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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검은 용(1)
핀의 강함이 증명된 이후에, 나는 짐승들을 영역 밖으로 쫓아내기를 그만두었다.
한동안 쫓아내지 않자 한두 마리씩 고개를 내밀더니 짐승들은 다시 내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최대한 많이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제 핀이 짐승들 따위에게 다칠 위험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들어오든 말든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이 녀석들이 들어오면 내게 도움이 된다.
“아하하하! 재미있어! 저쪽으로 가자!”
자기 덩치의 백배 이상이나 되는 곰의 등 위에 올라가서 로데오를 하고 있는 핀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핀을 태운 곰은 핀을 떨어트릴 생각도 못한 채 열심히 핀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
그동안 핀이 많이 심심해했는데 짐승들이 오고 나서 꽤나 활기를 띠게 되었다.
물론 당하는 짐승들의 입장에선 괴롭힘 수준이겠지…….
물론 동물들이 핀을 처음부터 따르는 건 아니다.
내 전생의 기억 속 엘프는 숲과 친하며 동물들의 친구라고 했는데 핀을 처음 본 동물은 도망가지 않고 털을 곤두세우며 위협 먼저 시도했다.
하지만 핀이 처음 짐승을 만나고 한 말은 이러했다.
“귀여워!”
처음 만난 짐승은 여우처럼 생긴, 털이 고운 중형견 크기의 짐승이었다.
그 고운 털이 고양이처럼 곤두서서 핀을 위협했지만, 핀이 누구인가. 내가 인정한 치트의 소유자 아니던가.
재빠르게 여우같은 짐승을 붙잡고 털을 쓰다듬었다.
“와아. 부드럽다.”
핀의 품 안에서 이리저리 발버둥도 쳐보고 핀을 깨물어도 보지만 무반응으로 핀이 쓰다듬기를 계속하자 결국 포기하고 핀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풀려난 동물들은 핀 근처로 잘 다가오지 않으려 했지만 핀은 귀신같이 녀석들을 찾아내서 데리고 놀았다.
작은 짐승의 경우 이렇게 간단하게 일방적인 허그로 결판이 났지만 큰 짐승의 경우는 다르다.
예를 들어 지금 핀의 자동차가 되어 나대신 어부바 놀이를 해주고 있는 저 곰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건의 시작은 어젯밤이었다.
아직 초저녁의 이른 시간, 핀이 강하다곤 해도 밤중에 어린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순 없었기에 나는 내 근처에서 놀고 있는 핀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묘한 기시감에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저녁의 은은한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예전에 봤던 곰보다 한층 더 큰, 2층짜리 개인주택만 한 갈색의 곰이었다.
바위만 한 앞발로 성큼성큼 걷는 녀석은 주변에 있는 나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하는 행동으로 봐선 아마 다른 녀석의 영역인지 확인하는 것으로 보였다.
냄새를 맡던 녀석은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자 주변 나무들에 몸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 때문에 나무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애처롭게 휘어졌다. 그리고 영역 표시를 끝낸 곰은 자신의 땅임을 만천하에 알릴 포효를 내질렀다.
『캬오오오!!!』
“누구냐!!!”
그 사자후 같은 성난 소리에 핀이 갑자기 반응하더니 곰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명의 소녀와 한 명의 짐승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핀은 거구의 곰 앞에서도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마치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듯이 거만하게 말했다.
“여긴 내 구역이야! 마음대로 들어오지 마!”
언제부터 숲이 네 구역이였냐라고 묻기엔 나도 한 짓이 있어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곰은 그 말에 회답하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크어어어!!!』
뜻은 모르지만 유추해 보건데 나랑 비슷하게 ‘언제부터 이 숲이 네 구역이었냐, 꼬맹아’가 아니었나 싶다.
한 지역의 대장끼리 통하는 것이 있는지 핀은 그 말을 알아듣고는 곰을 노려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승부를 보자.”
핀이 말하고는 팔을 내렸다. 곰도 두 발로 일어서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는 삼 초를 양보하는 법. 먼저 와라.”
상당히 매니악한 대사를 읊은 핀의 도발이 먹혔는지 곰이 앞발로 핀을 내려친다.
겉보기엔 소녀를 덮치는 맹수의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핀을 도울 뻔했지만 갑자기 핀이 외친 한마디에 그럴 수 없었다.
“아빠! 도와주면 안 돼요. 이건 사나이의 승부예요.”
언제부터 네가 사나이였냐. 다른 딴죽 걸 게 많은데 이거 하나만 걸다니. 적응력이 좋아서 다행이다.
곰의 손바닥이 핀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이걸 맞는다면 핀은 저 숲 너머로 날아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핀을 믿어보자.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크어?』
핀을 덮친 앞발은 핀을 밀어내지 못하고 단단한 바위를 내려친 것처럼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 앞발은 바위도 부술 만한 위력이니 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이 초 남았다.”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핀이 말했다. 남자 같은 말투지만 작은 여자아이라 위화감이 들었다.
『크어어어!!』
믿기지 않는 현실을 목격한 곰이 앞발을 무작위로 휘저으며 핀을 공격했다.
발톱이 닿은 땅이 파이며 커다란 상흔을 남겼지만 그런 발톱조차 핀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휘젓는 앞발의 폭우를 요리조리 뚫고 곰의 아래까지 접근한 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삼 초 넘었거든!”
……뭐, 뒷일은 지금 곰 녀석이 핀이랑 놀아주는 걸 보면 다들 짐작하리라 믿는다.
핀을 무서워하며 도망친 다른 짐승들과 다르게 이 녀석은 핀에게 지고 나서 강아지마냥 순종적으로 변하더니 지금은 내가 있는 곳 근처에서 머물고 있다.
평범한 강아지랑 다르게 몸집이 좀…… 크지만 핀의 말도 잘 듣고 알아서 먹이도 찾아 먹으니 손이 안 가서 좋다.
제발 먹을 거면 멀리서 먹고 왔으면 좋겠다. 상납금마냥 가져와서 핀한테 바치지 말고.
“곰. 저쪽으로 가자.”
참고로 이 녀석의 이름은 곰이다. 그냥 곰. 이름 짓기 귀찮아서가 아니다.
핀이 이 녀석의 이름을 물었을 때 내가 ‘곰이네’라고 말했는데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핀이 곰으로 하자고 해서 그냥 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쨌거나 짐승들이 늘어나며 다들 핀의 친구(라고 쓰고 부하라 읽는다)가 되어주어서 참 다행이다.
전생에 부모님들이 괜히 뽀로×를 좋아했던 게 아니다.
핀이랑 놀아주는 건 즐겁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 맞춰주기 힘들 때가 있다. 여자아이답지 않게 상당히 과격한 놀이를 좋아하는 핀의 활동은 심장이 약한 내겐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짐승들이 대신 받아주니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길 시간이 생겼다.
“가자! 숲을 정복하러!”
『크어어어!!!』
……잠깐 너희 거기 좀 설래?
* * *
최근 들어 밤이 되어도 달빛이 강해 숲이 환하다. 나는 핀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고 잠든 얼굴을 보다가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끌벅적한 낮 시간대엔 숲의 정찰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핀이 잠드는 시간에 정찰하고 있다.
‘전보다 넓어졌다.’
내 관찰 가능한 범위가 더 늘어남에 따라 이 작업에 시간이 꽤나 소요되고 있다.
원이 넓어질수록 그 표면적이 넓어지는 것과 같이, 살펴봐야 할 숲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이제 핀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반드시 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행위를 지속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찾았다. 검은 기운.’
짐승들을 검게 물들이는 위험한 녀석.
검은 기운은 최근 들어 거의 다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바위틈이나 나무 고랑 아래에 숨어 있는 녀석들이 있어 보는 족족 없애 버리고 있다.
이 일은 동물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왜인지 나도 모른다. 그저 이 검은 기운을 볼 때마다 생리적으로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바퀴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과 비슷하지만, 일방적인 혐오감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섞인 듯한 묘한 기분이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일단 그것의 정체는 천천히 생각하고 계속해서 검은 기운을 없애야 한다는 작은 사명감에 불타 오늘도 이렇게 밤중에 검은 기운들을 없애고 있다.
그러던 중, 기분이 한결 더 불쾌해졌다.
이렇게 검은 기운들을 없애는 와중에 내 관찰 범위가 늘어났는데 그 끝에서 불쾌함이 쏟아져 나를 자극했다.
이 불쾌감은 검은 기운 이상이라 도저히 확인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구멍?’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마치 운석에 의한 크레이터처럼 깊이도, 넓이도 평범하지 않은 구멍이었다.
신기하게도 구멍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각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통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어둠에 구애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멍 안쪽은 까만 물감으로 덧칠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내 시선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구멍 주변을 강아지처럼 맴돌며 특이한 점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구멍 주변을 계속 보다보니 얇은 막이 쳐져 있고 한 군데서 조금씩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멍 안이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니라 전부 검은 기운이었던 건가.
‘마력으로 건드려 볼까?’
흘러나온 검은 기운을 처리해도 계속해서 흘러나왔기에 나는 막을 없애고 안쪽에 있는 기운들을 소탕하기로 결심했다.
마력 조작이 능숙해진 후로 검은 기운을 처리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기에 이 정도 양이라도 걱정이 없었다.
‘제법 단단한걸.’
마력을 집중해서 막을 깨트리려고 시도해 보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단단했다.
생각을 바꿔서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이미 작은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은 이 얇은 막이 깨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마력을 송곳처럼 얇고 뾰족하게 집중해서 얇은 막을 쑤셨다. 꽤나 질퍽한 느낌으로 마력으로 만든 송곳이 막을 뚫고 들어갔다. 이 방법은 통한다.
마력의 송곳을 계속해서 만들어 막에 여기저기 구멍을 뚫었다.
찜기구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막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했지만 이제 힘으로 밀어붙이면 깨질 것 같았다.
‘이제 깨트려 볼까.’
마력을 있는 대로 집중해서 막을 한꺼번에 둘러쌓았다. 살짝 힘을 주니 막이 흔들린다. 이대로 깨부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이거 부셔도 되는 걸까.’
처음 보는 이상한 구멍을 두고 잠시 고민해 본다. 굳이 위험한 것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저 이대로 두고 시간을 들여 관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본능이, 검은 기운을 혐오하는 생리적 현상이 이성을 짓누른다.
특히나 이 안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기운은 숲에서 본 것과 다르게 혐오를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나를 자극했다.
참을 수 없다.
-쨍그랑!
유리가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막이 산산이 부셔져 비처럼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진 투명하고 얇은 막은 하얀 연기가 되어 산화해 버렸다. 나는 그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검은 기운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힘을 쏟아 부었다.
구멍 안에 고여 있던 검은 기운들이 요동친다. 나는 윽박지르듯 그것들을 눌러 버렸다. 내 안에 스위치가 켜지듯 자연스럽게 마력이 조작된다.
애벌레이던 시절의 핀을 치료했을 때 봤던 흰색의 빛이 구멍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섬광이 사라진 후, 구멍 안에 있던 검은 기운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나는 흡족한 기분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남아 있다. 구멍 가장 안쪽, 검은색의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나는 그것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이 눈을 떴다. 위험한 맹수와 같은, 그리고 피비린내가 날 듯한 붉은색 눈동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