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5화
175화 일본의 항복
“한국을 백색 국가로 다시 지정하고 반도체 부품에 대한 수출을 재개한다면 수습이 될까요?”
관방대신의 질문에 아벤 총리가 반문했다.
“수습이요? 그럼 강제징용에 따른 개인적 배상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 그건…….”
“만약 배상을 한다면 우리의 전통적 지지층이 이탈할 겁니다. 자민당의 지지율 역시 크게 하락할 거고요. 어쩌면 정권이 교체될지도 모릅니다.”
아벤 총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총리님. 강제징용자에 대한 배상이 없다면 한국은 우리와 화해하지 않을 겁니다.”
이때, 미국에서 돌아온 곤노 외무상이 들어왔다.
“곤노 외무상!”
“어서 오세요. 곤노 외무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이리로 온 까닭에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성과를 얻었나요?”
“미국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곤노 외무상의 표정은 심히 어두웠다.
“우리가 틀렸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틀렸다고요, 우리가 졌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곤노 외무상, 우리가 틀렸다니요, 대체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관방대신이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나섰다.
“우선 진정부터 하시고 침착하게 말씀해 보세요.”
“방금 말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곤노 외무상은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첫째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대한민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불매운동을 보십시오. 한 달에 수백 대가 팔리던 자동차는 지난달에 고작 4대 팔렸습니다. 마트에 가보십시오. 일본 제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관광객들이 오지 않아 지방 소도시의 경제는 파탄이 났고요.”
“…….”
“…….”
“……!!”
곤노 외무상은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최선우가 보유하고 있는 자금력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최선우의 자금력이요?”
“네. 우리가 알고 있던 최선우의 자금력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방신의 일각이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벤 총리의 질문에 곤노 외무상이 말이 이어졌다.
“……최선우 총리는 의 주주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의 주주가 아니었다고요? 그럼 더 잘된 것이 아닙니까?”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최선우가 바로 의 주인이었습니다.”
“헉!!”
“뭐, 뭐라고요?!!”
“이번 미국행에서 모든 로비력을 총동원한 결과 알아낸 정보입니다.”
“하지만 은 영국 황실 소유의 자금 운용…….”
관방대신의 말을 곤노 외무상이 잘랐다.
“네. 영국 황실도 관련이 있죠. 하지만 영국 황실은 고작 3%의 지분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대신 최선우가 90%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아!!”
“……맙소사!”
“헉!”
모두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곤노 외무상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선우의 재산은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일라이 국무장관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최선우가 마음먹고 일시에 공매도 폭탄을 던지면 미국 증시도 폭발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미국 증시를요?”
“네.”
“나스닥 중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전문가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았는데…….”
“해보았는데?”
“……그들 역시 일라이 국무장관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참담함을 넘어 거의 울먹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본의 우방이라는 미국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해도 모르는 척했고 당근을 제시해도 못 들은 척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일찍부터 중립을 표방한 대만과 러시아는 현재 반사이익을 얻어 표정 관리에 힘쓰고 있고 아시안 연합 역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만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패착이었습니다. 흑흑흑!”
곤노 외무상은 차가운 북풍한설을 마주한 나뭇가지처럼 전신을 크게 떨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어?!”
“고, 곤노 외무상!!”
다 큰 어른의 예상치 못한 울음에 내각 대신들이 당황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예상한 최선우의 재산 규모는 최대 150억 달러이고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규모는 대략 1,000억 달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곤노 외무상의 말에 따르면 계산이 크게 틀려진다.
앞이 깜깜해졌고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더욱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 내 친일 세력들 역시 붕괴되고 있었다.
이때, 비서관 한 명이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벤 총리님!”
“히데오 행정관. 무슨 일인가?”
“이것을 좀 보십시오.”
“응?!!”
히데오 행정관의 다급한 행동은 내각 대신들의 시선을 모두 끌 정도였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
이게 왜? 그런데 장소와 사람이 문제였다.
“맙소사!!”
“이런…… 젠장!!”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그것도 대한민국 현직 국회의원이 천황 폐하 만세라는 말을 내뱉다니!!
총리실에 모인 이들 전부가 깜짝 놀랐다.
소름이 끼쳤다.
온갖 잡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어쩌면 한국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친일 세력이 괴멸될지 모르겠다.
아니! 최선우 내각의 행보를 보면 괴멸될 것이 분명했다.
“……끝났어.”
이때, 누군가의 낮은 소리가 침묵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갔다.
* * *
검찰은 일심회 회원들에게 각각 법정 최고형인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추후 재판의 진행을 통해 형이 확정돼야 하겠지만 감형될 확률은 전무했다.
그리고 일심회 회원은 아니지만 이들에게 협력한 자들과 그 부역자들 또한 그 죄질의 경중에 따라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최선우 총리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번 재판을 생중계한 덕에 71%에 이르렀던 불매운동 참여율이 99%까지 치솟았다.
특히 신자유당 민태욱 국회의원이 재판장에서 외친 천황 폐하 만세는 아직까지 마무리되지 않은 친일 청산에 대한 열풍으로 변해 들불처럼 타올랐다.
“……친일 혹은 친미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타국과 친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 타국을 위해 내 조국을 배신한다면 그것은 용서하지 못할 죄입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정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우리는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겁니다. 저는 지금 이 시간부로 친일 청산을 향한…….”
모든 정규 방송이 중단되며 최선우 총리의 대국민 담화가 생방송으로 방송됐다.
“……그들이 축적한 재산은 국고로 환수될 것이고 그 죄질에 따라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우의 발언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덕에 그 어느 누구도 선우의 행보를 막을 수 없었다.
“허,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나라를 떠야 하나?”
“출입국 관리소에 알아봤더니 이미 출국 금지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
예상보다 한 박자 빠른 행보를 보인 최선우 내각이었다.
“곧 친일 청산 특별법이 공개된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어쩔 수 없군요.”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자비한 축출이나 전액 몰수는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쳇! 순순히 협조하라는 뜻인가요?”
“음!!”
“…….”
친일파와 그들의 직계 후손들은 불안에 떨며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 하나 명쾌하게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D-Day가 다가왔다.
금요일 오전.
선우는 장이 열리자마자 의 이름으로 1,000억 달러의 공매도 폭탄을 일본 외환 시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비선 연락망을 통해 아벤 총리에게 이렇게 전달했다. 백기 투항 하지 않으면 2차로 1,000억 달러, 그래도 버티겠다면 3차 1,000억 달러의 공매도 폭탄을 투하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첨부 파일로 의 외환 보유액을 찍어 보냈는데 선우의 장담대로 잔고에는 3,000억 달러 이상의 현금이 숨 쉬고 있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아벤 총리는 결국 투항 의사를 밝히며 그날 오후 사절단을 이끌고 직접 청와대를 찾았다.
1.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한 것은 우리의 명백한 실수다. 다시 백색 국가로 지정하겠다.
2. 반도체 부품 수출을 재개하겠다.
3.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개인의 강제징용 배상을 인정하겠다.
선우는 아벤 총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 일본이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한 것은 너희들의 명백한 실수다. 이제라도 인정하며 사과한다니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반도체 부품에 관한 사항은 이미 해당 기업으로 그 공이 넘어갔다. 또한 당신들 역시 파악했듯이 일부 부품은 국산화에 성공했고 일본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수입처 역시 찾았다. 수출을 재개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진 마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강제징용 배상에 관한 것은 국제법상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선우는 일본의 요구에 침착하게 답하는 한편 대한민국 정부의 요구 사항을 당당하고 확실하게 전달했다.
“일본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어버렸고 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과거사, 즉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관동 대학살에 대한 진실한 사과가 필요하다. 더욱이 역사적 사실로 판명된 독도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본의 행태는 야비하기까지 하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위에 열거한 모든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동시에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
대한민국 정부의 요구가 이어질수록 이를 경청하고 있던 아벤 총리와 내각 대신들의 표정이 참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우는 이에 아랑곳없이 오히려 싱긋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토요일과 일요일.
일본은 딱 이틀간의 유예 기간을 받았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우리의 지지층이 떠나갈 겁니다.”
“……기어이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군요.”
“한국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미 우리 경제는 단시일에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2차, 3차 공격이 이어진다면…….”
“그래도 안 됩니다. 총리님.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보수 우익입니다. 한국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우리를 외면하게 될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민당의 진정한 끝입니다. 지지층만 유지한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
60년이 넘게 오직 ‘자민당’이라는 한 정당만이 지배하고 있는 일본.
보수 우익이라는 지지층이 무너진다면 이들의 미래 또한 없었다.
‘그래.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패망에서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을 이룬 나라이다. IMF도 이겨냈다. 두 번은 더 쉬울 것이다. 절대로 보수 우익이라는 자민당의 지지층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한 아벤 총리가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청와대 비서관이 아벤 총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잠시 차나 한잔하자는 최선우 총리의 뜻을 전했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두 사람의 독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