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5화
135화 왠지 껄끄러운 느낌
다음 날,
백화점 개장 시간에 맞춰 호텔을 나섰다.
설연이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이른 시간부터 외출을 준비한 덕이다.
“선우야, 나 예뻐?”
“어. 완전.”
“헤헷~”
선우와 함께 쇼핑에 나선 설연의 입가에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이건 어때?”
“그것도 예뻐.”
“그럼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다 사.”
“꺄아악~~”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에 선우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패션의 완성은 누가 뭐라 해도 얼굴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를 봐라.
얼굴에 몸매까지 완벽했다.
뭘 입어도 뭘 걸쳐도 어울리지 않는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드레스 3벌, 원피스 8벌, 투피스 4벌, 블라우스와 스커트, 바지도 각각 9벌씩 구입했다. 두 사람이 다음에 찾은 곳은 보석점이다.
“설연아?”
“언니?”
설연이 마음에 드는 반지와 목걸이를 싹쓸이하다시피 할 무렵, 그녀 앞에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정수정이라는 연예인이었다.
작년에 재벌 3세와 스캔들이 터져 잠시 미국으로 도피성 외유를 떠났다고 했는데,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언니.”
“그런데 이분은?”
“안녕하세요. 최선우라고 합니다.”
“어머머~~ 역시!”
반짝이는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작가님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설연이 청바지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청순미를 과시하고 있었다면 수정은 검정색 가죽 치마를 입고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녀는 설연에게 같이 쇼핑을 하고 싶다는 부탁을 해왔다.
워낙 간절하게 부탁하는지라 설연 역시 거절하지 못하고 쇼핑을 함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그녀의 재치 있는 말에 쇼핑은 의외로 부드럽게 풀려갔다.
선우 역시 편해졌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있어서 쇼핑이 가져다주는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우는 수정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하다는 마음을 표시했다.
다음 날 저녁,
오랜만에 양가 가족이 모두 모였다.
“이보게 사위, 여행은 어땠나, 좋았나?”
“예. 장인어른.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
선우는 장인을 위한 선물로 최고급 와인과 양주를 아예 박스째로 구입해서 내놓았다.
“아들, 아빠는?”
“당연히 있죠.”
이럴 줄 알고 두 박스를 구입했다.
“딸막이, 좋았어?”
“설연아 좋았니? 호호호~”
“네, 두 분 엄마. 저 너무 좋았어요. 여기 엄마들 선물이요.”
“어머머~~ 얘는 호호호~~!!”
“언니 선물도 있어. 대신 엄마들이 먼저 고르시고 나서 골라.”
설연은 명품 숍에서 싹쓸이 한 옷과 보석을 한 줄로 쭉 늘어놓았다.
“꺄아악~”
“대박!”
참고로 공항에서 선우가 자진 납부한 금액(해외 결제 금액의 20%)이 4억에 육박했다고 한다.
* * *
“여보세요, 누구요? 아!!”
전화를 건 사람은 뜻밖에도 정수정이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네? 지금 한국이시라고요?”
뉴욕에서 헤어질 때 그저 인사치레로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고 했었는데, 연락이 온 것이었다. 하필 설연이 뉴질랜드에 화보 촬영을 갔는데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간곡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그녀 역시 내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선우는 결국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만남을 약속했다.
“여깁니다.”
“어머~ 작가님. 일찍 오셨네요.”
“그럼요. 일찍 와야죠. 숙녀분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선우가 소유하고 있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특실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이날의 메뉴는 프랑스 요리다.
먼저 전채 요리가 나왔고 해산물에 이어 최고 등급 스테이크가 등장했다.
두 사람이 와인 잔을 들고 가볍게 건배를 하는 순간, 선우를 바라보던 수정의 눈빛이 반짝였다.
“작가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십시오.”
“작가님을 유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투로 말하는 그녀의 질문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작가님 정도의 능력이면 두 여자도 충분하지 않나요? 사는 건 설연과 사시고 저와는 즐기자는 거예요. 간단하죠?”
“……!!”
“아주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드릴게요.”
테이블 위에 있던 수정의 손이 선우의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허어 참!! 이렇게 노골적인 유혹이라니!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맹렬하게 교차했지만 결론은 이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자신은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이 있지 않은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정체를 감춘 채 원초적 욕망을 배출할 수 있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죠.”
“제가 싫은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수정 씨는 분명 매력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전 결혼을 했고 설연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만나면 되잖아요. 전 비밀을 지킬 수 있어요.”
“세상에 비밀이란 없습니다. 단지 시간의 차이일 뿐이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제가 알고 당신이 아는데, 어찌 비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다만 오늘 있었던 일은 제 기억에서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수정 씨도 잊어버리세요.”
선우의 정중한 거절에 수정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분명 잘못됐지만 그래도 그녀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결국 그녀 역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카이라운지를 떠나기까지 그녀는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한 장의 초대장이 선우에게 배송되었다.
이대박 대통령 당선자가 주최하는 경제인들과의 조찬 모임이다.
대한민국 100대 기업의 오너(owner)들이 모두 초청받은 자리였기에 해피 그룹을 이끌고 있는 선우에게도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선우는 대통령 당선자와 인사도 나눌 겸, 겸사겸사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태리 작가다.”
“이봐. 황 대표! 자넨 아직도 이태리 작가라고 부르나? 최 회장이라고 불러야지.”
“자네야말로 모르는 소리 하고 있군. 최선우 회장 본인이 작가라고 불리는 걸 좋아한다고 하잖아.”
“그게 정말인가?”
“그래. 이미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이 친구야. 그러니 앞으로 최선우 작가 혹은 이태리 작가라고 부르게.”
“고, 고맙네.”
“마이 플레저~”
해피 그룹의 재계 순위는 매출 기준으로 7위에 올라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투자회사 을 제외한 기준이다.
사실 해피 그룹의 최대주주도 이지 않은가? 또한 이 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최선우였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짝짝짝짝!!!
이대박 대통령 당선자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왔고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 총수들과 각각 면담을 가졌다.
첫 타자는 성삼의 박건희 회장이고 두 번째는 윤대의 정용구 회장이 면담을 가졌다. 재계 서열 순위로 면담을 갖는 모양새였다.
“최선우 작가님.”
대략 6~7번쯤 됐을까?
검은색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한 남성이 선우에게 다가왔다.
“대통령님께서 찾으십니다. 저와 같이 가시죠.”
“…….”
안으로 들어가자 이대박 대통령 당선자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거기 앉으세요.”
“……네.”
“이제야 얼굴을 보네요.”
왠지 뼈가 있는 말투다.
“죄송합니다. 나랏일을 하시는 분들과 교류가 없어서, 그동안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아!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기업을 경영했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글까지 쓰시니 최 작가가 바쁜 건 전 세계가 다 알고 있죠.”
“늦었지만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선우에게 물었다.
“해피 그룹의 매출이 어느 정도죠?”
“작년 기준으로 대략 100조 가까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들었다?”
“네, 제가 그룹 경영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이대박 대통령 당선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상 해피 그룹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선우의 뜻대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해피 그룹 지주사의 주식 90%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누가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100조라, 대단하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럼 은 어떻습니까?”
“네?”
“영국계 투자회사 이요. 거긴 매출이 얼마나 됩니까?”
이대박 대통령은 묘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요?”
“말씀드렸다시피 경영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요.”
사실 이 행한 1억 불 이상의 투자는 필히 선우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이것은 왓슨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내부 기밀이었다.
한편 이대박 대통령은 선우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수백억 달러를 움직이는 기업을 소유하고도 관심이 없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최 작가는 참 별종이네요.”
“…….”
왠지 분위기가 싸하다.
하지만 본인이 모르겠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한동안 묘한 눈빛으로 선우를 응시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펜 의학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그 면역력 치료제라는 것은 언제쯤 시중에 나오나요?”
“현재 대량 생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출시 계획은 미정입니다.”
“그건 왜죠?”
“핵심 재료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은 쉽게 말해 원자재가 부족하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군요.”
핵심 재료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이대박 대통령은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그 역시 기업을 운영했던 사람, 당신 같으면 기업의 일급비밀을 알려 주겠는가? 이것은 코카콜라 회사의 대표에게 그 맛의 비밀을 알려달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래요. 대한민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차를 가해주세요. 그만 나가봐도 좋습니다.”
“네. 대통령님.”
‘……쩝!’
왠지 껄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을 펼쳐 그의 호감을 얻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이 쌍팔년도가 아닌 만큼 선우는 이대박 대통령의 묘한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 *
건, 곤, 감, 리.
하얀 바탕에 빨간색과 파란색이 태극을 이루고 있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걸려 있는 청와대 대통령의 집무실에는 조용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20년 이상 이대박을 보필했던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이대박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에 오른 두 남자다. 그들은 대통령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비서실장의 생각은 어떤가?”
“조만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대박 대통령은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를 흔들었다.
“의견이 일치했군.”
“네, 당연한 수순입니다. 단지 시기의 문제죠.”
“계속해 보게.”
“봉화 마을에 내려가 야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박강현은 여전히 그 인기가 높습니다. 가만히 놔두시면 후환이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취임 초기 아닌가? 일단 기업인들부터 길들여야지. 안 그런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일단 국민들이 원하는 건 경제 성장이니, 우선 경제에 신경을 더 쓰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 요 전날 기업인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조만간 신규 투자와 함께 신입 사업 모집 공고가 언론을 장식하게 될 거야. 봉화 마을 문제는 그 후에! 음~ 그래! 내년쯤을 목표로 그림이나 잘 그려보라고, 알겠나?”
“넵.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두 사람의 입술은 일체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때였다.
-우르르릉!!
청와대 상공 위로 심상치 않은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