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24화 (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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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광룡(狂龍)(1)

이 몸은 고귀하다.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한 모든 생물들은 자신을 자각(自覺)하고도 아무 의미 없는 시간으로 한정된 자원을 소모한다.

그 시간 동안 그것들은 ‘부모’라 불리는 조금 더 자랐지만 여전히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세상을 제 것인 양 살아간다.

무지(無知)란 동정해야 할 것이지 비난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에게 상스러운 욕을 할 생각은 없다.

이 몸의 고귀한 입만 더러워지는 행위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을 지적 능력이 있는 대다수의 생물들은 ‘유아기’라고 부른다. 세상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몸의 유아기를 듣는다면, 이 몸을 제외한 하등한 지적생명체들은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바야흐로 말하자면 이 몸은 자아가 생겨난 지 1분 20초 만에 이 몸의 위대함을 깨달았고 3일이 지나선 거주하는 숲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한 달이 지나서 용(龍)으로서 쓸 수 있는 모든 마법을 마스터하였다.

1년 만에 다른 용들을 이기고 그 정점에 섰으며 100년이 지나야 성체가 되는 용족의 상식을 깨고 10년 만에 육체적으로도 완벽한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그것뿐이랴. 1000년이 지난 지금은 자연계에서 지적 탐구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의 존재를 깨달았으며, 생명체가 가지는 본능에서 벗어나 이 몸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완벽한 나를 완벽한 내가 지배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 몸은 상처를 입어도 마력이 있는 한 언제든지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으며 죽음의 경지 또한 이 몸 앞에선 겁먹은 생쥐처럼 떨어야 할 것이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나보다 덜떨어진 동족들은 이 몸을 ‘돌연변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같은 종임에도 열등한 그들에게 반박하기엔 내 아량은 바다 같이 넓어 무관심으로 응대해 주었다.

이 몸은 비난보다 무관심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몸은 이 몸의 거처 역시 이 몸에 걸맞은 완벽한 곳으로 만들었다.

동족들은 우리가 위대한 생명체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추레한 동굴을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참으로 한숨이 나올 만큼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 몸의 거주지는 이 몸만큼이나 완벽하다.

지하로 뻗어진 10계층의 미궁은 어떠한 침입자도 용서치 않는다.

본디 오는 손님을 거부할 만큼 이 몸의 인성은 쪼잔하지 않지만, 하등한 생명체들은 이 몸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기에 부득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미궁의 최하층까지 내려올 수 있는 녀석이라면 이 몸과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추론했기에 이 미궁을 뚫고 오는 녀석에게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과거, 이 몸께선 이 몸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하등하기 짝이 없는 생명체들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책’이라는 물건을 만들었다.

이 몸이 살아오면서 겪은 경이롭고 지적인 경험담이 너무 많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스토리를 골라내느라 귀중한 하루를 소모했지만 세계의 지적 수준이 높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인간’이라는 종족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곳으로 향했다.

인간들의 도시에 도착하자, 위대하신 이 몸의 강림에 놀란 인간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다녔다.

그중에는 비명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 몸을 본 것이 그리도 기쁜 것인가?

조금 더 일찍 인간들과 만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 몸의 위대함을 한눈에 깨닫다니. 꽤나 지적 수준이 높은 종족이로군.

인간들 중에 무기라는 것을 장비한 ‘병사’란 존재들이 몰려온다.

이 몸의 지식으로는 그들은 인간이 사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항상 외곽에서 머문다고 알고 있는데, 이 몸이 보고 싶어서 임무를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인가. 책임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몸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이렇게라도 보고 싶은 거겠지.

병사들은 그 조잡스럽기 짝이 없는 무기로 나를 공격했다. 아쉽게도 그들의 공격은 단조롭고 약해빠져 나의 비늘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이 몸이 떠나고 나면 더는 볼 수 없으니 비늘이라도 한 조각 얻고 싶은 것일까.

어쩔 수 없군. 서비스다. 한 조각 떨어트려 주지.

이 몸은 비늘을 한 조각 떼어 바닥에 떨어트려 주고 당초의 목적지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 몸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은 꽤나 지적인 생명체임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그 지식에 걸맞게 많은 책들을 만들었을 테니 이곳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 저 멀리 보이는 성이 도서관일 것이다.

천천히 인간들이 이 몸을 볼 수 있게 도서관까지 걸어갔다.

인간의 거주지는 참으로 비좁구나. 주변의 건물들이 이 몸에게 부딪혀 바스러졌다. 인간들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망가진 물건을 전시해 둔다고 들었다.

이 몸이 지나간 이 거리도 업적이 되겠군.

도서관에 도착하자 이 몸을 환영하는 불꽃의 세례식이 펼쳐졌다.

여기서 또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하늘로 마법을 쏘아 이 몸의 위대한 강림을 기념해야 하거늘, 인간들의 마법 실력은 허접스럽기 그지없어서 이 몸을 향해 쏘아대었다.

맞아도 이 몸이 다칠 위인도 아니거니와 이 몸을 축하해 주려고 없는 실력으로 노력하고 있었기에 관대하게 용서해 주었다.

역시나 도서관에 있는 인간들도 나를 보며 환희에 몸을 떨었다.

이 몸은 그중에서 가장 마력이 뛰어난 인간을 찾았다. 지식을 보관하는 곳이니, 이 몸처럼 마력이 뛰어난 녀석이 이곳을 총괄하는 녀석일 것이다.

이 몸이 하루나 걸려 쓴 이 몸의 위대한 책을 인간에게 주었다.

『이 몸의 일대기를 적은 책이다. 널리 알려 세상에 이 몸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어라. 이 몸이 살아온 삶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희들의 삶, 지적 능력, 자아까지 모두 향상될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고 이 몸은 날개를 펼쳤다. 이 몸을 아직 보지 못한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창공을 비행했다.

인간들이 고개를 들고 이 몸을 본다. 좋군. 도시를 세 바퀴만 선회하고 돌아가자.

* * *

뿌듯해진 마음으로 돌아갔지만 그 후에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아쉽게도 인간들은 이 몸의 위대함을 완전히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이 없었다.

인간들에게 전해준 이 몸의 책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너무나도 높은 수준의 지식은 이해불가능의 영역이기에 인간들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 같다.

그들은 나의 책을 ‘금서’라 부르며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했다고 한다. 읽은 자는 두 눈에 피를 흘리며 미친다니.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은가.

분명 이 몸이 쓴 책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탐욕스러운 개체의 소행이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들은 나를 광룡(狂龍)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몸이라도 조금 부끄럽다.

이 몸을 보면 미칠 정도로 좋다곤 하지만 그런 직설적인 이름을 붙이다니.

어쨌거나 능력은 떨어지지만 이 몸의 위대함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는지 인간들은 이 몸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었지만 전부 이 몸이 거주하는 곳에 사는 몬스터들에게 죽어버렸다. 참으로 아쉽다.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지금, 이 몸이 사는 최하층까지 도달한 인간이 나타났다.

아홉 번째 층계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응시했다.

이 몸이 드나들 정도로 넓고 웅장한 계단은 청소를 통해 손님을 맞을 준비를 끝내두었다. 인간을 환영할 준비는 완벽했다.

인간이란 금이라는 광석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이 몸은 마법으로 그것을 산더미처럼 캐내어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 손님에게 줄 선물로 적당하다고 이 몸은 자부한다.

어서 내려 오거라. 인간이여. 내려와서, 이 몸을 찬양해라!

……걸음이 느리군. 언제 도착하는 것이냐.

미궁의 주인으로서 버선발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법. 이 몸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손님은 오지 않는다.

혹시 이 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가?

『인간이여! 어서 내려 오거라!』

기척이 없다. 계단으로 향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인간이 쓰러져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꽤나 지친 모양이군.

나는 회복마법을 걸어주었다. 상처는 물론 찢어진 의복까지 원상 복구시켜 주었다.

일어나지 않는다.

심장이 멈춰 있다. 이 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영혼마법으로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육체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영혼이 이미 빠져나간 것이다.

『이번에도 이 몸을 찬양할 손님은 없는 거냐!』

* * *

간발의 차이로 이 몸을 알현하지 못한 인간을 산에 묻어주었다.

간만에 미궁에서 나오니 꽤나 해방감이 느껴진다. 손님이 언제 올지 몰라 근 10년을 미궁에서만 지냈더니 오랜만에 하늘을 날고 싶어졌다.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세상에 이 몸을 찬양해 줄 생명체는 없는가.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줄 지적인 존재는 없는 것인가.

이 세상은 이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몸을 찬양해 줄 지적인 존재도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가 누구인지는 가히 이 몸조차 알 수 없다.

무(無)에서 생겨난 것인지, 이 몸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혼돈에서 태어난 것인지, 추론 자체가 무의미하기에 깊이 고민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어째서 이 몸과 같은 보석이 세상에 있는데 그걸 감정할 존재가 하나도 없단 말이더냐.

태초의 탄생에 대해 심도 있는 추론을 진행하는 사이, 이 몸은 이 몸의 거주지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버렸다.

이 몸은 언제나 손님을 대비하여 거주지에서 멀리 벗어난 적이 없기에 처음 보는 곳의 신비함에 탐구심이 일었다.

이 몸이 도착한 곳은 초록의 대지(大地)였다.

가히 장관이라 일컬어도, 어쩌면 이 몸의 아름다움에 조금은 비견해도 될 정도로 넓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이 몸은 태어나고 육체가 완성된 순간부터 모든 생명체가 이 몸보다 하등하다고 결론 내렸기에 거주지에서 먼 곳까지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으로 인해 결론을 수정한다.

세상엔 이 몸을 경탄시킬 무언가가 있다.

나를 경탄시킨 이 숲을 즐겁게 비행한다.

초록, 초록, 초록.

온통 나무들과 짐승들로 가득하다. 스쳐 지나가는 대지의 초록빛 사이로 인영(人影)들이 움직이고 있다. 이 몸의 지식은 그것들을 ‘엘프’로 판단 내렸다.

이 숲에는 엘프들이 살고 있는가? 그러고 보니 엘프들과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군.

어쩌면 엘프 중에는 내가 찾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숲으로 내려가자.

하지만 방향을 틀어 하강하려는 순간,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나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 몸의 계산에 따르면 지평선에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를 감안했을 때, 나무의 크기는 대략 이 몸이 거주하고 있는 미궁이 자리 잡은 산과 동일했다.

산과 같은 크기의 나무라니. 누군가가 만든 마법생명체?

흥미롭다. 어쩌면 저 나무를 만든 존재는 이 몸과 비견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적지를 바꿔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나무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도착했다. 산처럼 거대한 나무에.

나무 주변에서 모여 살고 있는 엘프들이 내게 활과 마법을 겨눈다. 인간들처럼 기뻐하는 기색은 없다. 무언가 결의를 한 듯 표정이 딱딱하다.

엘프들은 인간들보다 못하군. 기뻐하는 녀석이 없다니.

날개를 접고 땅으로 내려왔다. 엘프들이 내게 덤벼든다. 상당수의 기색에서, 나는 살의(殺意)라는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

그렇군. 엘프들은 미형(美形)의 존재들. 이 몸의 아름다움을 질투하는 것인가!

참으로 추하구나. 이 몸처럼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녀야 하거늘. 이런 자들이라면 상대할 필요도 없다. 어서 이 나무를 만들어낸 주인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보자.

“멈추세요.”

이 몸은, 은방울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방울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고 지금도 방울소리를 좋아한다.

지금 들린 목소리는 방울처럼 불순물이 부딪히는 소리는 아니지만, 처음 들었던 방울소리처럼 내게 와 닿았다.

“세계수님! 위험합니다. 안으로 어서 피하십시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악의가 없으신 분이에요.”

세계수? 이 몸의 지식으로도 처음 듣는다.

나무의 일종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지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 세계수라 칭하다니. 나의 광룡(狂龍)과 같은 별칭인가?

엘프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온다. 걸음걸이에 기품이 있다. 매 걸음마다 차분하고 조용해서 걷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그 걸음은 이 몸 앞에서 끝난다. 잠시 아쉬움이 맴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이 몸에게 말을 건다. 이 몸은 몸을 숙였다.

풍압이 어깨 아래로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든다.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은빛 속에 연한 녹색의 빛이 살짝 감도는 그녀의 머리카락이다.

이 몸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 몸에게 먼저 말을 건 존재는 동족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없었다. 그녀에게 흥미가 생겼다.

이 몸과 같은 붉은색 눈동자라 그 흥미가 증폭된다.

게다가 아름답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답다고 해도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이 몸이다.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몸은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1.5배 이상 빠르다. 빨라진 혈액 순환이 얼굴에 집중된다. 비늘이 없는 인간이라면 분명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불가능하다. 이 몸은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리현상을 조절할 수 있다.

그렇군. 마법이군. 마력의 흐름조차 감지하지 못했는데. 대체 언제?

그녀에게 마법의 사용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입 주변에 경련이 난 것처럼 굳어버렸다.

대체 이 마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몸은 위대한 용중에서도 위대한 자. 마력조차 감지되지 않는 마법에 저항하여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이제 나의 심장은 보통 때보다 2배로 빨라졌다. 굉장한 마법이다. 이번에도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못 느꼈거늘.

이 몸과 같은 붉은 눈동자가, 눈웃음에 반이나 가려졌다. 하지만 그런 작은 틈새로 보는 눈동자도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한다.

“위그드라실.”

심장 박동이 2.5배 빨라졌다. 몸이 뜨겁다.

“이곳을 지키는 세계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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