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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무도 잠을 잔다
다음에 정신이 들었을 땐 햇볕이 나를 내리쬐는 몇 시인지 모를 어느 날이었다.
왜 이렇게 생각했냐면 우선 내가 나무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런 숲 속에서 혼자 어두커니 서 있어서 날짜를 모르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내가 조금 자라 있기 때문에 확실히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삼십 센티 정도 자랐네.’
잠들기 전의 내 모습에서 조금이지만 자라난 것을 느꼈지만 성장의 기쁨보다는 다른 쪽에 신경이 쓰인다.
‘햇볕 따뜻하네. 기분 좋아.’
지난번에는 다른 나무의 그늘에 가려져 햇볕을 쬐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큰 나무가 없는 쪽에서 나를 향해 직사광선이 다이렉트로 비춰지고 있어서 나는 그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햇볕은 꽤나 뜨겁다고 느껴졌지만 의외로 고통스럽다거나 덥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다고나 할까. 사람이었다면 적당한 일광욕은 행복이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쬔다면 고문이었겠지. 나무라서 그런 걸까. 계속해서 쬐고 있지만 쬐면 쬘수록 기분 좋다.
‘이렇게 햇볕을 쬐는 게 몇 년 만이더라.’
사람일 때도 밖에 좀 자주 나가고 그럴걸. 사람일 때의 나, 완전 글러먹었잖아.
해수욕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는 느낌으로 늘어져 있으니 새삼 내가 나무로 다시 태어났다는 게 꿈이 아니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현실을 직시하니 뭐니 다짐했지만 솔직히 조금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태평해도 한 번에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진 않는다고.
여러 가지 생각을 태평하게 하고 있자니 햇볕도 따습고 기분도 좋은 게 더 자고 싶은데, 어째선지 잠이 안 온다.
역시 삼십 센티나 자랄 동안 계속 잠을 자서 잠이 안 오나 보다. 이대로 주변 경치나 구경해야지.
지난번에 봤을 때 대략 오 미터까지 보였던 주변 시야는 조금 더 늘어나 칠 미터가량 보였다. 그 이상으로는 게임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맵이 어둠으로 칠해져 있는 것처럼 깜깜했다.
내 주변으로 동그랗게 시야가 밝혀져 있는 모습이 꼭 여기만 선택받은 땅인 것 같아서 꽤나 기분이 좋다.
축 늘어져(팔 다리는 없지만) 일광욕을 하고 있자니 찜찜한 걱정이 하나 들었다.
햇볕의 따스함을 느낀다는 건 나에게도 감각이 있다는 건데, 앞으로 벌레가 잎을 갉아먹거나 동물이 내 가지를 부러트리면 어떤 느낌이 들까. 따뜻한 건 좋지만 아픈 건 싫은데.
별로 할 일도 없고 하니 나는 내 잎을 하나하나 관찰해 보았다. 여전히 옅은 녹색의 내 잎들은 갓 자라난 새싹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다행인지 벌레 먹은 잎이 없다.
혹시 벌레가 나올 시기가 아닌 걸까. 춥지 않으니 겨울은 아닌데. 근처에 낙엽 진 나무도 없으니 가을도 아니고. 늦봄이거나 여름이라고 추측된다.
‘찾았다.’
내겐 벌레 먹은 이파리가 없지만 근처의 나무들을 살펴본 결과, 벌레 먹은 이파리가 꽤나 많이 있었다. 듬성듬성 파먹은 이파리를 매단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호러무비를 본 것처럼 등골이 서늘하다.
이거 절대로 내가 나무라서 그런 거다. 인간의 입장에서 이런 걸 봐봐야 ‘벌레 먹었네’로 끝날 사건이지만, 나무가 된 내 입장에서 보니 피부를 갉아먹힌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이성적으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크윽. 이거 각오하고 있어야겠네.’
근처에 있는 나무 중 나처럼 벌레가 전혀 먹히지 않은 나무는 없었다. 언제 내게도 벌레가 찾아올지 모른다.
잠깐, 이거 주변에 벌레 많은 거 아니야?
좀 더 집중해서 다른 나무들의 이파리를 샅샅이 조사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파리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에 조그만 벌레들이 붙어 있었다. 벌레가 없는 나무는 나 이외엔 하나도 없었다.
벌레는 애벌레처럼 작고 길쭉했는데 송충이처럼 까만 털이 숭숭 나 있어서 나무가 아니라 인간이었어도 혐오감이 드는 외견이었다.
송충이처럼이 아니라 이거 송충이잖아!
‘아 싫다. 제발 나한테는 오지 마라.’
하지만 행운의 신은 날 싫어하는 것일까.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 바람이 몰아쳐 내 앞으로 다른 나무의 이파리 하나가 떨어졌다.
평범한 이파리면 좋았으련만, 송충이가 붙어 있는 이파리였다.
뒤집힌 이파리에서 꿈틀대던 송충이는 내 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안 돼! 오지 마! 징그러!’
크윽. 이럴 때 발이라도 있었으면 밟아 죽이는데. 저런 조그만 벌레 하나에 위협을 느껴야 한다니.
다시 한 번 나를 나무로 태어나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한다. 빌어먹을.
‘보통 다시 태어나면 치트 능력도 주고 그러잖아? 혹시 나한테도 있는 거 아니야?’
정신을 집중하고 송충이를 들어서 날려 보내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되새긴다!
날아가라 송충이.
저 멀리 사라져라 송충이.
짜부러져 죽어버려 송충이.
네 무리였습니다. 치트 능력 같은 건 없습니다.
‘젠장,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제발.’
이성적으론 송충이 한 마리 가지고 호들갑떤다고 생각됐지만 본능적으로 송충이에 대한 혐오감이 날 패닉상태로 몰아넣었다.
송충이는 이 와중에도 점점 더 가까워졌고 내 앞까지 다가와 버렸다.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언젠간 벌레에게 이파리를 뜯어 먹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예전에도 그랬잖아. 포경수술 하기 싫어서 내빼고 내빼다가 결국 중학교 때 해버렸었지.
벌써 성에 대해 눈을 뜬 시점에서 포경수술은 지옥이었다. 남자들은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 때 했어야 했어.
그거랑 똑같아. 어차피 언젠간 당할 거 일찍 당하는 게 속 편하지.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잖아?
……근데 포경수술급으로 아프진 않겠지?
그런데 다행히도 송충이는 내 앞에서 몸을 몇 번 꿈지럭거리더니 다른 쪽으로 기어가 버렸다. 이런. 아쉽군. 조금이지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으앗. 뒤돌지 마. 그대로 가버려. 미안. 농담이었어.
나를 무시하고 사라진 송충이는 내 옆의 나무에 붙어 한참을 기어 올라가더니 나뭇가지까지 도달해 거기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휴. 다행이군.
그나저나 나한테 온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 버리다니 다행인걸. 아직 어린 나무라 맛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가. 어린잎일수록 맛있지 않나? 부드러우니까.
‘어쩌면 피톤치드 때문일 수도 있겠네.’
나무는 벌레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피톤치드라는 성분을 내뿜어 자신을 보호한다고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많이 내뿜는 종도 있고 아예 없는 종류도 있다고 했으니 개체별로 차이가 있는 건 확실하다. 주변의 나무들과 다르게 나라는 나무는 피톤치드를 많이 분비하는 종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우연이거나.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벌레 하나의 움직임에 큰 뜻을 부여하려고 하다니. 나무로 지내느라 너무 심심해서 별 해괴한 망상이 다 드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오더니 나뭇잎들이 비처럼 내 주변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부스럭. 부스럭.
나뭇잎들을 들추고 고개를 쳐드는 수많은 송충이 대군을 보고 있자니 검은 바퀴벌레들 사이에 고립된 과자가 된 기분이다.
어찌된 일인지 송충이들은 한마음 한 뜻이 된 것처럼 내게 모조리 기어오고 있었다.
‘히, 히익! 안 돼! 피, 피톤치드!’
방금 전까지 부정하던 가설이 유일한 동아줄. 제발 성공하길!
결과만 말하자면 피톤치드는 진짜였다. 내 몸통으로부터 한 뼘 정도 되는 길이로 송충이들이 다가오다 멈춰서더니 다른 곳으로 흩어진 것이다.
오오. 굉장하다. 피톤치드.
피톤치드란 원래 이렇게 굉장한 것일까. 나는 이런 굉장한 피톤치드를 가진 종으로 태어나게 해준 신에게 조금이나마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다른 종이었으면 벌써 녹아웃이었다고.
‘이왕 줄 거면 치드 말고 치트를 주지.’
실없는 농담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힘을 너무 쓴 모양인지 졸음이 밀려와 나는 그대로 수마(睡魔)에 정신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