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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광룡(狂龍)(3)
“상쾌하군. 눈높이를 낮춘다는 게 이런 것인가.”
굉장한 해방감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숲을 걷는 일은 이토록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유의 열기가 나의 몸을 붕 뜨게 만든다.
“놀라자빠지는 모습이 눈에 훤하군. 크하하하!”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세계수의 밑동에 있는 구멍을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집으로 쓰다니. 역시 그녀는 나처럼 위대한 존재이다.
“멈춰라! 이 변태용!”
한시바삐 그녀에게 이 육체를 보여주고 싶거늘, 하이엘프들이 나의 길을 막는다.
녀석들의 시선엔 질투의 감정이 흠뻑 젖어 있어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비켜라.”
관대한 나라도 이런 시선을 받고 있노라면 좋은 말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귀찮은 녀석들. 정신적으로 좀 성장하란 말이다.
“위그드라실 님껜 갈 수 없다. 넌 네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지 못한 것이냐.”
“잘못이라. 평생 처음 듣는 헛소리로군. 내가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는가. 괜한 트집 잡지 말고 어서 비켜라. 나의 인내심이 바다와 같다 해도 지금 상당히 말라가고 있으니까.”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군.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걸어 나갔다.
“기다려라! 위그드라실 님의 전언이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녀석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녀의 전언이 있었다면 진즉에 말할 것이지.
“뭐지?”
“크윽. 불결하게 가까이 붙지 마라.”
“어서 말해라.”
“위그드라실 님께선 이미 네 녀석이 온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께선 옷을 입기 전까지 만나주실 생각이 없다고 하셨다.”
흠. 그렇군. 그녀는 먼 곳까지 볼 수 있다고 했으니 내가 숲에 들어온 순간 다 본 것인가.
깜짝 놀라게 하는 건 실패했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서 내 육체에 대한 감상을 듣고 싶군.
그런데 지금 들은 말은 만나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어째서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옷을 입어야 만나주겠다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린가. 옷을 입으면 이 완벽한 육체가 가려지지 않는가.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직접 만나서 묻겠다.”
“네 녀석!”
하이엘프들이 나를 붙잡으려 하지만 거기에 붙잡힐 내가 아니다.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는 그녀가 사는 나무 구멍으로 향했다.
나무 아래 공터를 지나며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평소라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서 나를 피하는 것이지?
그녀가 살고 있는 나무 구멍에 도착했다.
양쪽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 달린 나뭇잎이 안쪽을 볼 수 없게 입구에 쳐져 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자고로 주거지란 격에 맞는 곳이어야 하거늘, 침입자에 대한 방어도, 문의 역할로서 소음의 흡수도 되지 않는 이런 곳을 거주지로 삼은 그녀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강림했다. 어째서 나오지 않는 것이냐.”
“……옷을 입고 오시면 만나드린다고 했을 텐데요.”
나뭇잎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다. 강제로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것을 뜯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 문도 결국 그녀의 일부. 그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사고가 복잡하다. 하고 싶은 행동과 하기 싫은 행동이 서로 모순된다.
“어째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냐. 옷을 입으면 이 육체가 가려지지 않느냐.”
“눈높이를 낮춰 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의 모습일 땐 옷을 입는 것이 그 시작이에요.”
“이 몸이 굳이 거기까지 낮아져야 한단 말이냐!”
몸이 뜨겁다. 그녀를 처음 봤던 날 그 열기가 아니다. 그녀와 이야기 나눌 때 올라오는 그 따스함이 아니다.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는, 분노의 열기다.
그녀를 보고 싶다. 그녀를 위해 이런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아한다.
이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한 나는 대체 누구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더 이상 이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다.
마법을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논리를 파헤쳐본다.
『그러는 너도 옷을 안 입고 있지 않느냐.』
“네? 그게 무슨…….”
『네 본체는 이 나무가 아니더냐. 내가 보기엔 딱히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이게 벗고 있는 게 아니면 뭐라는 것이냐.』
완벽한 논리군. 나의 논리에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숲 속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이명(耳鳴)처럼 울리는 백색소음뿐.
잠시 후, 나뭇잎이 걷어지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나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의 분노가 얼어붙은 심장에 꿰뚫려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그라졌다.
그녀는, 내가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똑같이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벨 님 말씀이 맞네요. 지금 나갈게요.”
『기, 기다려라! 나오지 않아도 된다!』
“왜 그러시죠? 지금 나갈게요. 항상 이야기 나누던 곳에서 오늘도…….”
『됐다! 오늘은 이만 간다! 다음에 다시 오마!』
나 스스로를 쫓아내듯 하늘로 날아 도망쳐 버렸다. 그녀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내가 왜 그녀의 슬픈 얼굴을 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지 나조차 알 수가 없다.
* * *
미궁에 도착하고 나는 한동안 방 안에서 지냈다.
그녀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계속 나를 유혹했지만, 또다시 그녀가 슬픈 얼굴로 나를 본다면 또다시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찾아가지 못하고 그 주변 숲만 맴돌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연구 대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슬픈 일일 줄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숲을 맴돌던 어느 날, 하이엘프 한 명이 내게 말을 건네 왔다. 꽤나 분한 표정으로 ‘그분께선 어째서 이런 놈을……’이라고 중얼거리더니 어떤 책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지금 그 책을 눈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다.
-연애 초보를 위한 연애 조언.
“흠. 나는 이미 사랑을 마스터한 지 오래건만. 역시 하이엘프라고 해서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아니군.”
연애(戀愛)란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지내는 것. 나는 나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천 년 동안 나를 사랑했는데 고작 백 년을 사는 인간들이 쓴 연애 조언담 따위를 봐야 하는가?
하지만 그녀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눈높이를 맞춰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그 책을 읽어보았다. 역시나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나에겐 이해 불가능한 단어가 쭉 나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을 만들다니. 인간들은 역시 하등하군.
“하지만 한 번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겠군. 또 다른 실험이다.”
딱 한 가지 도움이 되기는 했다. 내게 옷을 입고 오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애인 앞에 나타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몸이 아무리 좋아도 옷이 어울리지 않으면 안돼요. 옷은 날개! 멋쟁이인 당신이 멋진 옷을 입으면 그 위력은 배가 된답니다.
“굳이 옷 따위 입지 않아도 내 육체는 멋지거늘. 더 멋진 모습을 보고 싶던 거였나.”
나는 책에 삽화로 그려진 옷을 직접 만들었다.
정장의 일종이라는 ‘신사복’인데 하얀색과 검은색의 조합이 썩 마음에 들었다.
“평범한 신사복은 내게 어울리지 않지.”
거기에 방어마법과 착용자의 신체에 자동 조절되는 마법, 온도 조절 마법, 자연 치유마법 등 여러 마법을 새겨 넣었다.
전부 내겐 의미 없는 일이지만 특별한 내가 입는 옷인 만큼 옷도 특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괜찮군. 확실히 옷이란 입고 있는 편이 좋은 거였어.”
이전과 같은 해방감은 없지만 거울 속에 비친 인간 형태의 내 모습은 신선해서 좋았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애인의 마음이 떠나기 전에 만나는 것이 좋아요. 만나러 갈 때 애인이 좋아하는 물건을 선물로 가지고 간다면 효과만점.
“꽃이 좋겠군.”
인간의 모습으로 옷을 입고 도시에 들어갔다. 인간들은 이전처럼 나를 보고 놀라거나 환희에 몸을 떨지 않는다. 눈높이를 너무 낮췄군. 조금 아쉽다.
“저 사람 좀 봐. 귀족일까?”
“아냐. 부자상인일지도?”
“결혼은 했을까? 잘생겼다…….”
인간들은 내게 눈도 못 마주치는 주제에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이 점은 전과 다를 바 없군.
인간들이 꽃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숲에 자라고 있는 꽃을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숲에 있는 꽃들은 이미 그녀가 자신의 숲에서 기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직 그녀가 본 적 없는 꽃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녀는 식물을 좋아하니까, 처음 보는 꽃이라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헤헤. 귀족이신가요?”
“귀족?”
“아이코. 죄송합니다. 나리. 제 입이 방정이지…….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고개 숙인 꽃가게 주인이 내게 찾는 물건을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꽃을 둘러보았다.
숲에서 본 적 없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지만 꽃에 큰 관심이 없는 내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꽃은 뭐지?”
“아. 그건 백합입니다. 검은색은 꽤나 희귀하지요.”
백합이라. 마음에 든다. 그것도 검은색이다. 나와 같은 색이지 않는가. 멋지군. 이걸 그녀가 좋아해 준다면 좋을 텐데.
“좋군. 그럼 이걸로 하지.”
“예. 몇 송이나 드릴까요?”
“한 송이면 충분하다.”
“예? 겨우?”
“뭐 문제라도 있는가?”
“아, 아뇨……. 선물용이신가요? 혹시 여자분에게?”
“그렇다. 여자…… 에게 줄 선물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꽃을 잡기 편하게 색종이로 감은 꽃가게주인에게 나는 금덩어리 하나를 던져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주인의 표정이 방금 전과 동일인물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다.
“헤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나리. 참 특이하시군요. 검은 백합을 선물로 주시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요.”
꽃을 받고 그녀에게 갈 마음에, 기분이 아직 날지도 않았는데 날고 있는 것 같다. 나와 똑같은 이 검은 백합을 받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눈높이를 맞춰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녀의 숲으로 가려는 찰나, 그녀가 한 말이 다시 떠오른다.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지 나의 사고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뭔가 가슴 한구석이 찝찝하다.
“그렇군. 알겠군. 이게 눈높이라는 것인가.”
가슴에 박힌 찜찜한 가시가 뽑혔다.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색의 꽃을 사가고 있다.
책에는 분명 ‘애인이 좋아하는 물건’이라 쓰여 있다. 검은색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 그녀도 좋아하리란 보장이 없다.
게다가 이 검은색은 나의 위대한 몸이 띠고 있는 검은색보다 색이 옅다.
그녀가 나의 위대함을 알고 있겠지만 나의 색보다 옅은 이런 조잡한 검은색 따윌 좋아할 리 없다.
그럼 그녀는 무슨 색을 좋아할까?
그대로 거리에 서서 고민한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끝마쳤다. 내일 다시 와서 그 꽃을 사가자.
* * *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게다가……. 오늘은 옷도 입고 계시고.”
간만에 만난 그녀는 지난 번 일은 이미 잊은 것인지 여전히 밝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의 새로운 표정을 보는 것. 놀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뿌듯해진다.
“벨 님? 이 꽃은 혹시…….”
“선물이다. 백합이라고 하는 꽃이지. 여기 숲에선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가져왔다.”
“정말 고마워요.”
꽃을 받아 든 그녀는, 세상에서 둘도 없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물론 나 다음이지만.
……아니. 나보다 그녀가 더 아름답다.
“예쁜 하얀색이네요.”
“그렇다. 나와 같은 위대한 검은색으로 가져오려 했지만…….”
“했지만?”
하얀색이 너와 더 어울리고, 네가 기뻐할 것 같아서 샀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이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니다. 어떠냐. 위그드라실이여. 이 몸의 선물이. 감격하거라.”
“위드.”
그녀가 꽃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싼다. 마치 인간들이 하는 기도처럼 보였다.
“위그드라실이 아니라 위드라고 불러주세요. 저만 벨루스 님을 벨이라고 부르면 이상하잖아요.”
“흠. 알았다. 앞으론 위드라고 부르지.”
“그럼 다시 한 번 불러주시겠어요?”
“위드.”
“한 번 더요.”
“위드.”
“한 번만 더요.”
“……위드. 언제까지 시킬 셈이냐.”
그녀가 웃는다.
나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