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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애벌레의 변신은 무죄
하늘이 맑고 푸르다. 그뿐이랴. 구름 한 점 없어서 높고 높아서 이렇게 보고 있자니 파란 바다 같이 보인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 했던가. 낙엽 하나 지지 않은 이곳의 하늘은 벌써 가을이로구나.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노니, 꿈틀이가 살이 찐 이유가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니에요. 나는 살 안 쪘어요.”
한바탕 꿈을 꾼 듯이 꿈틀이와 지냈던 나날들이 흐려진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랴.
즐거웠던 그 나날들이 하룻밤 꿈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한때의 꿈이지만 참으로 즐거웠노라.
꿈틀아. 보고 싶구나.
“저 여기 있어요. 헤헤.”
현실 도피를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다리를 밖으로 빼 앉은 작은 소녀는 어째 내 생각을 고대로 다 읽고 있다.
내 반의반의 반도 안 오는 작은 키의 소녀는 앉아 있으니 더 작아보여서 살짝만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아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주인님. 나 이제 엄청 세졌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법한 소녀가 팔뚝을 들어 힘을 불끈 쥐었다.
그래 봐야 어린아이라 알통은커녕 물통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을 집중해서 인상을 팍 쓰며 힘을 주는 모습은 날 지켜주기는커녕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다.
“어때요?”
내게 다가와 ‘칭찬해주세요’라는 기대에 찬 얼굴로 빤히 올려다보니 거부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뾰족하고 기다란 귀가 강아지 꼬리처럼 파닥거려 기분 좋다는 오오라를 퍼뜨렸다.
‘완전 강아지 같네. 너 꿈틀이 맞구나.’
“네. 꿈틀이랍니다. 주인님.”
이 작고 귀여운 소녀의 정체가 꿈틀이임을 인정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하도 나무로 살다보니 이 감각을 잃고 있었다.
‘저기, 주인님이라고 하는 건 그만둬 줄래?’
“왜요? 주인님?”
‘미안한데 그 모습으로 주인님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위험하거든?’
번데기에서 막 나온 어린아이가 옷 따윌 입고 있을 리가 없다.
나체의 유녀(幼女)가 주인님이라고 하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것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거 전생이었으면 벌써 쇠고랑 차고 인터넷을 후끈 달굴 만한 대사건이잖아.
“그치만 여긴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전 주인님의 애완동물인걸요.”
그만! 위험해. 여러모로 위험하다고! 사람…… 아니, 귀가 길쭉하니 엘프인가? 그 모습으로 그런 말 하지 마! 나뿐만 아니라 4차원의 벽 너머 누구까지 위험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야.
‘주인님 말고 다른 걸로 불러주지 않을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꿈틀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방님?”
‘기각이다! 기각!’
대체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운 거야.
얼마 전까지 애벌레였던 녀석이 순진한 얼굴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 녀석, 지구였으면 벌써 남자 네다섯은 큰집으로 보냈을 거다.
다른 호칭을 떠올려 보라고 말해봐야 또 이상한 말을 꺼낼 것 같으니 내가 정해줘야겠다.
‘그냥 나무님이라고 불러.’
“에에…… 그치만…….”
‘난 그걸로 충분해. 나무니까 나무님이 제일 알아듣기 쉽잖아.’
“네에…….”
꿈틀이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냘픈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나무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이제 겨우 주인…… 나무님이랑 말할 수 있게 됐는데…… 같이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데…… 내가 지켜줄 수 있는데…….”
떨어뜨려진 고개 아래로 작은 눈물방울이 한 방울씩 흘러내린다. 천천히 고개를 든 꿈틀이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도 나무님의 가족이 되고 싶은데…….”
아아. 그런 거였구나. 이제 이해가 된다.
나무님이라 부르면 나와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느낀 거였구나.
나무로 태어나서 지금만큼 가슴이 뭉클해진 적은 처음이다. 내가 사람이었다면 꿈틀이를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을 만큼 꿈틀이가 사랑스럽게 보인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얼마만일까.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걸 느낀 적이 언제였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쁨이란 이토록 환희로 가슴을 메우는 거였구나.
그동안 잊고 있었다. 나만 생각하고 사는 작은 방 안에 갇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삶을 버려두고 있었다.
비록 꿈틀이가 원래 애벌레였다 할지라도 지금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그런 꿈틀이의 마음을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미안. 꿈틀아.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뺨에 가시지 않은 눈물자국을 닦아주고 꿈틀이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말랑말랑해서 젤리 같다.
꿈틀이의 눈에는 아직 물기가 고여 있었다.
‘꿈틀이는 웃는 게 더 예뻐. 울지 마렴.’
“정말요?”
벌게진 눈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은 꿈틀이는 갑자기 엉덩이를 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 뭐가 생겼나 찾는 것 같았다.
‘왜 그러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고 했는데…….”
신기하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자.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니? 말은 언제 배웠어?’
“그냥 기억났어요.”
‘언제부터?’
“처음부터요.”
애벌레였을 때부터라는 뜻일까. 아니면 엘프의 모습을 했을 때부터라는 뜻일까.
내가 묻기도 전에 꿈틀이는 대답했다. 역시 이 녀석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나 보다.
“애벌레였을 때부터요. 그리고…… 생각은 못 읽어요.”
음. 뭐지. 그럼 눈치로 안다는 건가. 겉모습은 어린데 백전노장(百戰老將)의 눈치를 가진 건가!
“지금도 말 걸고 계신걸요.”
……이제 알았다.
지금까지 내가 꿈틀이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꿈틀이에게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는 것으로 말을 걸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면 꿈틀이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
문제는 구강을 움직여서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조절이 안 되고 있었나보다. 이거 상당히 귀찮은데.
“저…… 귀찮아요?”
‘아냐 아냐. 괜찮아. 네게 한 말이 아니야. 진정하렴. 울지 마.’
또 시무룩해져서 울 것 같다. 일단 진정시키자. 그리고 우선 호칭부터 고치자.
주인님이란 호칭은 아무도 없다곤 해도 역시 내 정신건강에 좋지 못하다. 어린아이한테 주인님이라 불려서 좋아할 사람은 일부의 변태들뿐이라고.
오랜만에 두뇌를 가동시킬 때가 왔군. 여기서 잘못결정하면 앞날이 골치 아파진다.
어떤 호칭이 좋을까. 오빠? 아니야. 어울리지 않아. 아저씨? 안 돼. 주인님만큼이나 내 정신에 데미지가 온다. 그럼 삼촌? 삼촌이나 아저씨나!
“저…… 주인님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되요?”
‘응?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니?’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얼굴을 발그레 붉힌 꿈틀이가 조그만 입을 열어 말했다.
“……아빠?”
‘크아악!!!’
영혼의 심장이 멈출 만큼 엄청난 위력이다.
대체 이 파괴적인 힘은 뭐란 말인가. 아들 녀석(없지만)이 ‘아빠?’라고 말하면 ‘왜?’ 하고 시크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나거늘, 딸이란 존재는 이렇게 강력한 생물이란 말인가?
사고가 흐려진다.
세상이 도박하다 궁지에 몰린 카×지처럼 일렁거리며 뒤집힌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방향감각이 사라졌다. 일렁거리던 세상 너머에서 한 줄기 광명이 비춰진다.
그 빛 너머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내가 보인다.
하루 동안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온 가장으로서의 나. 하지만 장남이라고 있는 아들 녀석은 컴퓨터에 빠져 나와서 인사할 생각을 안 한다. 분명 현관문 닫는 소리를 들었을 거건만.
조용히 아들의 방문을 열자 헤드셋을 끼고 게임이나 하고 있다. 공부 좀 해라,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학창시절을 생각하곤 뒤로 물러났다. 공부란 시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구두 속에서 답답하게 갇혀 있던 발이 항의하듯 냄새를 풍겨온다. 거실에 있던 아내가 냄새난다고 구박했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는 없다. 내가 일하는 건 가장으로서 당연한 거니까. 더 구박받기 전에 양말을 벗어 세탁기에 넣고 샤워를 했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으려는데 아내가 나를 베란다로 부른다. 팬티 한 장을 걸치고 베란다로 가자 게임하던 아들놈이 나와 있다. 오늘이야말로 한마디 해줄까. 하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아내가 내게 말한다.
“양말 뒤집어서 벗어 놓을 거면 당신 빨래는 당신이 알아서 해.”
말하면서 내 양말을 옷걸이로 쓰레기 건지듯이 들어서 내게 넘겼다. 빨리 씻으라는 말에 급하게 벗느라 까먹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양말을 다시 뒤집어 빨래바구니 안에 넣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아들이 한마디 한다.
“아, 아빠. 거기 내 옷 있는데.”
뭐 어쩌라는 걸까.
저녁식사는 없다. 오늘도 야근으로 늦어서 식사는 회사에서 먹고 왔다. 사내식당의 초라한 밥이 내 저녁이다.
아침은 먹지 않는다. 회사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야 하므로 먹을 시간이 없다.
내가 쉬는 날은 피곤한 아내를 위해 외식하거나 평일에 요리하느라 지친 아내를 위해 내가 요리한다.
내가 먼저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 서로를 위해 아내와 ‘상의’한 결과에 의한 거다.
아내가 해준 밥을 먹어본 게 언제였을까.
한 달 후에 있을 회사 일정은 기억나는데 이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목이 늘어나 헐거워진 츄리닝을 입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제 사둔 맥주가 구석 깊숙한 곳에서 나를 반겨준다.
짜릿하게 차가운 맥주 캔을 집고 지난번에 먹다 남긴 마른안주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내에게 물어보자 입이 심심해 자기가 먹었다고 한다.
거실에 조용히 앉아 맥주 캔을 땄다. 피식하고 김새는 소리가 벌써 목이 시원해진다.
입으로 가져가는데 실수로 손이 미끄러졌다. 같은 소파에 앉아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아들의 양말이 맥주로 젖어버렸다. 아들 녀석은 ‘아 존나 짜증나’라고 화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춘기니까 이해해 줘야지.
뉴스라도 보고 싶은데 드라마가 할 시간이라 TV는 아내가 보고 있다. 옆에서 같이 보고 있자니 드라마 내용이 참 말이 안 돼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웃었다가 아내가 째려봐서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
인터넷이라도 보면서 마셔야겠다.
드라마가 끝나자 아내는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조용히 뉴스로 채널을 돌렸지만 끝난 지 오래였다.
등을 소파에 축 기대고 눈을 감는다. 이 집 안에서 날 반겨주는 사람은 없구나.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다. 피곤하다. 자고 싶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가 어깨를 만지고 있다. 조그만 손으로 조몰락거리는 느낌이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딸아이가 와서 나에게 안마를 해주고 있었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작은 손으로 낑낑거리며 주물러봐야 뭉친 근육은 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간지러워서 기분이 좋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말을 꺼내고 보니 더 상냥하게 말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가 된다. 딸아이는 웃으며 자기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다시 돌아온 딸아이의 손엔 작은 선물상자가 있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아아. 오늘이 내 생일이었구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딸아이가 어서 풀어보라며 내게 재촉을 한다. 내 양복에 아주 잘 어울 법한 까만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
“아빠?”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거늘, 현실세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내 의식이 그 자리에서 튕겨져 나간다.
츄리닝 차림으로 넥타이를 맨 인간 모습의 내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딸바보가 된 걸 축하하네.”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꿈틀이를 꽉 끌어안았다. 꿈틀이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래! 넌 이제 내 딸이다!’
“그럼……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마음껏 부르렴! 그 전에…….’
나는 꿈틀이를 놔주었다. 일단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옷부터 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