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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 나무와 만난 후
고치가 된 꿈틀이는 멈추지 않고 마력을 순환하며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의식의 대부분을 몸을 변환하는 데 사용하고 있기에, 즐거웠던 지난날들은 꿈처럼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기억의 처음은 부드러운 느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쓰다듬어 주었다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가슴 한편에 이어진 따뜻한 느낌과 같아서 꿈틀이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 느낌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모습은 나무였으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련하고 행복해졌다.
이전의 삶은 기억나지 않았기에 애벌레로서 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꿈틀이는 그를 ‘주인’이라 불렀다. 그 단어가 자신과 나무의 관계에 제일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꿈틀이가 알고 있는 지식 중에 강아지를 키우는 방식이 지금 ‘주인’이 하는 방식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들은 꿈틀이의 영혼이 나무의 영혼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서 기인했기에 생겨난, 나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의 일부분에서 온 것이지만 꿈틀이가 거기까지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 역시 주인과 지내는 삶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은 그를 소중히 여겨주었다. 어루만져 주는 것에서 애정을 느꼈고 곁에 있으면 항상 관심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이는 그런 삶에 만족했고 영원히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이 잠든 밤이었다. 꿈틀이는 주인의 마음이 흘러 들어옴을 알아챘다. 연결된 영혼의 다리를 건너 잠에 빠진 주인의 ‘꿈’이 흘러들어 온 것이다.
꿈속에서 주인은 행복해 보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기쁠 땐 함께 웃고, 힘들 땐 함께 이겨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꿈틀이는 어쩐지 그 장면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보다 주인이 기뻐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꿈틀이는 본 적이 없었다.
나와 함께 있을 땐 이만큼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나도 주인님의 가족이 되고 싶다.’
그것이 꿈틀이가 본 꿈에 대한 감상이었다.
꿈은 짧았다.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고, 새파랗게 암울한 순간이 찾아왔다.
주인의 마음이 얼어붙고, 자책하고,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 몇 번이고 천장에 밧줄을 매다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이고 칼을 꺼내 망설이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끝에는 조용히 침대에 들어가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이 가져다주는 행복보다 그들을 잃으며 앗아간 행복이 더 커보였다.
꿈틀이는 그들을 탓하고 싶었다. 왜 주인만 남기고 떠나갔냐고. 왜 주인을 고통스럽게 하냐고. 하지만 꿈은 일방통행이었고 말할 대상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그리고 오한이 엄습했다. 나마저도 주인의 곁을 떠난다면 주인은 어떻게 될까.
떠나고 싶지 않다. 계속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애벌레에 불과하다. 일 년을 겨우 채워 살면 장수하는, 얼마 살지 못하는 애벌레에 불과하다.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꿈틀이는 깨어난 주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평소처럼 행동했다.
주인은 꿈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주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꿈틀이는 주인이 확실히 자신을 가족처럼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대로라면 꿈에서처럼 주인은 상처 입을 것이다.
강해진다!
나는 강해질 것이다! 죽지 않을 만큼, 주인의 삶이 다할 때까지 함께해 주겠어!
강해지고자 결심을 한 순간부터 꿈틀이는 몸집을 길렀다. 상세한 이유 따윈 알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주인이 주는 먹이가 마력이 농밀하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마력을 가질수록 더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주인이 많이 먹는다며 구박을 해도, 주인의 나뭇가지가 앙상한 몰골이 되어도 꿈틀이는 먹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앞으로 있을 시간에 대한 투자라고 여겼다. 그래도 역시 자꾸 구박받는 건 속이 상했다.
주인의 말을 꿈틀이는 들을 수 있지만 주인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어를 알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아니었다. 글자로 쓴 적도 있지만 주인은 땅바닥에 장난질을 한 줄 알았다.
나름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꿈틀이는 충격받았다.
마침내, 꿈틀이의 몸에 더 이상 마력이 들어갈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마력으로 신체의 내구도가 강화되어 터지진 않았지만 더는 마력을 흡수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새로운 육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주인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꿈틀이는 번데기로 변했다. 나중에 변한 모습을 보여줘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인간들은 이런 걸 ‘서프라이즈’라고 한다고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꿈틀이에게 꽤나 기대되는 일이었다.
번데기 안에서, 꿈틀이는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했다. 주인과 말할 수 있게 입이 생기게 해주세요. 주인을 지킬 수 있도록 마력을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는 강한 몸을 주세요. 주인과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꿈틀이의 소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력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작은 애벌레의 몸을 재구축했다.
처음엔 마력소나비의 모습으로, 그 다음은 작은 양서류의 모습으로, 그리고 작은 동물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어느 것도 지금 품고 있는 마력을 감당하기엔 나약한 육체였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진화는 계속 되었고 번데기 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길어졌다. 진화하는 종류는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다채로웠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변화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재 가진 마력에 가장 걸맞은 육체가 생성되었고, 마침내 번데기를 찢고 나올 시간이 다가왔다.
* * *
‘오옷!’
오늘도 숲을 둘러보던 도중, 갑작스레 번데기에서 도토리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요즘에 번데기 색이 옅어지는 기미가 보이더니 말라가고 있어서 걱정이 심했는데 드디어 꿈틀이가 깨어나나 보다.
‘과연……!’
무엇이 나올지, 인간이었다면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감에 꿈틀이가 어서 나오길 기다렸다.
번데기에 난 금은 조금씩 길어지며 세로로 반 쪼개듯이 양끝을 향해 나아갔다.
‘뭐가 됐든 환영한다. 그동안 얼마나 쓸쓸했다고.’
번데기가 대형견만 하니 나비도 대형견만 하겠지. 거대 나비든 거대 나방이든, 거대한 곤충이든 상관없어. 날 외롭게 한 죄로 하루 종일 놀아주마.
뭐가 나올지 몰라서 주기적으로 잎사귀를 뜯어서 모아뒀는데 이걸 보고 놀랐으면 좋겠다. 이른바 ‘서프라이즈’다.
완전히 양 끝으로 갈라진 번데기 안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 올랐다.
‘꿈틀…… 아?’
밝은 금발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기다란 귀 뒤로 부드럽게 나부꼈다. 앙증맞게 작은 몸집에 걸맞지 않은 큰 눈동자는 하늘색으로, 보석을 박아 넣은 것만 같았다.
그 큰 눈동자를 껌뻑거리며 자기 손을 쳐다보더니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그것이 신기했을까. 환하게 웃는 미소가 심장이 멈출 만큼 귀여웠다.
심장이 없어서 다행이다.
방긋 웃던 작은 소녀가 그 눈망울을 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설픈 발걸음으로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