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45화
145화 설계(2)
-유림 일보.
“선배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뭐가?”
“우리 신문사요. 이러다 진짜 망하는 것 아니에요?”
“야! 망하긴 누가 망해!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네.”
사실 후배 앞이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현재의 상황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각.
대한민국의 대표적 보수 언론이라 불리는 주선 일보의 분위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 신문사가 내야 할 돈이 1,000억이라며?”
“그러게 말이야.”
“1,000억이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회사에 그만한 돈이 있을까? 더욱이 미디어 관련법 통과가 눈앞이잖아.”
“그러게 말이야.”
“미디어 법이 통과해도 돈이 없으면 물 건너가는 거 아냐?”
“회사는 없지만 우리 사주는 또 모르지.”
“그게 무슨 소리야? 회장님은 돈이 있다고?”
“그럼. 그동안 해 먹은 게 수십 년이야. 시청 앞 호텔도 우리 회장님 소유잖아.”
“하, 하긴.”
“모르긴 해도 1,000억은 족히 있을걸. 하지만 회장님이 자기 사재(私財)를 털어 넣을 건지……. 그게 관건이겠지.”
“그렇군.”
“휴우. 이 얘긴 그만하자.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그래.”
한편 선우 역시 각 언론사의 자산 현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1,000억이라는 돈은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었지만 언론사 오너(owner)들이 사재를 출연(出捐)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순순히 돈을 낼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미디어 관련법 통과를 앞두고 지금은 한 푼이 아쉬운 시기였다.
‘정치권을 상대로 협박을 했다가는 뒤탈이 좋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1,000억을 내놓을 수도 없고…….’
‘미디어 법은 통과가 확실한데, 현재의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군.’
‘어떻게 일이 이 지경으로 되고 만 거지?’
이대박 대통령을 움직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우선…….”
4대 일간지의 반격인가 아니면 반항인가?
그들은 언론의 자유와 그들의 정당성을 외치며 해피 그룹과 영국계 투자회사인 에 대한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한 번 당한 것이 있어서 그런지 직설적으로 그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교묘하게 돌려 선우의 행동을 비판했다.
-우리는 언론이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지 마라.
-사람들은 알 권리가 있다.
-호황 뒤에 숨겨진 이면, 해외 투기 자본의 대두.
-대한민국 경제 이대로 괜찮은가?
-투자회사의 탈을 쓴 늑대.
하지만 이들의 속내는 이러했다.
‘우리는 여론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자중하겠다. 그러니 우리 합의하자.’
그러고는 자사 법무 팀을 시카고에 급파해 합의를 요청하는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인맥을 총동원했다.
* * *
“4억 불은 무리네.”
“4억 불.”
“이봐. 제임스. 이들의 자산을 봐.”
“4억 불.”
“4억 불을 내면 회사가 파산이야.”
“4억 불 아니면 합의는 없습니다.”
“……!!”
4대 언론사 법무 팀을 이끌고 나타난 로이스 변호사는 제임스 대표의 단호한 말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의뢰인의 요구인가?”
“네.”
“나 원 참!! 회사가 파산하면 도대체 누가 이익을 보는 거지? 모두가 손해를 보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의뢰인을 설득해야지.”
로이스 변호사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베테랑 변호사다.
화를 낸다거나 신경질을 부리지 않고 제임스 대표를 살살 구슬렸다.
“의뢰인은 얼마를 원하는 건가?”
“그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임스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다면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사람 야박하기는…….”
로이스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임스 대표를 만류했다.
“허…… 이 사람, 왜 이리 급한가? 앉아 보게.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제임스 대표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4대 일간지에서 각각 1,000만 불, 총 4,000만 불을 배상하겠다고 했네. 어떤가? 그리고 자네에겐 별도로 인사를 할 생각이네. 10%, 400만 불. 어떤가?”
“…….”
로이스 변호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밀고 당기기를 시작했다.
“6,000만 불에 600만 불.”
“불가!”
“8,000만 불.”
“불가!”
“1억 불.”
“불가!”
“이익!! 좋아. 2억 불. 자네 수수료만 해도 2,000만 불이야. 이 이상은 절대 안 되네.”
“……불가!”
이 상태로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알게 될 일, 제임스 대표는 그의 가방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로이스 대표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한번 살펴보시죠.”
서류를 내민 제임스 대표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이, 이게?!!”
잠시 후,
로이스 변호사의 얼굴에서 느껴졌던 그 당당함과 여유가 사라졌다.
“보셨으니 아셨겠지만 4대 언론사 사주들이 조세 피난처에 숨겨 놓은 재산 내역입니다. 이래도 갚을 돈이 없을까요? 회사를 살릴 돈은 있습니다. 단지 아까울 뿐이죠.”
“……!!”
잠시 침묵을 지킨 제임스 대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 가지 방법이 있겠네요. 첫 번째는 다음 달까지 4억 불을 모두 배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주들이 보유한 언론사 주식을 통째로 내놓는 겁니다. 세 번째는 재판을 이어가는 거죠. 하지만 세 번째 방법은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이 증거를 공개하면 배상액이 더 커질 테니까요.”
“으음!!”
로이스 변호사의 얼굴이 더욱 침통하게 변했다.
“아! 로이스 변호사님.”
“……?”
“참고로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
제임스 대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때까지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던 각 언론사의 법무 팀장들이 저마다 한 소리씩 냈다.
“말도 안 돼!! 우리가 이렇게 무너질 것 같습니까?”
“결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좋으실 대로.”
그들의 고성과 반대로 제임스 대표는 목소리를 전혀 높이지 않았다.
“이이익!!”
“끝내든 계속하든 그건 그쪽 의뢰인의 자유겠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후회하지 말게. 제임스 대표.”
“후회하지 않습니다. 로이스 변호사님.”
제임스 대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시카고로 떠난 법무 팀장들에게 다이렉트로 연락을 받은 언론사 사주들은 경악했다.
‘젠장!’
‘어떻게 알았지?’
‘마, 말도 안 돼. 누구야? 내부에 첩자가 있었나?’
‘이런 개 같은!!’
그렇다.
그들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숨겨놓은 재산이 있었다. 하지만 배상액이 너무나 컸다.
만약 그 돈을 모두 지불한다면 수십 년 동안 모은 비자금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설계한 장밋빛 미래에 중차대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하아! 안 돼.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로비를 해왔던가!!”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종합 편성 채널.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이들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지상파 방송에 맞서는 동시에 진정한 언론 재벌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보이는데 이렇게 무너질 순 없었다.
하지만 뾰족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주가는 연일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고 설상가상 이번 재판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거액을 배상해야 했다.
국회에서 미디어 관련법이 통과된다 해도 돈이 없다면 이것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시간,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클럽 엑셀 입구에 명품으로 치장한 아랍인이 등장했다.
“들어갈 수 있나?”
순간 번개와 같은 빠르기로 아랍인의 전신을 스캔하는 웨이터다.
“네, 물론이죠. 입장 가능하십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으로 도배한 덕에 무사 통과다.
“오늘 물 어떤가? 좋아?”
“그럼요, 아주 끝내줍니다.”
“오케이.”
웨이터는 재빨리 무전을 보냈다.
-지금 입장하는 아랍인 남자 손님 한 명. VIP.
-네,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장담한 것처럼 클럽 엑셀의 수질은 꽤 좋아 보였다.
“술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물었다.
“여기 세트 메뉴가 좋다고 들었는데, 뭐가 있지?”
“세트라면 기본으로 천상 세트가 있고요. 그 위에 가마 세트, 욕조 세트, 억수르 세트가 있습니다.”
“구성과 가격은?”
“천상 세트는 루이 13세 한 병과 돔 페리뇽 4병이 나오고 가격은 1,000만 원입니다. 가마 세트는 2,600만 원으로 아르망디 10병에 돔 페리뇽 15병이 나옵니다. 욕조 세트는 5,000만 원이고요 엔젤 브뤼 20병에 엔젤 로제 20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흐음! 나쁘지 않네. 억수르 세트는 어때?”
“억수르 세트요?”
“응.”
아랍인의 말에 웨이터의 태도가 한층 더 공손해졌다.
“억수르 세트는 아르망 드 브리냑 12l로 1병, 루이 13세 1병, 아르망디 750ml 10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격은 1억입니다.”
“호오~ 셋 다 마음에 드는군.”
“그, 그러십니까?”
“가마, 욕조 그리고 억수르 세트 부탁해.”
-꿀꺽!
웨이터는 아랍인의 배포에 깜짝 놀랐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부탁이요?”
“응.”
아랍인은 환한 이빨을 내보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내가 혼자 왔잖아? 근데 혼자 먹기엔 술이 많은 것 같아서 말이야. 괜찮은 친구들이 있다면 인연을 맺고 싶군. 일단은 격이 맞는 친구들로 말이야. 그 다음은 여자들이고~~”
“물론…… 가능합니다.”
그는 가마와 욕조 그리고 억수르 세트까지 주문한 재신(財神)이었다.
최소 아랍의 엄청난 부호거나 어느 나라의 왕자가 분명했다.
“형님들~”
“오~~ 찬호야.”
“형님들에게 소개시켜드릴 분이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소개시켜줄 분?”
“그게 누군데?”
“아랍 부호예요. 왕자 같기도 하고요.”
“뭐?!!”
아랍 부호 혹은 아랍의 왕자 같다는 말에 짙은 호기심을 보였다.
잠시 후,
요란하던 음악이 갑자기 멈췄다. 하지만 이내 산처럼 쌓은 양주를 가득 실은 가마와 욕조와 그리고 12l에 이르는 아르망 드 브리냑이 불꽃을 내뿜으며 이동하는 것을 보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엄마야~!”
“헉, 대박이다.”
“미쳤어. 누가 저걸 시켰지?”
특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세트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클러버들이 VVIP 테이블을 기웃거렸다.
아랍인은 자신을 칼라프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랍인은 클럽 엑셀은 최고의 유명인이 되었다.
그가 클럽에 나타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억수르 세트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날에는 가마 세트 2개를 추가로 시켜 전 테이블에 쐈다. 물론 공짜로 말이다.
사람들은 칼라프를 어느 아랍 국가의 왕자로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저 말도 안 되는 부가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