원할 방법을 생각조차 할 엄두가 안 나거늘, 마왕은 비록 그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들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
흥미로웠다.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하나로 뭉치면 그들은 예상치 못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 인류가 과연 마왕을 이길 수 있을지 나에겐 흥미로운 연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언젠가 혹시라도 인류가 패배한다면, 그리고 마왕이 나와 그녀에게 눈을 돌린다면 그때 가서 해결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무차별적으로만 보였던 마왕의 학살은, 정확히 나와 그녀가 있는 이곳으로 향하는 와중에 생긴 부산물일 뿐이었다.
마왕이 왜 이곳을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적이라면 싸워 이기면 될 뿐.
그렇게 생각한 내가, 마왕을 눈앞에 두고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마왕이 이끌고 온, 마물(魔物)이라는 존재들과 인류의 병사들이 싸우고, 나와 일곱의 용사들이 마왕과 격돌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왕의 검은 기운이 창끝이 되어 나의 몸을 꿰뚫고 바닥에 고정시켜 버렸다.
심장을 빗겨 꿰뚫려 즉사하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곧 죽을 것이다.
그녀를 지켜줄 수 없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군. 대체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마왕의 육체는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것이 아니었다. 마왕이 나를 웃도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왕이 나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의, 여의, 여의, 여의, 파괴, 인간, 아아아아!!!』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군.』
마왕은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만나기 전부터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생물의 우월성을 떠나 나의 육체와 마력은 궁극에 달했다고 자부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무엇도 꿰뚫을 수 있다 믿었던 나의 발톱은 그의 검은 기운에 붙잡혔고 무엇도 꿰뚫을 수 없다 믿었던 비늘은 지금 가슴을 꿰뚫은 검은 창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증명해 주었다.
세상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했던 나의 마력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용하는 나의 마법은 검은 기운 앞에 무효화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공격도, 방어도 할 수 없는 자에게 이길 방도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유일하게 마왕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은, 나의 그녀가 가진 하얀 마력뿐이었다.
혹시 그래서 마왕이 이곳을 향한 것일까.
아쉽게도 나는 그녀의 마력을 받아도 사용할 수 없었다. 나는 오로지 나의 마력과 육체만을 사용할 수 있다. 과거엔 그것이 하나의 궁극적인 생명체가 됐다고 증명하는 것이라 여겨 기뻤지만 지금은 후회할 뿐이다.
『……인간들이여,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나는 사용할 수 없지만, 다른 자들은 그녀의 마력을 받아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몸의 일부와 마력을 인류 중에 가장 강하다는 용사들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마왕을 상처 입힐 수 있다 해도, 그들이 인류의 정점에 선 무용(武勇)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나조차 이길 수 없는 마왕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 두어라! 당장 마법을 멈추란 말이다!』
아직 바닥에 몸을 뉘이지 않은 세 명의 용사가, 그녀에게 받은 무기와 마력을 이용해 마왕 아래로 마법진을 펼쳤다.
나는 그 마법진을 보고 그들을 멈추고 싶었지만 몸도 마력도 만신창이가 된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마왕을 이길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했고 그사이에 용사들은 마왕을 어디론가 전이시킬 마법진을 짜낸 것이다.
오로지 마왕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마력뿐. 그렇다면 그녀의 마력으로 공간이동 마법을 쓴다면 마왕을 이동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마법이 가리키고 있는 목적지는, 그녀의 본체인 세계수의 한가운데였다.
눈부신 광채가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왔다. 빛이 사라지고, 마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안 돼!!!』
그리고 세계수가 흰색의 마력과 검은 색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그 폭풍에 휘말려 모습을 감추었다.
두 개의 색이 서로 뱀처럼 똬리를 틀며 용오름이 되어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그리고 점점 검은색이 흰색을 집어삼키더니 굉음과 함께 폭발하였다.
흰색의, 그녀의 마력을 집어삼킨 마왕의 기운이 터지며 숲 너머까지, 하늘 끝까지 퍼져나갔다.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폭풍이 사라진 그곳에, 세계수는, 그녀는 없었다.
『위드!!!』
발악을 하며 몸부림쳤다. 가슴을 꿰뚫은 창이 점점 옅어지더니 연기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녀가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정상이 아닌 몸은, 그 시간을 한 없이 길게만 늘여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가 자라고 있던 그곳엔, 거대한 구덩이만이 그녀가 있었단 사실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곳으로 굴러 떨어지듯 내려갔다.
인간의 모습을, 정령의 모습을 한 그녀가 아직 그곳에 있었다.
『위드!!! 정신 차려라!!! 괜찮은 것이냐!!!』
하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그녀는 반투명했고,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내 눈 앞에서, 그녀였던 빛의 알갱이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죽이겠다! 모두 죽여 버리겠어! 인간도! 마왕도!』
증오한다. 그녀를 죽인 마왕을 증오한다. 그녀를 희생물로 삼은 인간을 증오한다.
증오심이 시야를 메운다. 세상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 붉은 세상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것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건……. 나중에 아이를 위해 쓸 거예요.”
그녀와 나의 마력을 합쳐서 만든, 우리의 마력.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그 마력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이것을 지켰던 것인가.
마력은 부모를 잃은 아이가 울 듯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끌어들였다. 죽어가고 있는 내 몸이, 마력에 반응해 그것을 빨아들이려 하고 있다.
순수한 그녀의 마력이 아닌, 나와 그녀의 마력이라 그런 것일까. 이것을 사용한다면 나의 몸은 확실히 진화에 가까울 정도로 강해질지도 모른다.
안 된다.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
나는 내 몸이 흡수하지 못하게 육체보다 더 깊은 곳. 오로지 나만이 탐구했고 나만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마력을 끌어들였다.
나의 영혼이 우리의 마력을 감싼다. 이제 내 영혼이 소멸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것을 건드릴 수 없다.
『……아직 가지고 있었나.』
우리의 마력이 있던 곳에, 그녀가 사라진 곳에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선물했던 그 때 그 꽃. 하얀색의 백합. 그녀는 나의 첫 선물을 항상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꽃 역시 내 영혼 속으로 집어넣었다. 꽃과 같은 생명체를 넣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꽃이라서 그녀의 마력이 베인 것일까. 거부감 없이 들어왔다.
『파괴…… 원래 세상으로…… 전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인가.』
그녀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마왕은 아직 남아 있었다.
육체는 사라졌지만, 마왕의 영혼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했던 마왕의 영혼은 점점 다시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놀랍다. 영혼이란 육체를 잃으면 사라지기 마련인데 마왕은 그 법칙마저 무시하고 회복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큰 고뇌에 빠졌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몸을 회복하고 인류에게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마왕의 영혼을 쓰러트려야 하는 것인가.
『그 기운은……. 역시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었나.』
마왕이 뿜어대던 검은 기운. 마력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힘. 그것이 지금 마왕의 영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랬군. 그래서 어떠한 마력도 통하지 않는 것이었어.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의 힘만?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동시에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복수를 한다면 몸을 회복해야 하기에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 인류의 용사가 아무리 강해도 회복된 나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친다면 마왕의 영혼은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 헤맨 것처럼 나와 그녀의 아이들을 찾아가겠지.
“귀엽지 않아요? 후후. 저는 귀여운데.”
무엇을 택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나는 구덩이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남은 마력을 짜내어 결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마왕의 영혼을 삼키고 그 영혼이 회복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싸우기로 결심했다.
영혼과 영혼의 결투. 그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모두 먹혀 버리는 것이다.
마왕의 영혼이 내게 들러붙는다.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나의 몸을 물들인다.
죽어가는 나의 몸이 검은 기운에 침식당한다. 하지만 몸의 제어권이 넘어가기엔 나의 영혼은 아직 멀쩡하다.
걱정은 없다. 영혼의 힘은 의지의 힘.
내 영혼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아이가 될 마력이 마왕에게 모래처럼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가슴에 남는 건, 나의 마력이 공급되지 않아 위험에 노출될 아이들의 안전뿐.
부디 언젠가 마왕을 이기고 여기서 나갈 그날까지 무사하기를.
* * *
마왕의 영혼은 끊임없이 내게 붙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그것을 나는 버티고 또 버티며 역으로 내가 삼켜 버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의식만이 남은 세계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과 바깥의 시간은 전혀 다르기에.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왕의 영혼은 미쳐 있었기에, 언젠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결계를 뚫고 들려온 희미한 소리가 나의 의지를 좀 먹었다.
“인류를 위해, 세계수는 사라져야 합니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어떻게 내가 그 목소리를 잊겠는가.
그녀를 죽인 용사의 목소리가 아니던가.
분노가 정신을 앗아간다. 가증스러운 자의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수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그들은 나와 그녀의 아이들까지 노리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미쳐 버릴 만큼 밖으로 나가고 싶다.
이성을 바르게 하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그 틈을 마왕의 영혼이 파고들었다.
서로의 영혼이 얽히고 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섞이지 않도록 내게 한 줄기 버팀목이 되는 건, 영혼 깊숙한 곳에 넣어둔 그녀의 유산이다.
하지만 분노를 멈출 수 없다.
언젠가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인류는 나의 분노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이긴 마왕이든, 아니면 마왕을 이긴 내가 되었든.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