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8화 (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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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작은 변화의 즐거움(2)

오늘도 눈을 뜨고 요상한 힘으로 나뭇잎을 뒤적거리며 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에 나는 그쪽으로 정신을 옮겼다.

그 소리는 다른 쪽에 있는 나뭇잎 더미 안에서 나는 소리였고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애벌레?’

여기서 애벌레란 송충이 같은 징그러운 녀석이 아니다. 털이 북슬북슬한 그런 녀석은 귀엽지 않다고. 하지만 이 애벌레는 달랐다.

‘귀엽네.’

초록색 몸체를 가진 애벌레는 초코바 크기로 송충이보다 훨씬 컸지만 전생의 만화캐릭터를 닮은 외모가 매우 귀엽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애벌레였다.

주름진 마디에 발바닥이 빨판처럼 꼼지락 거리는 녀석은 눈처럼 생긴 무늬가 아주 커서 내게 순정만화 그림체를 떠올리게 했다.

‘캐×피 닮았다. 이런 애벌레가 진짜로 있구나.’

캐×피의 모델이 배추나비의 애벌레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배추나비 애벌레로군. 근데 여긴 배추밭이 없는데. 배추벌레라고 배추밭에만 나오는 건 아닌가?

하지만 이런 녀석을 발견하다니. 심장이라도 있었으면 지금 흥분으로 터질 듯이 뛰었을 것이다. 난 나무라 심장이 없어서 안 뛰지만.

‘뿔이 없네.’

캐×피의 상징인 노란 뿔이 없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귀여워!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툭툭 건드리며 먹이를 찾아 움직였다.

내게 손이 있다면 나뭇잎이라도 따다 줄 텐데. 아쉽다.

이 녀석은 염동력과 다른 의미로 내게 즐거움을 준다. 염동력이 내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면, 이 애벌레는 내가 환생한 이후로 처음 보는 움직이는 생명체인 것이다. 모두가 멈춰 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녀석.

흑백으로 새카만 사진 속에서 이 녀석만이 화려한 색을 가지고 내게 다가온 것이다.

‘아앗!’

그러나 내 즐거운 시간도 잠시,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애벌레를 부리로 쪼기 시작했다.

‘새’라는 또 다른 컬러사진을 발견한 것은 즐겁지만, 첫 만남인 애벌레를 먹으려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첫 만남이란 가치가 큰 것이다.

‘안 돼. 죽이지 마.’

애벌레는 몸을 굴려 필사적으로 새에게서 도망치려고 애썼지만 새의 공격은 집요했고 곧 옆구리가 터져 녹색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두면 필시 새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간신히 발견한 내 삶의 변화가, 새 한 마리에 의해 깨진다. 그런 것은 싫다.

제발, 죽이지 말아줘. 그 녀석 말고 먹을 건 많잖아. 송충이를 잡아먹으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으로, 나는 새를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새는 나뭇잎 따위와 다르게 전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힘이 약하다는 게 이토록 분한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으로 새에게서 애벌레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놀던 작은 돌멩이를 들어 새에게 날려보지만 그것은 너무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버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 공기를 뭉친다는 생각으로, 힘을 억눌러 작은 방울이라고 이미지화한 뒤, 집중해서 새에게 쏘아 내보았다.

새가 뭔가에 부딪히더니 ‘팡’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뒤로 젖힌다. 하지만 그리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애벌레를 먹지 못하게 방해만 하면 된다. 포기할 때까지 계속 해보자.

‘그래. 그대로 물러나. 애벌레를 괴롭히지 마.’

하지만 새 역시 배가 고픈지 필사적으로 애벌레를 먹으려 들었다. 새가 부리로 애벌레를 집을 때마다 나는 계속해서 새를 공격했고 새는 그 때마다 번번이 애벌레를 놓쳤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어.’

식탐이 많아서인지, 집념이 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새는 포기할 줄 몰랐고 애벌레가 구르면 구를수록 터진 체액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러다간 새가 포기하기 전에 애벌레가 죽는다.

‘우선 애벌레를 내 쪽으로!’

애벌레를 들어서 내 쪽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연습하던 돌멩이보다 무거워서 강하게 집중했다. 애벌레는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공중에 살짝 떠서 내 쪽으로 옮겨졌다. 새는 이 이상한 현상에 내 쪽을 몇 번 쳐다보더니 공중으로 날아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죽을 거 같아.’

애벌레의 상처는 심각했다. 포동포동한 몸에 부리로 쪼여 구멍이 뚫려, 그곳으로 체액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라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손대고 싶지 않을 모습이었다.

‘상처가 나았으면 좋겠는데……. 역시 무리겠지.’

하지만 나는 바라는 것만으로도 새를 쫓고 애벌레를 집어 들 수 있는 힘이 있다. 어쩌면 이 상처도 낫게 해줄 지도 모른다.

나는 이 힘을 얻었을 때, 단순한 염동력이 아니라 다른 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내가 다른 물건을 옮기고자 하기에 염동력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형태로 힘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가설을 아무리 세워봐야 실행하는 것만 못하다. 나는 당장에 애벌레를 보며 정신을 집중하였다.

‘나아라. 죽지 마. 제발 나아줘.’

애벌레는 반응이 없다. 이제 머리 부분만 꿈틀거리고 있을 뿐, 상처는 그대로이다.

‘나아라. 회복해라. 나아라. 나아라. 나아라. 나아라.’

계속해서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애벌레에만 집중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 풍경이 어두워진다. 나와 애벌레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경 쓸 시간은 없다. 계속 바란다. 애벌레가 낫기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젠 내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것만 보인다.

애벌레는, 힘이 다해 이젠 자그만 턱만 간신히 양옆으로 벌렸다가 오므린다. 좀 더 집중해. 좀 더. 상처에만. 상처만. 상처.

내겐 이제 애벌레의 상처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계속 나는 집중한다. 이 상처가 낫기를. 더 이상 체액이 흘러나오지 않기를. 처음 본 그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빛…….’

흰색의 섬광과 같은, 작은 빛이 상처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뚜껑을 덮듯 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막았다. 그 빛은 애벌레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더 강하게, 더 집중해서, 애벌레가 낫기를 기도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애벌레의 상처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애벌레는 아직 몸을 못 움직이는지 조그맣게 꿈틀거렸지만 턱만 움직일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지는 않고 누더기를 기운 듯 흉측했지만 더 이상 체액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됐다……. 밤…… 인가…….’

주변이 어둡다. 은은한 달빛이 비춰지는 게 느껴진다. 처음이다. 밤까지 깨어 있는 건.

긴장의 끈을 놓자 피곤한 나머지 수마(睡魔)가 쏟아진다. 이대로 잠들면 어쩐지 한참 뒤에 깨어날 것 같다.

나는 수마를 이길 수 없다. 그저 이번에도, 애벌레를 치료한 것처럼 빌었다.

최대한 빨리 깨어나기를.

* * *

나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한낮의 태양빛 아래에서 눈을 떴다.

시간은 오래 지나지 않았다. 애벌레가 내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애벌레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내가 처음 놔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살아났구나.’

나는 상처가 아문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 부분은 애벌레의 배 부분으로 빨판 같은 다리가 붙어 있던 곳이었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 부분에 있던 다리는 다시 돋아나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이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리라.

‘흠. 어쩌지.’

이대로 놔두면 애벌레는 굶어죽을 것이다. 다른 나무 근처에 데려다 줘봐야 나무를 탈 수 없으니 죽을 것이다.

염동력으로 애벌레를 들어 다른 가지에 올려줄까 해봤지만 다리가 반 이상 없는 녀석이니 금방 떨어져 죽을 것이다.

이 녀석 생각보다 무게가 있으니까 계란 터지듯이 터져 죽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자 먹어. 밥이야. 먹고 기운차려야지.’

근처에 있는 나뭇잎을 가져다 입 앞에 놔뒀다. 애벌레는 꿈틀거리며 나뭇잎에 입을 가져다 댔지만 먹지 않았다. 입맛이 없나.

좀 더 싱싱한 나뭇잎을 찾아 눈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아니라……. 아직 떨어지지 않은 싱싱한 이파리.

‘미안합니다. 하나만 가져갈게요.’

다른 나무에게 사과하고 이파리 하나를 뜯어서 애벌레에게 가져다줬다.

아까보다 반응을 보였지만 이번에도 먹진 않았다. 이 자식. 입이 고급인거냐.

확실히 싱싱한 이파리에 반응을 보인 걸 보니 입맛이 없는 건 아닌데. 이것보다 더 싱싱한 이파리가 필요한가.

더 싱싱한…… 애벌레가 좋아할 만한 부드럽고 맛있을, 어린 새싹 같은. 이파리가…….

‘……내 이파리……. 꽤 맛있어 보이네.’

자고로 녹색채소는 색이 연할수록 부드럽고 영양분이 많다고 했다. 내가 맺은 나뭇잎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색이 연하고 부드러웠다.

어쩌면 이거라면 상처로 피폐해진 애벌레도 맛있게 먹을지도 모른다.

‘으으. 이거 뜯으면 아플 거 같은데.’

참고로 내 나뭇잎은 바람이 불어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튼실하게 가지에 붙어 있어서 지금까지 나뭇잎이 뜯기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모른다.

언젠간 뜯어지는 일이 생길 거라고 미리 각오는 해두고 있었지만 내 손으로 뜯어야 한다니. 전생에서도 해본 적 없는 자해를 나무가 돼서 할 줄이야.

‘후우. 후우. 간다.’

염동력으로 내 나뭇잎을 하나 뜯었다. 찌릿한 고통이 나뭇가지를 타고 내게 전해진다. 고통의 감도는…… 새끼발가락을 문등에 찧었을 때만큼이나 강렬하다.

한마디로 아프다.

‘크흑. 다른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런 고통을 겪는단 말인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래도 고통은 지속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주 잠깐의 고통을 뒤로 하고 나뭇잎을 애벌레의 앞에 놔둔다.

제발 먹어라. 애벌레가 움직인다. 냄새라도 맡는 듯 나의 연두색 나뭇잎에 얼굴을 비빈다. 그리곤 턱으로 깨작깨작 먹고 있다.

성공이다.

‘이제야 먹는구나. 잘도 먹네. 귀여운 것.’

처음 애완동물을 기르는 주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귀여워 죽겠다. 애벌레지만 이 녀석이 이제부터 내 애완동물이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정했다.

‘오구오구. 잘 먹는다. 잘 먹어…… 먹어도…… 너무 잘 먹네…….’

애벌레의 식사 속도라곤 믿기지 않는 속도로 나뭇잎을 다 먹어치운 애벌레는 힘이 나는지 꿈틀꿈틀 대며 몸을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녀석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활기다.

녀석은 아직도 배가 고픈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쪽을 향해서 몸을 뻗었다.

하지만 다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옆으로 굴러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애벌레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영특하다.

이거 진짜 애벌레 맞아?

하지만 역시 다리가 없는 녀석이라 내 몸을 타고 올라가지 못한다. 근데 이 녀석은 내 피톤치드가 통하지 않는 건가. 어떻게 이만큼 다가왔지.

내가 거부하지 않아서 그런가. 나도 나를 잘 모르니 이런 상황 하나하나가 신기하다.

‘그래. 이왕 키우기로 결심한 거 더 뜯어주자.’

고통을 참으며 뜯어준 이파리들을 먹는 애벌레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치유된다. 이거 뜯어준 보람이 있구만.

오늘, 나무로 환생한 내게 첫 친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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