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8화 (1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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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꿈틀이 개명(改名)

꿈틀이를 딸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자 바로 시작해야 할 일이 생겼었다.

꿈틀이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 숲이라 보는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나는 이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혹시라도 사람이 찾아와서 내 딸의 알몸을 본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긴 숲이고 옷을 살 가게도, 만들 재료와 기술도 없다.

그래서 간신히 짜낸 해결책은 꿈틀이를 위해 모아둔 나의 나뭇잎으로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헤헤.”

꿈틀이가 발레리나처럼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나뭇잎으로 만든 원피스를 내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연두색의 나뭇잎 원피스는 꼼꼼하게 엮어서 옷으로서 제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니?’

“네! 아빠의 몸으로 만든 거잖아요.”

마음에 드니 다행이다.

처음엔 나무줄기로 나뭇잎을 엮어서 만들어볼까 계획했지만 그렇게 만들어봐야 금방 망가질 거라 판단해서 보류했다.

엘프가 된 꿈틀이는 꽤나 활동적이어서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주변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 열심히 고민하다가 나는 마력으로 실을 만들어 엮으면 어떨까 싶어서 시도해 보았다.

마력으로 만든 실은 꽤나 질기고 단단해서 끊어지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나뭇잎을 꿰자 거기에 스며들 듯이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실이 질기고 단단해서 혹시나 동화된 나뭇잎도 그러지 않을까 해서 한 장 찢어봤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찢으려 해봐도 찢기지 않았다. 이게 마력의 힘일까. 신기하다.

어쨌든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어서 장인의 손길처럼 한땀 한땀 공들여 나뭇잎을 꿰었더니 꽤나 그럴싸한 원피스가 완성된 것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만든 보람이 느껴진다.

“배고플 때 이거 먹어도 돼요?”

‘꿈틀아…… 내 땀의 결실을 먹지 말아주렴…….’

아무래도 꿈틀이는 엘프의 모습이 되었어도 식사는 내 나뭇잎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모습이 바뀌었어도 꿈틀이는 꿈틀이였다.

‘그나저나 꿈틀이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은데. 꿈틀아. 네 이름을 바꿔주고 싶은데 어떠니?’

“우웅……. 다른 이름이요?”

꿈틀이는 이름을 바꾸자는 내 말에 내키지 않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꿈틀이의 이름을 바꾸고 싶은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이제 애벌레도 아닌데 애완동물에게 대충 지은 듯한 이름을 계속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꿈틀이라고 부를 때마다 꿈틀이를 인간이 아닌 동물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착잡하다.

우리는 이제 가족이니까 다른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이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아니면 내가 또 생각한답시고 꿈틀이에게 말을 건 것인지) 꿈틀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마워요! 아빠! 나 다른 이름 갖고 싶어요!”

‘크윽! 그, 그래.’

귀여운 것도 적당해야지! 심장건강에 안 좋잖아.

자, 동의도 얻었겠다. 그럼 어떤 이름이 좋을까? 여자아이니까 희(喜)자가 들어가는 이름이면 좋겠는데. 영(英)이나 수(秀)자도 좋지. 아니면 순 우리말로해서 아라나 가림도 괜찮겠네. 아, 초롱도 좋지.

싱글벙글 이름을 생각하다 보니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지구가 아님을 깨달았다.

딱히 계획은 없지만 언젠가 꿈틀이도 나도 사람이나 이 세계 주민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들과 비슷한 이름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쪽 세상 사람들을 본 적이 없으니 작명 방법을 모르겠다. 흐음. 어떻게 한다.

이럴 땐 떠넘기기가 최고다.

‘꿈틀이는 원하는 이름 없니?’

“없어요. 아빠가 지어주는 이름이면 다 좋아요.”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된단다. 너한테 떠넘기려는 거거든.

‘그러지 말고 원하는 이름이 있으면 말해보렴. 이 아빠도 네가 지은 이름이라면 뭐든 다 좋단다.’

“네!”

떠넘기기 성공. 어린아이라 간단하군. 아니, 애한테 떠넘겨 놓고 뭐가 좋다고 기뻐하는 거냐. 나.

꿈틀이는 작은 이마를 찡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한테 너무 큰 짐을 맡긴 게 아닌가 싶었지만 꿈틀이의 찡그린 표정이 귀여워서 양심의 가책 따윈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으응…… 그럼, 켄시로?”

……잊고 있었는데 이 녀석, 어째선지 지구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이상한 쪽으로 탁월하다. 나무로 환생한다거나 애벌레가 엘프가 되는 기이한 일을 자꾸 겪다 보니 이젠 그러려니 한다.

‘좋은 이름이긴 한데 여자아이한테 안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다른 이름은 안 될까?’

“라오우!”

‘……그 이름이 좋니?’

“네! 이 이름이 강해 보여요!”

그래. 강하지. 강하고말고. 권황(拳皇)의 이름이니까 당연히 강하지. 이쯤 되니 꿈틀이가 나 같은 환생자가 아닌지 의심이 든다.

‘다른 이름은 없을까? 꿈틀이가 생각한 이름이니 이 아빠도 마음에 들긴 한데 더 좋은 이름이 있을 것 같구나. 떠오르는 이름들을 계속 말해보렴. 걔 중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골라줄 테니.’

“네. 알았어요. 그럼…… 토키, 파르코, 음 또…… 카이오!”

‘잠깐 멈춰! 왜 이름이 전부 세기말 패자들 뿐 인거냐! 그리고 쟈기는 왜 빼먹어!’

“쟈기……. 왠지 약한 이름 같아요.”

잠시 흥분해서 핀포인트가 어긋난 태클을 걸어 버렸다. 그래. 쟈기는 약하지. 아. 또 옆길로 새버렸다.

‘꿈틀아. 강한 이름을 생각하라는 게 아니었단다. 예쁜 이름을 골라야지.’

“그치만 전 아빠를 지켜주고 싶은 걸요! 강한 이름이 좋아요! 전 강하다구요!”

허리에 손을 척! 하고 올린 꿈틀이가 화난 얼굴로 날 올려다본다.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어버렸다.

어린아이들이란 참으로 순수해서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짜처럼 과장되게 이야기 하는 버릇이 있다.

말뿐이지만 정말 고맙구나. 내가 널 지켜줄게.

꿈틀이에게 맡겼다간 세기말 패자뿐만 아니라 여러 강자들의 이름이 나올 것 같으므로 내가 지어줘야겠다.

예쁜 이름이면서도 어떤 세상이든 잘 어울릴 법한 이름이 없을까?

으으. 어서 이름을 짜내어라, 나의 머리야. 두뇌 풀가동!

“피- 나 진짜 강한데…….”

‘그래그래. 이 아빠도 믿는단다.’

달래주기 위해 꿈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애벌레 때도 -피 -피 하고 울더니 아직 그 버릇이 남아 있네. -피라니.

하긴 버릇이 아닐지도.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니까…….

그 순간, 섬광처럼 나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소중한 자식에게 부모가 지어주는 호칭이 이름이 아니던가. 때로는 부부가 함께 상의하여, 때로는 가족 단위로 돌림이름을 써서, 때로는 소중했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그 장소의 명을 따서 짓는 것이 이름이 아니던가!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는 나와 애벌레였던 꿈틀이와의 추억. 그 당시 꿈틀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 그것은 바로 -피가 아니었던가.

그래. 정했어. 네 이름은 이제 피피다.

……짓고 보니 어째 강아지 이름 같다? 좀 더 사람 이름처럼 짓고 싶은데…… 아! 한 글자로 줄여볼까? 그래. 이거 좋은데?

‘「핀」! 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핀이다. 어떠니?’

피피를 한 글자로 줄여서 핀. 꽤나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음. 만족스럽군.

역시나 예상대로 꿈틀이는 내가 지어주는 이름이라면 뭐든 좋은지 바로 승낙해버렸다.

“좋아요! 히~ 저는 핀이에요.”

싱글벙글 웃으며 내 주위를 맴도는 꿈틀이, 아니 핀이 콧노래를 부른다. 처음 들어보는 음과 가사가 어쩐지 자작곡인 것 같다.

“핀 핀 핀~♬ 내 이름은 핀이라네~♬ 핑핑핑~ 핑핑이 할 때 핀이라네~♬ 에헤헤~ 핀은 핀이 돼서 기분 좋아~♬”

어째 가사가 이상한 것 같지만 기분 좋아 보이니 내버려두자.

뱅글뱅글 돌며 노래를 부르던 핀이 궁금한 게 있는지 내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이름이 뭐에요?”

‘응? 내 이름?’

“네. 아빠 이름이요. 아빠는 이름이 아니잖아요.”

아. 내 이름. 인간 이었을 적의 내 이름…….

뭐더라. 기억이 안 난다.

이름이란 자기 자신보단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내 이름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근데 나는 인간 시절의 마지막 수년을 집에서만 지내느라 내 이름을 듣거나 써본 기억이 희미하다.

이름이란 이렇게 몇 년 만 안 써도 금세 잊히는 덧없는 것이로구나.

절대 내가 까먹어서 핑계 대는 게 아니다.

‘끄응. 내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날랑 말랑 하는데……. 아. 기억났다.’

이제야 내 이름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무인 나의 그림자였다.

나는 이제 나무였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이름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무로서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다.

나무…… 나무로서 새로운 이름…… 무엇이 좋을까? 핀이 그랬던 것처럼 어쩐지 나도 강해 보이는 이름이 갖고 싶다. 강한 나무 이름이 뭐가 있지?

“위그드라실!”

갑자기 핀이 내게 말한다. 위그드라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세계수의 이름.

지하부터 천상까지 세 개의 세계에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

엄청 강해 보이는 이름이다.

“아빠가 핀의 이름을 지어줬으니까 아빠 이름은 내가 지어줄게요!”

아무래도 고민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또 핀에게 말을 걸었나 보다. 이 버릇을 빨리 고쳐야겠다. 괜히 이상한 생각하다가 핀이 들으면 애들 교육상 안 좋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이번만큼은 이 버릇이 있어서 다행이다. 위그드라실이라. 굉장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이거 핀한테 신세 좀 졌는걸.

‘고맙다. 핀. 그래. 이제부터 아빠이름은 위그드라실이야.’

“아빠 이름은 위그드라실.”

영원히 잊지 않도록 기억 속에 확실하게 새겨두려는 듯 핀이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네가 지어준 이름인데……. 그래. 까먹지 않게 잘 기억해 두렴.

핀이 다시 내 주변을 돌며 노래를 부른다. 핀의 이름과 내 이름이 몇 번이고 들어간 이 노래는, 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듣고 있는 내가 더 부끄러워서 화끈거린다.

나에게 딸이 생기고, 나무로서 새로운 이름이 생긴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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