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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 나무와 만나기까지(3)
영특한 까마귀는 하늘과 숲 사이에서 여유롭게 비행하며, 옛 주인의 죽음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주인의 죽음에 곡소리를 내며 슬퍼해 줄 만큼 그 둘의 관계는 친밀하지 않았고, 혈육의 정(情)으로 이어지지 않은 타인의 죽음을 신경 쓸 만큼 까마귀의 감성은 풍부하지 않았다.
대신 까마귀는, 원래의 야생에서 맛보지 못했던 감미로운 음식을 준 그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으로 그와 자신과의 관계의 송별회를 찍었다.
소환수로 쓰이는 동물들의 경우, 마력이 담긴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그 지능을 대폭 상향시키는 것이 기초이므로 까마귀의 지능은 현재 인간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높아져 있었다.
본래부터 까마귀라는 종은 개보다 똑똑한 새인 데다, 오웬의 까마귀는 특히 똑똑한 편이었기에 그의 소환수가 되면서 인간과 같은 수준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오웬이 알았더라도 지금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그런 높은 지능과 동물의 감이 합쳐져, 에리히가 마기에 물드는 것을 주인보다 먼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의 안전보다 자신의 생명이 중요했고, 까마귀는 에리히의 검이 먹이를 주던 주인의 오른손을 자르는 순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하늘 아래에서 까마귀의 눈은, 차갑게 바닥에 누워 있는 오웬에게 향해 있었다.
일설에서처럼 시체의 눈을 파먹거나 죽음을 좋아해서 전 주인의 시체 위를 맴도는 게 아니었다.
까마귀는 오웬을 죽인 스켈레톤이 사라지길 기다렸고, 영특하게도 사라진 뒤에도 시간을 들여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비행하며 머물고 있었다.
숲의 마기는 동물들을 끌어들인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일수록 마기에 유혹되기 쉬워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변에서 모여드는 동물들에 의해 숲은 마물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능이 조금이라도 뛰어난 짐승에겐 숲은 위험으로 가득 찬,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로밖에 느껴지지 않기에 까마귀의 직감은 숲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라고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다.
지능이 높아지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것은 인간의 선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더 나은 주거환경을 위해 숲을 개간하고, 더 나은 음식을 위해 가축을 기르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의료의 발전과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 진보를 위해 많은 희생이 따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탐욕’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는 목이 사라져 버린 시체 옆에 나뒹구는 가방 위로 쏜살같이 내려온 까마귀는 거기에 매달려 있던 주머니를 낚아채고는 다시 하늘 위로 날갯짓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주머니를 설마 놓칠세라 꽉 붙들어 매었다.
숲 위로 안전하게 날아오른 까마귀는 만족스럽게 숲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잡히기 전에 까마귀가 야생에서 먹어보지 못한 색다른 음식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만족하고 위험한 곳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까마귀는 생각했다. 인간의 말을 이해하기엔 그들과 오랜 시간을 지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몇 단어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령 ‘애벌레’라는 단어가 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먹이를 일컫는 말이고 ‘마력’이라는 단어가 이 애벌레의 맛을 높여주는 감미로운 조미료라는 사실을, 시체가 된 인간이 까마귀를 곁에 두고 입에 달고 살았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숲에 온 이유 중에 ‘마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음을 까마귀는 기억하고 있었다.
까마귀가 조금만 더 지능이 낮았더라면 돌아온 길을 따라 도망갔겠지만, 높아진 지능이 기억하고 있는 ‘마력’이라는 단어는 까마귀에게 맛있는 음식의 일종으로 기억되고 있기에 지금은 죽고 사라진 인간들이 향하던 방향으로 까마귀는 날아갔다. 어차피 하늘 위에 있으니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인간들이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는, 눈이 부셔 비행을 방해하던 노을빛이 사라진 밤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날아갔다.
숲은 몇 시간을 날았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꾸준히 마력을 지닌 애벌레를 먹어온 까마귀에게는 체력적으로 문제되는 일이 없었다.
날아가던 와중에, 까마귀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의 작은 뇌를 자극하던 ‘위험 경고’가 점차 옅어지고 있음을.
높은 상공은 바람이 심해 날아가는 데 체력 소모가 심했으므로 까마귀는 고도를 낮춰 숲 바로 위를 날았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위험으로 가득 찼던 숲은 평범한 숲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다.
이제 거의 다 다가왔다는 사실이 까마귀의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위험하다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의 숲과 다름이 없다.
까마귀는 달라진 숲의 분위기가, 인간들이 찾던 장소임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과연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먹이는 어떠한 것일까. 진하고 향긋한 과실일까. 아니면 환상적인 육즙을 가진 애벌레일까.
식욕에 마음을 뺏기고 안전해졌다고 착각한 순간, 숲에서 날아온 한줄기 검은 섬광이 까마귀의 날개를 꿰뚫었다.
검은 까마귀의 깃털이 그의 주변에 지푸라기처럼 흩날렸다.
꿰뚫린 날개로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날개를 퍼덕이는 까마귀의 발톱은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주머니를 붙들고 있었지만, 주머니의 까마귀 발톱이 박혀 있던 부분이 벌어져 찢어지며 애벌레 한 마리가 숲으로 떨어졌다.
정신없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느낀 까마귀도 그것을 보았지만, 그 뒤에 한 마리의 검은 뱀이 주머니째로 까마귀를 삼켜 버렸고 숲으로 들어온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여행은 끝이 났다.
* * *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애벌레는 숲으로 떨어지기 직전, 갑작스레 불어온 강풍에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애벌레, 품종 마력소나비의 유충으로서 마력 흡수율이 좋다.
마력석을 갈아 땅에 뿌려 거기서 자라난 나무의 잎사귀를 먹여 기른 뒤 소환수에게 다시 그 애벌레를 먹이는 식으로 마력을 보충해 주는, 말하자면 먹이사슬의 하층에 깔린 꽤나 기구한 운명의 벌레이다.
현재는 개량을 거듭한 끝에 사육이 편리하지만 마력이 깃든 음식 외엔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인간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력 때문에 기르는 거니까.
어쨌든 이 불쌍한 애벌레는 아까 빠진 까마귀의 깃털과 함께 바람결에 실려 먼 곳으로 날아갔다.
그곳은 까마귀가, 그리고 오웬과 에리히가 가고자 했던 목적지 근처였다.
그대로 떨어졌다면 살이 잘 오른 이 통통한 애벌레는 터져 곤죽이 되었겠지만 하늘이 굽어 살피시는지 나뭇잎들에 몇 번이고 부딪히고 최종적으로 떨어진 곳이 나뭇잎 더미라 상처 없이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다만 나뭇잎 더미는 꽤나 크고 깊어서 위쪽까지 올라오는데 하룻밤이 지나 버렸다.
애초에 평범한 애벌레였다면 처음 깔린 더미 아래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 애벌레는 마력소나비의 유충.
자연 상태에선 그 먹이를 찾는 게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기 때문에 곧 죽을 운명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애벌레에겐 이 상황을 만들어준 까마귀만큼의 지능이 없기에 그저 본능에 따라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여기서 애벌레의 삶은 끝났다라고 단언해도 문제없었다.
그러나 애벌레가 도착한 땅엔 한 그루의 세계수가 있었다.
십수 년 전부터 엘퀴라즈 숲 위를 날아다니던 새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비록 세계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먼 길을 여행하는 철새들에게 그곳은 3일을 날아야 벗어날 수 있는 엘퀴라즈 숲의 유일한 쉼터였다.
그날도 한 떼의 새무리가 그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눈이 좋은 새 한 마리가 애벌레를 발견하고 내려왔다.
새는 간식을 먹는 기분으로 애벌레를 쪼아댔다. 애벌레는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몸통이 터져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애벌레는 운이 좋았다.
세계수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새는 자신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방해받았지만 그것은 애벌레의 저항만큼이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눈앞에서 애벌레가 공중에 뜨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새는 애벌레가 사라진 곳에서 두리번거리며 사냥감을 쫓다가 이내 동료들에게 날아가 버렸다.
보통의 세계수는 백 년이 지나야 어린아이 정도의 자아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 특별한 세계수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아주 유니크한 세계수였다.
동시에 천사들의 작은 호의로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조합된 전례 없는 세계수는 애벌레의 상태를 보고 치료하고자 마음먹었다.
자아가 있다고 해도 태어난 지 십수 년밖에 되지 않은 미숙한 세계수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고, 애벌레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치료하고자 계속해서 시도하는 일은 애벌레에게 마력을 불어넣은 일에 지나지 않았고, 그건 치료와는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게다가 세계수가 그 행동을 하던 도중 애벌레는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그저 몸에 퍼져 있는 신경절이 죽지 않아 반사적으로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두고 세계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관론자가 본다면 쓸데없는 고생이라며 비웃을 행동이었다.
쓸데없는 노력 덕분이었을까. 세계수는 본래 성체가 되어야 발휘할 수 있는, 아니 성체가 되었어도 충분히 자아가 성숙한 존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세계수만이 쓸 수 있는 힘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다.
세계수라는 존재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 마력에 친숙하다.
인간의 마법사나 마족의 전사들보다,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자신만의 던전에서 생활하는 고룡을 아득히 뛰어넘는 마력에 대한 본능적인 이해.
그로 인해 세계수에게 마력이란 손발과 같이 자유로운 육체의 연장선상이었고 그 말은 마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인간들이 부르는 기적이라 할지라도.
세계수의 간절하고 반복되는 바람과, 이 작은 생명을 치료하고자 수 시간을 지속한 집중력이 마력을 다루는 세계수로서의 재능을 일깨웠고 죽은 애벌레를 되살리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린 세계수에겐 고된 일이었고 곧 정신을 잃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세계수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영혼에 금이 가 있었고 지금까지 나무로서 경험할 수 없는 잠이라는 행동으로 치유되고 있었음을.
영혼이 치유되는 와중에 부스러기와 같은 영혼의 찌꺼기가 생겨났음을.
그리고 애벌레를 되살리는 와중에 그 찌꺼기가 기적에 섞여 들어갔음을.
기적의 힘에 의해 그 찌꺼기가 작지만 하나의 완전한 영혼이 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