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22화 (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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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검은 용(2)

붉은 눈동자와 함께 검은색의 날개가 펼쳐진다. 독수리의 비행을 보는 것처럼 크고 장엄한 광경에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검은색의 광택은 탁하고 더러워 보였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똑같았다.

‘용!’

검은색의 용이 날아올라 예의 불길한 구멍을 넘어 하늘로 치솟았다. 어두운 하늘 위에 떠 있는 검은 용을 누군가 봤다면, 필시 붉은 눈만이 보였을 것이다.

나는 용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을 것 같다. 하늘로 날아오른 용의 뒤로 비행기구름처럼 검은 기운이 수놓아져 있었다.

무엇보다 용 자체가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차서 초반의 멋진 모습을 보는 와중에도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을 수가 없다. 하늘로 올라간 후로 계속 마력으로 붙잡으려 하지만 어린아이의 손길을 뿌리치듯 아무 방해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과연 용이라는 건가.

차선책이 필요하다.

용이란 무엇인가. 판타지 세계의 최강자. 신의 대리인. 마법의 지배자. 그리고 지적인 생명체의 정점이 아니던가.

뭐, 내가 살던 세계에서나 통하는 통념이라 이쪽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동자에 서린 기색으로 봐선 이지가 없는,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냥 짐승의 한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차선책인 대화를 시도해 본다. 뭐라고 말을 걸어볼까. 그래, 평범하게 다가가 보자. 지적인 생명체라면 분명 받아줄 것이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밤중에 이렇게 날아다니시면 이웃에 폐가 되니까…….’

『캬아아아아!!!』

용의 포효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용을 지켜보던 내 시야가 강제로 점멸하더니 본체인 나무로 돌아왔다.

용을 중심으로 마력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크게 떨려왔다. 마력으로 세상을 느끼는 내겐 세상이 뒤틀리고 뒤집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빠?”

간신히 시야가 회복됐지만 아직 먼 곳을 볼 수 없어 용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용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핀이 잠에서 깨어나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위험하다. 처음의 위엄은 거짓인 양 저 용은 자아가 있지도, 지적이지도 않다. 그냥 짐승에 불과하다. 그것이 검은 기운 때문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지금은 상관없다.

숲에 사는 동물들은 위험에 대해 민감하다. 이미 첫 울음소리를 듣고 다들 먼 곳으로 헐레벌떡 도망치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곰뿐인데 녀석도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벌벌 떨고 있었다.

‘핀! 이쪽으로 와!’

나는 예전부터 내게 큰 도움을 준 방어막을 전개하고 핀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핀은 고개를 내저으며 들어오길 거부했다.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한, 그런 표정이었다.

‘핀?’

“……아빠는, 내가 지킬 거야…….”

나는 놀라 숲으로 뛰어가는 핀을 붙잡았다. 하지만 용이 내 힘을 가볍게 뿌리친 것처럼 핀도 나를 간단히 뿌리치고 달려갔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핀이 진심으로 내게 저항한 적이 없었음을.

지금의 힘으로 미루어 보건데, 어쩌면 저 용과 맞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핀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 용에게 내 힘은 통하지 않는다.

그저 딸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말려야 한다. 내 가설에 희망을 조금 보태서 용과 핀의 힘이 확실하게 동등하다 하더라도, 그 말은 즉 둘 중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더 이상 내 가족이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핀! 멈춰! 위험해! 용이라고! 죽을 수도 있어!’

“괜찮아요. 투명한 용만 아니면 이길 수 있어요.”

평소라면 잔뜩 태클을 걸어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도 없다. 핀은 빠르다.

벌써 용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 버렸다. 하늘을 날던 용은 핀을 보고 아래로 급강하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

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핀을 도와 싸워야겠다는 내 전의를 앗아간다.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연립주택만 한 크기였다.

“아빠를 괴롭히지 마!”

내가 용을 만나 정신적 데미지를 입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핀이 달려들며 외쳤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스피드로 용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는데, 생각 외로 용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용의 목이 뒤로 꺾였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핀의 몸이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내려온다. 후속타를 먹일 준비를 하지만…… 꺾인 목 뒤로, 용의 눈동자가 핀을 쏘아본다.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핀! 위험해!’

내 사념이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용의 아가리에 화염이 고였다.

톱니 같은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길은 머리카락처럼 하늘거리며 아지랑이를 흩뿌렸다.

‘핀!’

액체와 같은 진한 홍염(紅焰)이 핀과 대지를 집어삼켰다.

닿지도 않았는데 주변의 나무들은 불이 다른 나무들에 옮아 붙기도 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홍염이 사라진 대지가 검게 물들었다. 차갑고 시원해야 할 대지가 풀 대신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그 한가운데 핀이 옷이 불타 헐벗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핀! 괜찮니?’

“콜록. 괜찮아요, 아빠.”

괜찮다고는 하지만 살이 벌겋게 익어 고통에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 빈약한 상상력과 얼뜨기 같은 추론보다 핀은 훨씬 대단한 아이였지만 내게 있어 소중한 딸이기에, 이렇게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애벌레 시절의 핀을 치료해 줬던 것처럼 마력을 사용했지만, 그때와 같은 위력은 나오지 않아 달아오른 살이 조금 정상적인 색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그쳤다.

후회된다. 왜 이 힘을 더 연습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더라면…….

그런 후회는 접어두자. 얽매여 있다가 더 큰 후회를 하기 전에.

홍염을 내뿜은 용은 어째선지 공격을 하지 않고 목에 가시가 걸린 사람처럼 이상한 기침을 내며 콜록거렸다.

두 발로 서 있던 녀석이 네 발로 자세를 바꾸고 몸을 고양이처럼 이리저리 비트는 모습은 참으로 괴상했지만, 녀석을 관찰해 본 결과 다리에 미세한 떨림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있던 구멍을 감싸던 막은 일종의 봉인이 아니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아래에서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꽤 긴 시간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봉인을 깬 것은 방금 전. 구멍에서 막 나온 이 녀석은 몸의 떨림으로 보건데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것이다.

기회의 신은 앞머리밖에 없기에, 호기(好期)를 맞았을 때 잡아야 하는 법.

제정신이 아닐 때 쓰러트려야 한다.

‘핀.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 행동해 줘.’

“아빠?”

그래. 의문을 표하는 건 당연하지. 싸우지 말라던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 녀석을 지금 쓰러트리지 못하면, 언젠가 회복해서 나와 핀을 죽이러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야.

“알았어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싸움의 프로도 아니거니와 이런 녀석은 규격 외의 녀석이니 지금 이 상황을 싸움이라 표현 할 수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위험한 야생동물의 ‘구축(驅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무로 꽤 오랜 시간을 지내온 나는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그 버릇은 지금 용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약점이 보인다.

내 의지를 전달받은 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녀석이 정신 차리기 전에 빨리 시작해 볼까.

‘핀. 우선 녀석에게 최대한 접근 해. 내가 말할 때까지 거리를 벌리면 안 돼.’

“네!”

핀이 빠른 속도로 용에게 접근했다. 몸을 비틀던 용이 핀을 물어뜯으려고 했으나 허공을 물어뜯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었다.

약점 하나. 이 녀석의 속도는 결코 핀보다 빠르지 않다.

핀이 접근하자 녀석은 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였지만 잔상을 남길 만큼 빠른 핀을 맞출 순 없었다.

역시 저 꼬리로 공격이 가능했군. 땅이 패는 정도와 날카로움이, 홍염만큼이나 위험하다.

‘다시 뒤로 물러나.’

원래 있던 검은 대지로 핀을 물러나게 했더니 용은 다시 한 번 입에 홍염을 머금었다.

꼬리가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화염으로 공격하려는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 외엔? 없다.

조금 더 기다리자. 입에서 불을 내뿜고, 그것이 격한 아지랑이를 피워 녀석의 시야를 혼란스럽게 할 때까지.

‘핀. 점프! 녀석에게 달려들어.’

홍염의 바다 위로 핀이 뛰어올랐다. 남다른 힘을 가진 핀이기에 점프력 역시 용을 뛰어 넘을 정도로 높았다.

불타오르는 대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밤하늘 아래의 핀을 비춘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불빛을 부수며 별처럼 빛난다.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해야 한다.

위로 뛰어오른 핀이 용에게 떨어지고 있다.

늦게나마 핀을 발견한 용은 꼬리로 핀을 쳐내려 한다. 핀이 아무리 빨라도 공중에서 피할 순 없다.

약점 둘. 근접한 적을 공격할 수단이 꼬리뿐이다. 녀석은 불을 내뿜은 후에 목의 통증을 호소하듯 기침을 내뱉었다.

녀석의 팔은 몸체에 비해 짧기에 핀을 공격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깨물 수도, 팔로 공격할 수도 없으니 남은 건 꼬리뿐이다.

하지만 그 꼬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잡고 있으니까.

약점 셋. 녀석은 혼자지만 우리는 둘이다.

이전처럼 몸 전체를 감싸려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꼬리에 마력을 집중하여 고정시킨다. 그것만으로도 꼬리를 날리는 것을 잠시 멈출 수 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이상한 포효도 목이 부담스러운 지금은 사용할 수 없겠지.

계속해서 잡는 건 녀석의 힘이 너무 강해 무리지만 잠시면 된다. 핀이 등 뒤로 올라탈 때까지.

“아빠. 올라탔어요!”

‘쥐어 뜯어버려. 핀.’

약점 넷. 녀석의 날개와 몸을 이어주는 연결 부위는 비늘에 뒤덮여 있지 않다.

날개와 몸체를 이어주는 것은 나무처럼 두꺼운 뼈. 핀의 힘이라면, 날개를 뜯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아아압!”

핀이 이를 악물고 날개를 뽑으려 애쓴다.

격통 때문인지, 아니면 위험을 느낀 것인지 용이 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핀을 떨어트리려 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우리 딸은 곰이랑 로데오하면서 그 정도는 단련됐거든. 덩치는 크지만 어딘가 나사 빠진 네 움직임으론 떨어트릴 수 없어.

“으랏차!”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마침내 핀이 날개를 뽑아버렸다. 뽑힌 자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온다. 지금부터 다시 내 차례다.

‘핀. 뒤로 최대한 떨어져. 이제부턴 아빠가 한다.’

핀을 떨어트리고 나는 몸부림치는 녀석의 상처로 마력을 흘려 넣는다. 추측이 맞았다.

내 마력은 이 녀석의 비늘을 뚫기엔 약하지만 상처를 통해 내부로 흘려 넣을 순 있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이 녀석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검은 기운으로 빚어 만든 듯한 이 용은 내게 적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다만, 검은 기운에 대한 내 생리적 혐오감 속에 섞여 있는 이상한 기분 또한 커져, 대화하고픈 마음이 잠시 생겼었던 것뿐이다.

그 기분은 그리움. 그래. 그리움이었어. 생판 처음 보는 용에게 그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 역시 혐오감에 덮여 잊힌다.

마지막 약점. 검은 기운. 공격력이 약한 내가 쉽게 없앨 수 있는 그 기운으로 이 녀석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검은 기운에 완전히 잠식된 짐승을 정화하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사라져라.’

저항이 강하다. 틀어놓은 수도꼭지를 억지로 손으로 틀어막는 기분이다.

계속해서 내 마력을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 사라져라. 사라지란 말이야. 사라져 버려.

또다시 내 마력이 하얀색으로 변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핀을 비출 만큼, 지금까지 없었던 강렬한 빛이었다.

저항하던 검은 기운이 바스라진다. 그리고 거침없이 용의 내부를 휘저었다. 마지막 한 조각의 기운까지 전부 없애 버리도록.

발악을 하던 용이 경련하다가 그대로 자신이 검게 태운 땅위로 쓰러졌다.

용의 몸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겼다.

“아빠……. 이긴 거예요?”

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 핀의 피부는 뜨거운 햇볕에 탄 것처럼 붉은 상태였다.

안심시켜 주자. 쓰러진 용을 보여주는 것보다 나의 한마디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아이들이란 그렇다.

‘그래. 이겼어……?’

그러나 바스러지는 용의 몸속에서 또다시 검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상처를 통해 밖으로 오물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용의 몸을 감싼다. 마지막으로, 뽑혀진 날개 모양으로 변하더니 용이 일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도, 어째선지 핀도 외쳤다.

“아빠! 2페이즈예요!”

‘2페이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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