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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작은 변화의 즐거움(4)
꿈틀이가 온 후로 잠드는 시간이 짧아졌지만 그로 인해 나는 계절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꿈틀이가 없었다면 이런 것들도 보지 못하고 계속 잠만 잤을지도 몰랐기에 다시 한 번 꿈틀이와의 만남을 하늘에 감사드렸다.
꿈틀이도 그동안 많이 커져서 성인 팔뚝만 한 사이즈로 자라났다. 얼핏 보면 징그럽긴 하지만 그래도 하는 짓을 보면 귀엽다.
……너 번데기는 안 되는 거냐.
“-피잇!”
꿈틀이의 변화는 크기만 변한 것이 아니다. 입으로 실을 내뿜어 목표를 명중시키는 신기한 재주도 생겨났다.
지금 꿈틀이는 멀리 떨어진 돌멩이를 실로 맞춘 후, 입을 오물거리며 실을 다시 먹어 맞춘 목표를 끌어들인다.
이 모습은 의외로 거부감이 든다. 그냥 보기만 하면 괜찮은데, 나무로 살면서 늘어난 쓸데없는 상상력이 이상한 생각을 해버린다.
실을 입으로 뿜었는데, 사람으로 따지자면 토한 거잖아. 그걸 다시 먹는다니.
전생에 이런 장르의 포르노가 있었는데……. 난 그쪽은 별로였다.
인간의 잣대로 보지 말자. 꿈틀이는 애벌레다. 인간의 사고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그치만 하지 말라고 하면 자꾸 생각난단 말이지.
“피-피.”
꿈틀이가 높은 하이톤의 울음소리로 내게 자기가 잡은 돌멩이를 가져다준다.
이거 뭐 어떻게 하라는 걸까. 일단 잘했다고 쓰다듬어 준다. 좋아하니 다행이군.
요즘 잠이 짧아졌음을 느끼고 꽤나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마력을 조종하는 힘을 연습하거나, 꿈틀이랑 놀아주거나, 꿈틀이를 쓰다듬어주거나, 꿈틀이한테 개처럼 막대기를 물어오라고 시키거나, 꿈틀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흠. 이거 좀 위험한데. 조금 거리감을 둬야겠어.
“-피?”
……취소. 이성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난 나무라고! 꿈틀이랑 노는 거 말곤 할 게 없단 말이야!
그래도 오늘은 꽤나 기념적인 날이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
빗방울은 꽤나 굵어서 내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세찼다. 장대비인 것이다.
꿈틀이가 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도 비를 피하기 위해 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불러들였다. 빗줄기가 강해서 왠지 꿈틀이가 맞으면 내출혈을 일으킬까 걱정이 됐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거 꽤나 아프다. 내 나뭇잎도 몇 개 떨어졌다고.
이제 겨우 2미터까지 자란 내 몸으로 완벽하게 꿈틀이를 지켜줄 수 없었기에 나는 마력을 조종하는 수련도 할 겸 꿈틀이를 비로부터 지켜주었다.
주변에 물이 많으니 이미지로 만들기 쉬웠고 내 위엔 내가 만든 원반형의 물웅덩이가 우산처럼 나와 꿈틀이를 지켜주었다.
처음엔 내가 가진 반투명한 방어막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그건 생물에게만 통하는 듯 비는 막을 수 없었다. 이거 의외로 쓸모없다.
“피- 피- 피피- 피.”
너 지금 노래 부르니?
깜짝 놀랐다. 말을 잘 따른다거나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애벌레로서 놀라운 행동이었는데 노래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꿈틀이는 지능이 높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범한 애벌레가 아닐지도.
‘으흠흠~ 흠흠~ 으흠~.’
나도 같이 흥이 겨워 콧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딱히 없다. 그냥 흥에 따라 저절로 흘러나온다.
꿈틀이도 내 흥에 맞춰 같이 노래를 부른다. 멋진 듀오라고 생각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BGM이 되어 우리들의 노래를 받쳐준다. 하나의 멋진 노래가 완성되었다. 제목은 ‘비 내리는 숲’ 이거 꽤나 즐거운걸.
빗방울은 서서히 가늘어지더니 갑자기 내릴 때처럼 갑자기 멈춰 버렸다. 흐리던 하늘이 개었는지 햇살이 바닥에 고인 물에 부딪쳐 깨진다. 눈이 있었다면 눈이 부셔서 눈썹을 찌푸렸을 것이다.
“피이.”
꿈틀이가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벌레는 물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평범한 애벌레가 아니다.
웅덩이 안에서 몸을 굴린다. 고개를 처박고 물을 마시더니 나를 향해 물총처럼 쏘아낸다. 이 자식. 도전하는 거냐. 좋아.
우산처럼 펼쳐둔 물의 원반을 꿈틀이 위로 옮긴 뒤 해제했다. 물이 콰르륵 하고 쏟아져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다면 이렇게 물이 쏟아져 내릴까.
물론 그대로 꿈틀이를 덮쳤다간 쥐포처럼 납작해 질까봐 꿈틀이 근처에 작은 물의 방어막을 만들어두었다.
쏟아져 내린 물이 옆으로 퍼지자 꿈틀이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난이 조금 심했네.
“-피이이이…….”
꿈틀이가 나한테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사과의 표시인 듯하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데. 꿈틀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꿈틀이는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비벼댔다. 사과를 받아준 건가.
‘그래. 그만해. 나도 장난이었어. 내가 잘못했다니까.’
이 귀여운 녀석.
내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는 꿈틀이는 추운지 몸을 떨었다. 비가 와서 온도가 낮아졌고, 꿈틀이는 털이 없고 피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추위에 약한 것이다.
나는 따뜻한 햇볕을 상상하며 꿈틀이를 감싸주었다. 꿈틀이는 따뜻한지 노곤한 몸을 축 펴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든 꿈틀이를 뒤로한 채, 나는 의식의 한계까지 주변을 관찰하였다.
마력 조작을 연습한 후로 시야도 늘어나 지금은 거의 100미터 가까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감각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 평상시엔 억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위 내에 있는 잡초부터 땅을 이루고 있는 흙 알갱이 하나, 다른 나무들의 나뭇잎 하나하나부터 물이 흘러간 자국 같은 나무껍질까지 전부 보여서 혼란스러웠다.
하나씩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내가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눈 두 개로 보던 시절의 습관이 배어 있어서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도 빨리 익숙해져야겠지. 이렇게 넓은 범위를 한꺼번에 관찰할 수 있다는 건 꽤나 편리하다. 예를 들면…….
‘새.’
약 오십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 한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다. 검붉은 깃털을 부리로 단정하며 총총걸음으로 걸어오는 새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생각된다.
처음 보는 새이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나뭇잎 아래를 뒤지는 걸 보니 필시 노리는 먹이는 애벌레이다.
『우리 애 눈에 안 띄게 딴 데 가서 놀아라.』
이 까마귀 비스 무리한 새는 내가 말을 걸자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다가 하늘로 날아올라 내 범위 밖까지 사라졌다.
이 능력 역시 마력 조작에 익숙해 진 후로 손에 넣은 능력으로서 꿈틀이와 대화를 꾸준히 시도하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력이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나로서도 희미하리만치 적은 마력이지만, 내게서 그 가느다란 마력이 흘러가 꿈틀이에게 닿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 마력의 끈을 통해서, 마치 실전화기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듯 상대에게 내 의지를 전달한다. 그것이 내가 대화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방금 새를 쫓아낸 것과 같이, 마력의 강도를 진하게 늘리면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내 의지를 강제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새에게 밖에 시험해 보지 못해서 아직은 가설이다. 꿈틀이는 너무 말을 잘 들어서 모르겠고, 새는 너무 겁이 많아서 꿈틀이에게 말을 걸 때만큼이나 마력을 낮춰도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 건에 대해선 언젠가 산짐승이 나오면 시험해 봐야겠다.
‘평화롭네.’
전보다 먼 곳을 볼 수 있게 되면서 신기한 것들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뼈 무더기라거나, 나무들에 새겨진 이상한 상흔(傷痕)들이다.
뼈들은 대부분이 동물이 죽은 것으로 보였지만 그중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도 많이 있었다. 그것들이 내게 이곳은 전쟁터이거나 인간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위험한 곳이라고 말해준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입고 있는 옷들이 넝마가 되었거나 삭아서 사라졌지만, 어떤 뼈들은 갑옷을 입거나 칼을 곁에 두고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시점에서 역시 이 세계는 판타지 세계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
괴상한 상흔들은 그렇다면 마물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낸 걸까. 발톱으로 할퀸 상처와 그 깊이와 지름이 말뚝과도 같은 물린 흔적, 검으로 벤 듯 반듯한 상흔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이런 상처를 낸 녀석들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 다행히 내가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선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좀 더 늘려보고 싶은데.’
나의 시야 범위는 마음만 먹으면 늘릴 수 있다.
잠이 들 때마다 늘어난 범위는 꿈틀이를 만나기 전에 50미터까지 늘어났었다. 대략적으로 한 번 잠들 때마다 30에서 40센티미터씩 늘어나는 것 같았는데, 마력조작을 익히고 난 뒤에는, 마력을 흡수하면 깊은 잠에 빠지게 되고 깨어나 보면 센티미터가 아니라 수십 미터나 범위가 늘어나 있었다.
다만, 한 번 그랬다가 오래 잠드는 바람에 꿈틀이가 내 밑에서 배가 등가죽에 붙을 때까지 굶고 있어서 지금은 시도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도 안 믿겼는데, 진짜로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있었다.
애벌렌데…… 내장은 어디로 가고…….
판타지 세계의 생물은 참 신기하다.
그날 이후로 조금 걱정이 된다. 내 나뭇잎이 아니면 이 녀석은 먹지 않는다.
다른 나뭇잎을 먹어보라고 말했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한테 몸을 기댔다. 오로지 내 나뭇잎만이 이 녀석의 식사다. 내가 말리지 않아도 활동 범위도 내 주변에 한정돼있다. 완전 니트가 따로 없다.
언젠간 번데기가 되어 나비일지 나방일지, 그것도 아니면 판타지 세계만의 뭔가의 곤충으로 우화하겠지만 이래서야 내 곁을 떠나기나 할까.
곁에 있어준다면 그거대로 좋긴 한데 성충이 되면 나뭇잎이 아니라 다른 걸 먹지 않을까.
내가 줄 수 있는 건 나뭇잎뿐이다. 꿀은 줄 수 없다고. 좀 더 자라나면 모를까.
나 근데 꽃도 필까? 암나무인지 수나무인지 알 수가 없네. 보통 나무는 자웅동체라고 하던데. 나도 설마? 아니야. 은행나무처럼 자웅이체도 있잖아.
흠. 신경 쓰지 말자. 나무에 성별이 상관이나 있을라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 안에만 있는 자식 놈을 보는 부모의 기분이 이럴까. 심히 걱정된다.
내 부모님도 살아계셨으면 날 보고 이런 기분이었을까.
우울할 땐 자는 게 최곤데.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