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6화 (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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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범한 나무의 일상

1일 차 일기.

오늘부터 마음속으로나마 날짜도 세고 일기도 써볼까 한다.

어디 기록하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는 거니 금방 잊어버리겠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해 미칠 지경이다.

지난 번 송충이 사건 이후로 잠이 든 뒤 눈을 뜨니 나는 또 자라 있었다. 이번에도 삼십 센티가량 자라난 걸 보니 나는 한 번 잠이 들면 꽤나 많이 자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이 자는 게 맞을까? 아니면 내 성장 속도가 빠른 것일까.

눈을 뜰 때마다 삼십 센티씩 자라는데 계절은 바뀌지 않는다. 식물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식물이 삼십 센티나 자라려면 꽤 긴 시간이 걸리지 않나? 못해도 두세 달은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좀 더 주변 환경을 활용해서 관찰해 봐야겠다.

그리고 몇 가지 생각이 함께 들었다. 우선 내가 있는 이 땅이 어디인가 이다.

이제 겨우 세 번째 눈을 뜬 거니 섣부른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원래 환생하면 이세계 아닌가. 말이 안 된다고 하기엔 내게 천사가 말을 걸었던 것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나니까.

아니, 그 전에 인간이었던 내가 나무로 태어난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지금 상황에서 상식을 운운한다면 내 존재 자체가 비상식이다.

물론 여기가 이세계이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내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었을 적, 인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었는가. 바로 환경문제 아니었는가.

아마존 밀림이 파괴당하고 미세먼지가 판을 치던 그곳에서 나무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는가.

그린벨트라는 명목하에 자연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인류의 번식력과 점점 침식당해 가는 산림은, 식생(植生)에 있어서 지옥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판타지 세계라면 어떠한가. 어떤 세계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귀족과 평민이라는 계급이 있고 마법과 검이 날뛰는 세계다. 하층민으로 태어난다면 살기 힘들겠지만 나무로 태어난다면 또 말이 다르다.

지난번 송충이 사건으로 알게 된 건데 신은 나에게 치트 능력 따윈 주지 않았기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마을사람A 확정이다.

하지만 나무이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라면 판타지세계는 나무로서 천국!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근데 판타지라고 해서 다 마법이 있는 그런 세계인 건가? SF라거나 여러 가지로 많지 않나?

……부디 평범한 판타지 세계이길.

2일 차 일기.

이번에도 눈을 뜨자마자 내 성장을 확인해 봤다.

그동안 눈에 띄게 자랐던 것과 달리 십 센티 정도 자란 것 같다. 성장이 더뎌진 걸까. 아니면 내가 일찍 깬 걸까.

이럴 때 비디오로 누가 날 관찰해줬으면 좋겠다.

나팔꽃이냐. 초등학생 방학 숙제로 애용되는 관찰 대상 같잖아 그건.

지난번에 생각했던 것을 알아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나무 밑동을 살펴봤다.

나뭇잎이 꽤나 쌓여 있다. 저번에 봤을 때랑 별 차이가 없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면 썩어야 하는데.

하지만 확답을 내리기엔 위쪽 면밖에 볼 수 없어서 불안하다. 썩어도 아래쪽부터 썩으니까 위만 볼 수 있는 내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자란 것보다 짧게 자랐으니 일찍 깨어난 걸지도. 진짜 이럴 때 나무인 게 너무 불편하다. 잠을 푹 잘 수 있는 건 좋지만.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인데 송충이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변 나무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송충이가 성체가 되는데 잘은 모르지만 한 달이면 충분한 시간 아닐까.

그 많던 송충이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성체가 되어 날아가 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내가 잠든 시간이 최소 한 달은 됐다는 뜻이다.

한 달에 십 센티씩 자라는 나무라. 내 품종은 뭘까.

그래도 이번엔 수확이 있었다. 내가 잠드는 시간은 대략 한 달에서 그 이상이라는 것.

3일 차 일기

네. 틀렸습니다.

다시 눈을 뜨고 내 모습을 보니 전혀 자라나지 않았다. 갑자기 성장이 멈춘 것은 아니다.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냐면 어제 유심히 관찰해 둔 다른 나무의 떨어질랑 말랑하는 나뭇잎이 아직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냥 내 감. 하루면 떨어질 줄 알았거든.

나뭇잎에 의존해서 날짜를 가늠하다니.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이 보면 울겠군.

어쨌든 일어나는 주기에 대해선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냥 마음대로 인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4일 차 일기.

지난번부터 눈을 떠도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장난감을 하나 빼앗긴 기분이라 슬프다.

나를 관찰하는 일이 사라지자 전에 없던 무료함이 쏟아져 짓눌려 죽을 것 같다.

여기는 너무 정적(靜的)이다. 변하는 것이 없다. 내 범위에서 변하는 것이라곤 나 자신과 주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뿐이다.

심심해서 주변의 나무들에게 열심히 사념(思念)을 보내봤지만 화답은 오지 않는다. 텔레파시를 받으란 말이야. 대화 좀 해줘.

전생에서의 인간일 땐 집에서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는데. 하긴, 그 땐 컴퓨터도 있고 인터넷도 있고, 보고 싶은 책을 실컷 주문해서 봤으니까. 고립돼 있어도 고립된 게 아니었지. 이게 바로 진정한 고립이었다.

심심하면 자면 되는데. 라고 생각해서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일단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게 나는 언제나 자고 있는 느낌이라는 거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꿈속에서 ‘아 이거 꿈이구나’ 하고 자각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 또한 확실하게 느껴진다. 바람이며 햇볕이며 전부 선명하게 느껴진다. 상반된 두 가지 스타일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이다.

각성과 수면. 자면서 깨어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도 잠은 잘 수 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수마(睡魔)가 서서히 다가와 내 의식을 짓누른다. 한 번은 저항해 봤지만 시간을 조금 늦출 뿐 피할 수 없다. 강제로 마취당하는 느낌이다.

그렇게 잠이 들면, 꿈도 꾸지 않고 의식도 없다. 죽음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다.

뭐, 어쨌든 이 상태에 불만은 없다. 원래 자는 거 좋아했으니까. 그 상태가 쭉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냥 이 꿈같은 현실이 조금 심심해서 불만인 것이다.

4일 차 일기.

여전히 나는 자라지 않았다. 계절도 변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도 그대로이다.

심심하다.

멍하니 태양빛을 쬐며 정신을 나른하게 만들어본다.

기분 좋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5일 차, 아니 6일 차? 일기.

어제 내가 몇 일 차 일기라고 했었더라. 기억이 안 난다.

무언가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생각으로만 하려니 헷갈린다.

모르겠다. 어차피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도 나는 그대로이다.

아.

심심해.

이럴 거면 계속 의식 없는 상태로 있고 싶네.

오늘의 일기.

무료하다. 계속 자고 싶다.

오늘의 일기.

오늘도 변화 없음.

일기.

변화 무(無).

일기.

…….

일기.

심심해.

일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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