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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광룡(狂龍)(4)
얼마 전, 그녀를 만나러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마법이 아니라 용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 그녀에게 가고 있는 중이었다.
구름 아래에서 바람을 맞으면 그녀를 만날 흥분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서 그녀의 본래 모습, 세계수가 보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가지에, 녹색의 과실이 맺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거의 모든 가지에 수천 개나 되는 열매가 맺혀 있던 것이다.
충격적인 광경에 생각이 하얗게 물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미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생명이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선 반드시 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로서 설사 한 몸에 두 개의 성(性)을 가진 자웅동체라 할지라도 씨앗을 제공할 교제 상대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녀에게 남편이 있었던가. 생각해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이 고민을 해결할 방법은 간단하다.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면 해결될 일이다.
“그녀에게 남편이 있다. 그녀에게 남편이 없다.”
대신에 나는 인간들이 말하는 ‘꽃점’이라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 번 일로 인간들은 하등하지만 의외로 여자에 관한 것이라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지만 이 꽃점이라는 것도 어쩌면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이번에도 없는 것으로 나왔군.”
이 꽃점이라는 것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꽃잎의 개수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개수가 홀수냐 짝수냐를 파악하고 처음 시작을 긍정적인 것으로 할 것인지 부정적인 것으로 할 것인지 정하면, 마지막에 나오는 결과를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다.
참으로 허접하군.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를 만날 용기를 내는 데는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녀가 사는 숲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여전히 그녀의 가지에는 열매가 맺혀 있는 상태였다.
초록의 싱그러운 열매를 보자 또다시 미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지만 꽃점의 결과가 좋았기에 나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그녀에게 찾아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뭔가요?”
물어봐도 될까? 아니, 물어볼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물어보지? 내가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낼 적합한 대답이 뭐가 있을까.
그래. 그게 좋겠군.
“날씨가 좋군.”
“그러게요. 참 좋은 날씨죠?”
이게 아니지 않는가! 제발 위대한 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라!
“위드. 네가 열매를 맺은 걸 봤다. 오늘이 아니라 한참 전에.”
“어머. 어떤가요. 싱그럽지 않나요? 조금 부끄럽네요.”
“남편이 있나?”
“아뇨. 없어요. 벨 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내 질문에 그녀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웃으며 말한다. 잘 안다니. 나는 분명 남편의 유무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앞뒤가 안 맞는 대답에 나의 마음이 안심된다. 여기서 나는 내 마음에 의아함을 느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 내가 안심한단 말인가? 나에게 그녀는 그저 연구 대상일 뿐인데.
하지만 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 자신도 놀랐다.
“그거 참 다행이군.”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아. 남편이 없으면 계속 그녀를 곁에서 연구를 할 수 있겠군.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군.
“한 번 보실래요? 제 방에서요.”
“열매 말인가. 좋군. 꽤나 흥미로운 열매다.”
그녀가 내 손을 잡는다. 손과 손이 맞닿은 부분이 간지럽다.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안내해 준 의자에 앉았다.
의자 또한 문처럼 그녀의 몸의 일부였기에,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때요? 이렇게 많이 열릴 줄 몰랐어요.”
그녀가 자신의 열매를 내게 준다. 평범한 사과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것이라 생각하니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궁금한 게 있다. 어떻게 열매를 맺었지? 내가 알기론…… 생물이 자손을 만들려면 누군가 짝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남편도 없는 네가 어떻게 열매를 만든 거지?”
“으음……. 글쎄요. 그냥 언제부턴가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심어도 세계수가 자라진 않지만요.”
“자라지 않는다?”
“예전부터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씨앗에 생명이 없어서 자라지 않아요.”
“그렇군. 그럼 이 열매는 정확하게 말하면 네 자손이 아닌 건가. 아쉽군. 그런데 생명이 없다니. 그럼 넌 자손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인가?”
“아뇨.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어요. 도와줄 사람을 못 찾았을 뿐이에요.”
“그런가…….”
마음이 후련하다. 하지만 아직 뭔가 팍 틀어 막힌 듯 찝찝한 기분이 남아 있다.
“알았다. 그럼 난 이만 가도록하지.”
“벌써…… 가시나요?”
이 상태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나를 배웅해 준다며 뒤따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위에 숨어 엘프들이 나를 보며 눈빛을 불태우고 있다. 저 녀석들은 대체 언제 바뀔 건지 궁금하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
“……네. 꼭 다음에 봬요.”
그녀가 망설인다. 나 역시 망설였다.
지금 떠나면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을 것 같다. 무슨 기회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는데 지금 말하지 못하면 이제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위드.”
“네?”
뒤로 돌아 그녀를 본다.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내가 이제부터 할 말에 대해, 인간이 만든 그 책에 있던 중요한 요점과 다른 점이 있는지 확인한다.
-우선 상대의 눈을 보고 말하는 것이 중요해요.
보고 있다. 그녀의 붉은색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가 교차하고 있다.
-떨지 말고 당당하게! 기 죽은 목소리로 말하면 안돼요.
나는 언제나 당당하게 말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백을 할 땐 명확하게.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좋아요.
확실하게 말할 것이다. 이 말이 불러올 궁극적인 목표를 담아서 말해주지.
“나의 아이를 낳아라!”
“이 멍청한 용 자식아아아!!!”
나무 위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엘프 하나가 뛰쳐나와 내게 소리 지른다.
지난번에 나에게 인간의 책을 읽으라고 했던 그 엘프였다.
흠. 저 녀석의 반응을 보내 뭔가 잘못된 것인가?
“좋아요. 자. 제 방으로 가요.”
“위, 위그드라실 님?”
아니군. 역시 내가 옳았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면서, 엘프들을 돌아보며 한 번 웃어주었다.
통쾌하군. 으하하하!
* * *
“위드. 아이란 이렇게 만드는 건가?”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간다. 나는 살면서 마력이 부족해 피로해져 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탈진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경험하고 있다.
그녀의 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녀의 부탁으로 내가 가진 마력을 전부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그녀가 말하길, 씨앗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자신과 비슷한 양의 마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유일하게 그녀가 알고 있는 자 중에 나만이 그 조건을 만족했다고 한다.
“제가 알기론 그래요. 아. 봐요. 완성됐어요.”
“흐음. 벌써?”
그녀의 손 위에 하얀색의 순수한 마력이 떠 있었다.
처음엔 그녀의 마력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마력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둡다.
보통의 하등한 생명체들이 본다면 구별하지 못할 만큼 미세한 음영이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 나뿐이라고 자부한다.
“나의 마력이 섞여서 그런지 살짝 어둡군.”
신기하다. 처음 내가 그녀에게 이름을 받았을 때, 그녀의 마력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나의 몸은 외부의 다른 마력으로부터 공격당하지 않는 대신 오로지 나만의 마력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보란 듯이 나의 마력을 받아들이고는,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마냥 하나로 합쳐버렸다.
“귀엽지 않아요? 후후. 저는 귀여운데.”
귀엽다라. 이 마력의 어디에서 귀여움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벨 님처럼 귀여워요.”
“뭐, 뭣!?”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녀에게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벨 님을 처음 봤을 때 작은 식물 같았거든요. 예쁘고 튼튼하게 클 수 있는데, 아직 자라지 못한 식물이요.”
“식물?”
“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바뀌는 모습을 보니까, 꼭 제가 키우는 것 같아서 엄마가 된 기분이었네요. 지금은 아니지만.”
“엄마라니. 그럼 지금은 어떻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비밀이에요’라고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마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해 주지 않는 건가.”
“이제 조금씩 떼어서 옮기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마력을 손가락으로 떼어 씨앗에 가져다 댔다.
씨앗은 물을 흡수하듯이 마력을 흡수하였다. 이것으로 저 씨앗은 이제 세계수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번식이란 참으로 편리하군.
“이제 다른 숲에 심으면 자라날 거예요.”
“아직 남은 마력이 많다만?”
“이건…… 나중에 아이를 위해 쓸 거예요.”
“아이?”
“네. 이 아이들이 자라난다고 해도 저처럼 정령이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서 자아가 생겨났을 때 남은 이 힘을 보태주면 어린 모습이긴 하지만 정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흠. 아이라.”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녀를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처음 만났을 때, 단순한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이제는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때 느꼈던 호기심이라는 감정은 사실 다른 감정이었던 것 같다.
나를 등지고 씨앗에 관심을 쏟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었더니 뒤에서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들어서 억제하기 힘들다.
어제까지의 나라면 평소대로 조용히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미 그녀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했으므로, 행동으로 옮길 용기까지 생겨났다.
“벨 님?”
“사랑한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다.”
“뭔가요?”
“인간들은 아기를 어떻게 만들지? 지식으론 알지만 그림이 없어서 이해가 되지 않더군.”
그녀가 고개를 돌려 웃어주었다.
* * *
그날부터 나는 미궁에서 나와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날들은 즐거워 진즉에 함께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조금 후회가 되지만, 못다 한 시간의 공백을 메울 만큼 충분히 함께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그녀가 생명을 불어넣은 씨앗은 내가 대륙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심어주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마법을 씨앗이 심긴 장소에 걸어두었다. 언젠간, 이 중에 제대로 자라나 자아를 가진 나무가 생긴다면 나와 그녀의 첫 아이가 될 것이다.
그날이 기대된다.
* * *
이것은 기억에 없는, 그날의 하나의 사건.
어느 숲 속, 벨루스가 막 씨앗을 심고 사라진 그 땅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인물은 안경을 쓰고 백색의 가운을 입은, 전형적인 과학자 스타일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흥미롭군. 세계수를 오랫동안 관찰했는데 이런 식으로 번식을 할 줄이야.”
그가 손을 뻗어 씨앗이 심긴 땅을 조심스레 파냈다. 벨루스의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그의 몸은 영혼이 구체화 된 영체로 되어 있었기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종족과의 이종교배라니. 다음 세대의 세계수가 어떤 식으로 자라날지 기대가 돼. 이런 귀중한 자료는 하나 샘플로 가져가는 게 좋겠어.”
씨앗을 꺼낸 인물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그녀와의 삶은 꽤나 충실하고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처음에 나를 적대하던 엘프들도, 내게 살갑게 구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적의는 드러내지 않는다.
삶은 충실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져만 갔다. 조금만 더 지나면, 예전에 심은 아이들에게 자아가 생겨나리라는 기대감도 부풀어 오른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심은 것에 비해 하나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사라진 씨앗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대신 다른 아이들에게 전보다 더 강력한 마법을 걸어두었다.
나의 마력이 공급되는 한, 이 아이들에게 손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가 나타나도 내가 그녀와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져 버렸다.
홀연이 이 세상에, 마왕(魔王)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