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9화
159화 깨어난 P
“미국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뭐지?”
<펜 의학 연구소>는 현재 전 세계 제약 회사들이 주시하고 있는 곳이다.
비타민P의 하루 생산량이 고작 100만 개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이 한국에서 소모되는 통에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 공사로 인해 저들의 이목이 크게 집중되고 있었다.
“작가님의 지시대로 다국적 제약 회사들에 대한 정보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저의 정보망에…….”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죄송합니다.”
되도록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디 있을까?
연구원 혹은 공사 관리자나 공무원 등을 통해 <펜 의학 연구소>의 생산 시설이 확장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것이 분명하다.
선우는 분명 누군가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거액을 들여 구축한 미국, 유럽, 한국의 정보 조직을 풀가동시켰다.
“누가 움직였지?”
“H&H 제약의 헤럴드 회장입니다. 그가 킬러를 고용한 흔적이 잡혔습니다.”
선우의 얼굴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헤럴드 회장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일급 저격수와 킬러들의 명단을 확보하도록 하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 대한 경호 인력도 배로 올리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최고의 정보 요원들이 움직이자 헤럴드 회장의 동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생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마피아 조직 보스의 딸이 불치병에 걸린 것이 확인돼 개인적인 도움(비타민P와 함께 <펜 의학 연구소>의 임상 실험 대상자로 선정)을 주었더니 그쪽에서 헤럴드 회장과 그와 연관이 있는 킬러들에 대한 자료를 몽땅 넘긴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에 들어온 일급 킬러는 오직 한 명, 벤 존슨입니다.”
“벤 존슨?”
“나이 41세, 키 188cm에 81kg. 전직 SSD 요원이었습니다.”
“SSD 요원?”
“네. 전역 후, 음지로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스윽!
“1년 전에 찍힌 사진입니다. 전국에 뿌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서울과 인천, 평택을 중심으로 경기도 지역에 집중하게.”
“네. 작가님.”
납치건 저격이건 그 목적이 무엇이든 일단 선우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예컨대 그 끝은 죽음일 것이다.
평택시 외곽에 위치한 한 호텔에 여장을 푼 벤 존슨은 노트북을 켰다.
-이봐! 뭐 알아낸 정보 없어?
그는 채팅을 통해 정보 상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통상적인 경호원이 16명.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경호원이…….
예상보다 많은 경호 수준에 벤 존슨이 인상을 썼다.
더욱이 선우의 경호를 맡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날고 긴다는 대한민국 특전사 출신이었다.
“쳇!”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인내의 벤 존슨, 기다림의 미학자가 아닌가?
언제나 기회는 온다.
단지 그 기회를 얼마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해피 타운이라고 했지? 일단 조금 돌아보자. 최적의 저격 위치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해.’
벤 존슨은 편안한 마음으로 호텔을 나왔다.
“해피 타운 플리즈.”
“예~ 손님. 헤피 타운으로 고(go)하겠습니다.”
잠시 후.
생기 넘치고 활력이 가득한 도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군!”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로변은 각종 물품들을 파는 상점들로, 그리고 쇼핑과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로 가득했다.
골목골목에 저마다 특색 있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이탈리아의 도시를 연상하듯 멋진 조각, 전등들이 수를 놓았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택시에서 내린 벤 존슨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알지 못했다.
‘12시 방향, 낯선 외국인 출현.’
‘……CCTV 확인 요청.’
‘19시 방향.’
‘소호 상점 출입, 확인 요청.’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는 CCTV와 환한 미소 속에 감춰진 누군가를 찾는 눈초리들을 말이다.
그리고 며칠 후.
일급 저격수, 벤 존슨의 모습이 해피 타운에서 사라졌다.
목격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그가 마지막에 머물렀던 거리에는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헤럴드는 차가운 느낌에 눈을 떴다.
“H&H사의 헤럴드 회장.”
“……누, 누구요?”
“나야. 엔초 밤비노.”
“엔초 밤비노?”
헤럴드 회장은 화들짝 놀랐다.
뉴욕의 밤을 지배한다는 마피아 조직 보스의 이름이 아닌가?
“누, 누가 보냈소?”
“누가 보냈냐고? 하하하! 자네는 아직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군. 헤럴드 회장.”
“……?”
“최근에 벤 존슨을 만나 그에게 의뢰를 한 일이 있지?”
“……!!”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인해 헤럴드 회장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 그렇소만.”
“쯧쯧쯧!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을 건드리다니.”
마피아 보스의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저음에는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본능적인 감이다.
헤럴드 회장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살려만! 살려만 주십시오.”
“……미안하군.”
“아, 안 돼……. 안…… 돼!!”
다음 날, 헤럴드 회장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 * *
선우는 침상으로 시선을 내려 박강현 전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뻗어 마법을 펼쳤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박강현 전 대통령을 옭아맸던 이대박 정권은 물러난 지 오래고 그를 향했던 무수한 의혹들 역시 선우가 장악한 언론에 의해 샅샅이 밝혀졌다. 박은혜 대통령이 건재했지만 그녀는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허수아비 같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
-우우우웅!!
마법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꿈인가?]
박강현 전 대통령의 의식은 살아 있었다.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 귀는 열려 있었다.
외출을 위해 현관을 나섰고, 그 후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까 전부터 뭔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어두운 공간에서 뭔가가 자신을 감싸는 포근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인지할 수 없었지만 이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두 눈이 번쩍하고 떠진 것이다.
얼마 후.
의식을 회복한 박강현 전 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놀랍군요.”
“네. 보시다시피 그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박강현 전 대통령은 편안한 자세로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쓰러졌을 당시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일들을 한 권의 책처럼 엮은 문서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마련된 최신형 노트북도 보였다.
“제가 깨어난 사실을 누가 알고 있나요?”
“저를 제외하면 현재 아무도 모릅니다. 원하시면 가족분과 기자들을 불러 발표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지금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선우는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조치했다.
* * *
하늘은 언제나 세상 위에서 그 고고함을 펴고 있다.
땅 위의 생명체들이 내뿜는 다양한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고요한 푸름을 바람에 따라 고즈넉이 흘려보낼 뿐이다.
“정치를 하라고요?”
“네.”
“제가 왜 정치를 해야 하죠?”
박강현의 말에 선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제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박강현 대통령님에게 없는 것이요?”
“전 상고를 나와 사시에 합격했습니다. 인권 변호사를 하다 우여곡절 끝에 정계에 몸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죠. 원칙과 정의가 승리하고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을 꿈꿨지만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실패했습니다.”
“……완벽한 실패는 아닙니다.”
“그렇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박강현 전 대통령은 주름진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작가님은 단군 이래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천재입니다.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금력을 가지셨고 얼마 전에는 언론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병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신비한 힘까지 지니셨죠.”
“전 대통령님과 다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다른 게 맞는 겁니다. 저 때문에 고민하실 필요는 없어요.”
“……!”
선우는 답답했다.
저 남자의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이 참으로 답답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 남자의 고지식함 때문에 경외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원칙과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 그래요.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까진 원하지 않습니다.”
“……?”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안면이라는 말도 있고요. 하지만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것이죠.”
선우는 박강현 대통령과 두 눈을 마주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대통령님의 정치적 신념을 놓고 왈가왈부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1급수가 아닙니다.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다에 수십억 명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낮과 밤이 존재하고 하늘에는 태양과 달이 떠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죠. 제가 생각하는 판단 아래서 반칙과 특권은 어느 정도 포용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신이 뚜렷하시군요.”
“네.”
선우의 말이 이어졌다.
“A기업에서 신입 사원을 뽑는데, 똑같은 점수를 받은 남자가 있습니다. 모든 항목에서 똑같은 점수를 받았죠. 문제는 단 한 명만 회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사 담당관은 과연 누구를 뽑을까요? 설마 제비뽑기를 해야 하나요?”
결국 선우는 어느 정도의 반칙과 특권은 용인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작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쩌면 제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당황해하는 선우를 보면서 그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작가님 말씀처럼 1급수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전 바보라서 그냥 이런 꿈을 계속 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너무나 감사한 사실은 작가님 역시 원칙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점입니다.”
“……!”
선우와 박강현 전 대통령은 자주 만나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작가님은 지금 한국의 정치판이 정상이라고 보십니까?”
“…….”
“저 국회가, 그리고 저 정부가 민족과 나라를 위한 국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뭔가를 작심한 듯 강한 어조로 말을 쏟아부었다.
“친일은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사회 곳곳에서 도를 넘은 반칙과 특권이 악취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원칙과 정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통과시킨 법안들이 다시 후퇴했고 제가 꿈꾸던 세상이 다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원칙과 정의를 위해 만들었던 법률들은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당했고요.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합니까? 곳곳에서 편을 가르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판을 짜는 이 나라 위정자들에게 실망했습니다. 박은혜 대통령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
박강현 전 대통령은 강한 눈빛을 보이며 선우를 직시했다.
“작가님,”
“네.”
“작가님이 만드신 해피 그룹을 보면서 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님이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요.”
“……!!”
두 사람의 눈빛이 강하게 충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