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2화 (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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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별은 불청객처럼 갑작스러운 것(2)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내 시야는 늘어나 이제 거리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다.

시야의 끝과 끝 사이에 나무를 수천 그루를 줄지어 세워놔도 될 만큼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숲 안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큰 숲일까? 빈약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여기가 인간의 손이 닿기 힘든 미개척지라고 결론 내렸다.

인간의 뼈를 발견했으니 어딘가에 인간이 살고 있다는 뜻이니 그들이 사는 마을과 나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내 작은 호기심이 사람을 보고 싶어 하지만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나 따위는 며칠 밤을 따뜻하게 해줄 땔감에 지나지 않겠지. 두 번째 삶을 그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시야가 넓어져, 새로운 생물들을 발견했다.

내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계속 반복된다. 눈을 뜨고, 고치를 보고, 숲을 본다. 넓어진 시야로, 가끔씩 다가오는 새와 짐승을 내쫓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내가 있는 곳은 짐승들에게 불가침영역으로 인식됐는지 다가오는 녀석들이 사라졌다.

짐승들은 신기한 생물들이 많았다. 검은 털은 가진 여우와, 팔을 휘둘러 나무를 수수깡처럼 부러뜨리는 거대한 흑색 곰, 그런 곰조차 한입에 삼킬 만큼 거대한 검은색 뱀.

짐승들의 덩치는 인간 이상으로 거대하다. 그리고 흉폭하다. 다른 생물과 만나는 즉시 힘의 차이는 생각하지 않고 싸운다.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없다.

평범한 짐승은 없고 전부 이런 부류의 검은색 일색이다. 유일하게 검지 않은 종류는 새들뿐. 하지만 새들은 이 숲에 머물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와, 가끔 먹이를 주워 먹곤 다시 떠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바위틈에서 이상한 기운을 발견했다. 마력처럼 눈으로 보이지 않고 느껴지는, 무형의 기운이었다.

나는 그것이 검고 끈적끈적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관찰하고 있는 사이, 새 한 마리가 그 근처에 내려왔다.

검은 기운은 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새는 눈치채지 못하고 가만히 털을 고른다. 구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검은 기운이 무엇을 할지가 더 궁금했다.

자기 운명을 알지 못한 새는 털 관리에 힘썼고, 그런 새를 검은 기운을 덮쳤다. 검은 기운이 새를 완전히 감쌌지만 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항하지 않는다.

그 검은색 기운은 새를 잡아먹는 게 아니었다.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 듯 그대로 새의 몸에 스며들었다. 새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새들이 위에서 울부짖는다. 나는 그것이 동료를 걱정하는 비명 소리로 들렸다.

다른 새들의 지저귐에 털갈이를 하던 새가 눈치를 채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것은 헛된 날갯짓으로 끝나 바닥으로 추락한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새의 깃털이 삭은 나무처럼 바스라진다.

새는 고통으로 울부짖는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위에서 지켜보던 다른 새들이 하늘로 날아간다.

버림받은 것이다.

“키에엑!”

오븐에 넣은 빵이 부풀듯이 새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팝콘을 튀기듯 끊임없이 들린다.

피부가 검게 변색되며, 그것과 같은 검은색의 깃털이 자라난다.

흉폭했던 숲의 짐승들은 저 검은 기운 때문이었나.

완전히 변이를 끝낸 이름 모를 새는, 자신의 폭력성을 이기지 못하고 주변의 나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부리에 물린 나무가 허리부터 잘려 나가고, 그 발톱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아스러졌다.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고, 괴물로 변한 새 역시 먼 곳으로 이동하려 하기에 건드리지 않아도 됐지만, 정신 깊숙한 구석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것은 검은 짐승들을, 그리고 검은 기운을 보는 순간 확실하게 내게 한 가지 의지를 새겨주었다.

저 녀석들을 없애라. 라고.

그들은 위협적이다. 언젠간 나와 꿈틀이에게 해를 가할 예비 위험분자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그것들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외견이나, 안전의 위협으로 느끼는 혐오감이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인, 생리적 혐오감이었다.

마력으로 이동하는 괴물의 움직임을 멈춘다. 괴물의 저항이 거셌지만 강하게 짓누르자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괴물에게 힘을 쏟아 부었다. 그 힘은 괴물의 몸에 스며들어 내부에 퍼져 있는 검은 기운을 휘감았다.

검은 기운이 내 힘에 저항한다. 억누르자. 저항하지 못하게 더 강한 힘으로 조여 버린다.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를 토해낸다. 미안하지만 봐줄 생각은 없다. 어째서? 나도 모르겠다. 검은 기운을 없애야 한다. 그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마침내 검은 기운이 모래처럼 아스라졌다.

부서진 검은 기운은 그대로 괴물의 체내에서 사라진다. 나는 괴물을 짓누르던 힘을 거두었다.

괴물이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진 괴물이 작아지더니 원래의 작은 새로 돌아왔다. 가슴이 미약하게 움직인다. 아직 살아 있다.

시간이 지나자 새는 정신을 차리고선 하늘로 날아간다. 동료들의 품으로 무사히 떠나길 빌어주었다.

새의 몸에 스며든 검은 기운을 없앤 후로 내 일과에 한 가지 일이 더 추가되었다. 검은 짐승을 발견하는 즉시 새에게 했던 것처럼 검은 기운을 없애는 일이다.

검은 짐승들은 내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전부 검은 기운을 제거당했다. 몇몇은 새처럼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지만 몇몇은 몸이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 부류의 짐승들은 검은 기운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였고 다른 짐승들보다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 외에도 짐승에게 스며든 기운뿐만 아니라 그늘진 곳이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검은 기운들까지 사냥했다. 동물의 몸속에 침입하지 않은 검은 기운은 쉽게 없앨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은 내게 꽤나 즐거웠다. 원래대로 돌아온 짐승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숲이 한층 더 아름답게 보였다. 가끔씩 꿈틀이의 고치가 움직여서 곧 있으면 깨어나겠구나 하는 희망도 보였다.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 최근 들어 잠에 저항해서 깨어 있는 시간이 늘었다. 뭔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진 느낌이라 잠에 저항해 봤더니 성공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자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딱히 일어나 있어도 할 일은 없기에 자주 거스르진 않는다.

잠을 억지로 참고 밤하늘을 보았다. 꽤나 멀리까지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달과 별까지 시야는 닿지 않았다. 하긴, 거기까지 닿는다면, 이 세상을 몇 바퀴는 돌 만큼 시야가 넓어져야겠지.

대신에 나는, 어느 비가 온 다음 날 저녁에 편법을 사용해서 마침내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비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구름에 가려진 달은 전생에서처럼 노랗고 둥근 달이었다. 총총 빛나는 별빛도 전생과 같았다. 하지만 밤하늘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이것 또한 즐거웠다.

꿈틀이와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더니 고치가 부들부들 떨었다. 최근 들어 움직임이 늘어난걸 보니 깨어날 때가 다 된 걸까.

꿈틀이가 고치를 뚫고 나왔을 때, 놀라지 않게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요즘 내가 재미 들린 일 중에 하나다.

아직 뜯지 않은 선물 상자의 물건을 상상하는 아이의 마음이 이럴까? 설렘으로 부푼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평범한 나비나 나방이 아닐 거라는 것이다.

이것도 얼마 전에 깨달은 거지만 내가 만난 생명체들은, 나를 포함해 몸 안에 마력을 가지고 있다.

나무 근처에서 자라나는 잡초부터 시작해서, 나무, 새와 곰, 여우와 같은 짐승들, 갓 떨어져 싱싱한 나뭇잎까지 마력이 없는 생명체가 없다. 그저 마력을 많이 담고 있느냐와 적게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뿐이다.

마력이 생명체에 어떤 활동을 일으키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 양이 많다고 생각한다.

풀이나 나무와 같은 식물들은 미약한 마력만을 가지고 있으며 짐승들은 그 수십 배나 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나도 식물인데 나는 식물이 가진 마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짐승들보다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다. ‘많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겸손을 넘어 재수 없게 들릴 정도로, 이 숲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의 마력을 한데 모은 것보다 더 많은 마력이 내게서 느껴진다.

기쁘기보다는 어째 좀 무섭다.

잠시 딴 길로 새나갔지만 이와 같은 마력 측정으로 보면 고치 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굉장했다.

마치 폭탄처럼 마력을 꾹 눌러 담은 듯한 느낌이다. 요리용 육수에 다시마와 멸치를 수천 번 넣고 끓어 농밀하다 못해 걸쭉한 국물의 느낌이랄까. 설마 액체형으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슬라임 같은 걸로…….

그건 그거 나름대로 귀엽기는 하겠네.

마력이란 이 세계의 생명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이후로 꿈틀이에게 가끔씩 마력을 불어넣어 준다.

마력에도 차이가 있어 검은 기운 같이 질척한 녀석, 동물들의 경우 활발한 아이 같은 느낌, 식물의 경우 딱딱한 느낌, 그리고 나의 환한 빛과 같은 느낌이 있는데 꿈틀이는 곤충임에도 나와 같은 느낌이 들어 마력을 흘려보니 넙죽넙죽 받아 들였다.

항상 내 잎사귀만 먹어서 나와 같은 마력을 띈 게 아닌가 싶다.

마력을 넣어줄 때마다 고치가 약간 흔들리듯 움직여서 기분이 좋다. 과연 언제쯤 깨어날까. 그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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