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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누가 소녀가 약하다고 그랬나
소풍가기 전날엔 가슴이 설레어 잠이 안 오는 법이다.
어린 시절, 소풍날이 다가오면 보지 않던 뉴스를 보곤 했다.
혹시라도 비가 내릴까 봐 자기 전에 믿지 않던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고, 늦잠 자지 않게 이불을 푹 덮었었다.
그래도 잠이 안 와 혹시나 늦잠 잘까봐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었다.
아침에 오줌이 마려워서 잠이 깨길 바라는 요상한 편법이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아 소풍날 늦은 적은 없었다.
‘핀. 일어나야지. 오늘 숲에 가기로 했잖니.’
“우웅……. 네…….”
핀은 나를 닮은 건지 어젯밤부터 흥분한 표정으로 조잘조잘 내게 말을 걸더니 결국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잠에 흠뻑 젖어 정신을 못 차리는 핀을 깨운 뒤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세수를 시켰다.
예전에는 바람밖에 만들 수 없었는데 잠이 줄어들고 비를 자주 맞다 보니 이젠 마력으로 물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무라 딱히 필요는 없지만 핀에겐 물이 필요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세수만 시키면 준비는 끝이다. 신기하게도 핀의 머리는 떡이 진다거나 기름이 번들거리지 않아서 감을 필요가 없었다.
준비를 끝내고 도시락으로 쓸 겸 내 이파리를 몇 장 챙겨 공중에 띄웠다.
핀이 입고 있는 옷엔 주머니가 없으니 이대로 들고 갈 예정이다.
“숲이다!”
핀아. 미안한데 우리 처음부터 숲에 있었거든? 내 주변이 조금 공터라서 그렇지…….
때늦은 태클을 마음속으로 걸어주고 숲으로 들어가는 핀에게 시선을 맞췄다.
나는 못 움직이니 이런 식으로 계속 핀을 곁에서 봐주는 것이 전부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서 주변도 같이 살펴보고 있다. 다행히도 그동안의 작업이 성과가 있었는지 숲엔 나무와 핀,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의 시선뿐이다.
항상 둘러보는 숲이라 내겐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핀에게 숲은 별천지 세계인가 보다.
아까부터 지나가는 나무 하나 하나를 살펴보는가 하면 바위를 만져보기도 하고 돌멩이를 주워 손에 꼭 쥐고 신나게 숲을 걸어가고 있다.
‘핀. 돌멩이는 왜 가지고 있니?’
“예뻐서요.”
으음. 내 눈엔 평범한 돌처럼 보이는데.
여러 광물이 섞여 검붉은색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평범한 돌보다는 모습이 다채롭긴 하다.
나와 핀이 사는 곳에는 저런 돌이 없었으니 신기할지도 모르겠군.
희희낙락하며 돌을 쥐고 숲의 나무와 바위를 전부 만나면서 가니까 진행 속도가 매우 느리다.
사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아이의 모습은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기뻐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된다.
“아빠. 아빠. 이 나무님은 이름이 뭐에요?”
핀이 나무를 가리키며 내게 묻는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하나…….
‘으음. 아빠는 잘 모르겠는데.’
“아빠도 나무잖아요. 나무님이랑 이야기해서 물어보면 안 돼요?”
나무라고 해서 나무랑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내가 널 만나기 전에 심심해 죽으려고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순수한 눈빛으로 나무를 보고 있는 핀에게 진실을 알려줄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꿈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고. 산타가 없다는 진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충격을 핀에게 겪게 할 순 없지.
한 번 말을 걸어보자.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웃에서 찾아온 위그드라실이라고 합니다. 평안하신가요? 초면에 죄송한데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잠시 뜸을 들여 대답해 주길 기다렸지만 말이 없다.
당연하지! 말하는 나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당당하게 내 정체성을 부정해 주고 핀을 보니 기대에 찬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내게도 부모로서 피할 수 없는, 자녀에게 하게 되는 하얀 거짓말을 할 때가 왔다. 언젠간 하게 되리라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대표적인 하얀 거짓말로는 ‘아이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단다’와 ‘엄마랑 아빠 안 싸웠어’가 있다.
후자는 쓸 일이 없으니 언젠간 전자를 사용할 줄 알았는데.
‘으음. 핀. 인사하렴. 이 아저씨는 토마스 아저씨란다.’
“안녕하세요. 토마스 아저씨.”
예의도 바르지. 허리 숙여 인사하다니.
“그럼 이 아저씨는 이름이 뭐에요?”
근데 인사하자마자 무시하는 건 좀 아니잖니? 핀은 토마스(가칭) 나무에게 인사하곤 다른 나무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내 작명에너지가 부족하질 않기를…….
‘그 아저씨는 로버트 아저씨란다.’
“이 아저씨는요?”
‘그 아저씨는 리차드 아저씨란다.’
“이 아저씨는요?”
‘그 아저씨는……. 브라이언 아저씨야.’
“이 아저씨는요?”
‘……그분은 아저씨가 아니구나. 세라 아줌마란다.’
위험하다. 이러다가 온 숲의 나무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할 판이다. 이쯤에서 끊어야 한다.
‘핀. 다들 주무실 시간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자꾸나.’
“으응……. 낮인데 잠을 자요?”
‘그래. 여기 계신 분들은 올빼미족이라고 해서 밤에 일하고 낮에 주무시는 분들이란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궁금해요.”
‘그, 그러니까……. 소설. 이분들은 소설가라고 해서 이야기를 만드시는 분들이야. 밤새도록 일하시고 이제 주무실 시간이니까 방해하면 안 돼요’
“정말요? 그럼 나중에 이야기 들려달라고 해도 돼요?”
‘……그래. 핀은 나무님들의 목소리를 못 들으니까 이 아빠가 들어서 네게 이야기해 줄게.’
“네!”
조만간 이야기를 한 편 생각해 놔야겠다. 아니지.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내용을 들려주면 되려나.
나무들과의 만남이 끝나고 숲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던 핀은 갑자기 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벌레다!”
꽁지로 실을 내뿜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애벌레를 발견한 핀은 나무 위로 올라가 조심스레 애벌레를 손으로 집었다.
애벌레는 예전의 핀과 다른 종류의 것인지 새끼손가락만 한 초록색이었다.
“아빠. 애벌레!”
‘그래. 애벌레구나.’
“징그러.”
……너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네 정체성을 부정한다?
손가락에 잡혀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어깨 위에 올린 채 나무에서 내려온 핀과 숲을 걷다가 마침 괜찮아 보이는 바위를 발견해서 그곳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두 개의 바위가 붙어 있었는데 바위들이 넓고 평평해서 앉아서 식사하기 좋은 모양이었다.
바위 위에 올라가 앉은 핀은 어깨 위에 올려둔 애벌레를 내려놓았다. 작고 힘없는 애벌레는 도망가려 애써보지만 번번이 핀에게 잡혀 옆자리에 고정되었다.
“나랑 같이 밥 먹자.”
불쌍한 녀석. 어린아이란 역시 순수하지만 잔혹하군.
핀의 배에서 꼬르륵하고 신호를 보낸다. 입고 있는 나뭇잎 원피스를 보는 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애써 만든 작품이 한 끼 식사로 사라지기 전에 어서 준비해 둔 나뭇잎을 주자.
“아빠, 애벌레한테 나눠줘도 돼요?”
나뭇잎을 맛나게 먹던 핀이 내게 묻는다. 흠. 줘도 상관은 없지만 어째 가슴이 답답하다.
왜 이럴까. 아. 그렇군.
핀 말고 다른 녀석이 내 나뭇잎을 먹는다니. 그건 안 된다.
이 묘한 질투심을 드러내지 않고 핀의 요청을 거부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또 해야겠다.
‘핀. 그 애벌레는 아빠의 나뭇잎을 먹지 못한단다. 왜냐면 아빠의 나뭇잎은 핀처럼 특별한 애벌레만 먹을 수 있거든.’
“애벌레 아닌데. 히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쁜지 웃고 있다. 속아 넘어가 줘서 다행이다.
“그럼 토마스 아저씨한테 달라고 하고 올게요.”
‘응? 꽤나 멀리 들어왔는데 거기까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위에서 내려온 핀이 숲으로 달렸다.
녹색과 금색의 잔상이 희끗하고 숲을 가로질렀다. 핀이 보통 이상으로 민첩한 건 알았는데 속도마저 달리기 이상으로 빠를 줄이야. 점점 내가 생각하던 평범한 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지금이 기회군. 불쌍한 애벌레를 놓아주자.
애벌레를 아까 있던 나무 위에 다시 올려주는 동안 순식간에 토마스(가칭)에게 다녀온 핀의 양손에 나뭇잎이 한 아름 안겨 있다.
토마스(가칭)에게 허락은 맡았냐고 물어보니 내 눈치를 보다가 허락을 맡았다고, 뻔한 거짓말을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잠시 토마스(가칭)에게 애도를.
핀은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옆에 나뭇잎을 던져두고 식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애벌레가 사라졌다.
“애벌레가 없어졌어! 아빠! 애벌레 못 봤어요?”
‘잘 모르겠구나. 집에 간 게 아닐까?’
이리저리 둘러보던 핀이 얼굴을 대고 바위 사이를 살펴보았다. 어두운 바위틈은 핀의 손가락도 안 들어갈 만큼 좁았다.
“혹시 여기 빠졌을지도? 구해줄게!”
거긴 손가락도 안 들어갈 텐데? 어떻게 구해주겠다는 걸까. 바위라도 번쩍 들지 않는 이상 무리다. 나한테 부탁이라도 하려는 걸까?
……사실 아까부터 조금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 애벌레를 몰래 돌려놓는 순간부터 이 때를 노렸다.
닌자와 같은 민첩성, 치타보다 빠른 스피드. 그렇다면 힘은?
저 바위도 얍! 하고 두 손으로 들 수 있지 않을까? 딸이 강한 걸 싫어할 부모는 없다.
“얍!”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으로 바위를 들었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큰 바위를 한 손으로 들고 있다. 다른 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점심밥을 꼭 쥐고 있었다.
“어디 있지?”
바위를 들고 아래쪽의 구덩이를 살펴보던 핀은 애벌레가 보이지 않자 그대로 내려갔다.
바위는 어쨌냐고? 그냥 손에서 놔버렸다.
멍하니 핀이 하는 걸 보고 있다가 핀이 놔버린 바위가 구덩이 쪽으로 기울어지더니 핀을 덮쳤다. 화들짝 놀라 바위를 잡으려고 했는데 핀은 바위에 부딪히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애벌레 수색에 집중하고 있었다.
구덩이 아래에서 핀이 움직일 때마다 핀을 누른 바위가 조금씩 흔들거리는 모습이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몸의 내구도가 장난이 아니 구나 너.
“어두워! 깜깜해!”
‘핀. 바위를 치우면 되지 않겠니?’
“맞다. 에잇!”
귀찮은 파리 치우듯 바위를 위로 밀어내자 튕겨져 나가듯 바위가 공중에 붕하고 떠올랐다가 큰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환해진 바위 아래에서 애벌레를 찾는 핀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애벌레가 안 보여요.”
실험 정신이 솟구쳐 핀을 너무 괴롭혀버렸다. 진실을 말해줄 때로군. 미안하다. 핀. 내가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왔어.
‘그러고 보니 아까 애벌레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던데?’
아직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크면 말해주자.
핀에게 바위를 다시 원래 위치에 맞춰놓으라고 한 뒤, 우리는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나가는 길에 애벌레가 무사히 있는 걸 확인한 핀은 처음 산책하러 나왔을 때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더불어 나도 기분이 좋다.
나는 치트가 아니지만 핀은 치트급으로 강하다.
오늘 본 것으로 판단했을 때 적어도 이 숲에서 핀을 해코지할 수 있는 짐승은 없을 것 같다. 앞으론 숲에 자주 보내줘도 될 것 같다.
가는 길에 토마스(가칭)의 나뭇가지가 꽤나 앙상해져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