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0화
130화 일곱 개의 죄악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선우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실프.”
[까르르르, 네. 마스터. 몸은 괜찮아요?]
웃고 있지만 왠지 걱정스러운 음성이다.
“응. 덕분에.”
[다행이에요.]
“고마워.”
선우가 가볍게 인사하며 실프에게 물어보았다.
“실프, 혹시 날 저격한 녀석을 찾을 수 있을까?”
[마스터에게 총을 쏜 자를 말하는 거죠?]
“응.”
[……희미하지만 그자의 체취를 기억하고 있어요. 다만 반경 1km 내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경 1km?”
[네.]
반경 1km 이내에 있다면 놈을 찾을 수 있다니, 이건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오호~ 그렇구나. 아주 좋은 소식인걸.”
[꺄르르~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뻐요.]
“그래. 고마워. 실프, 다음에 또 부를게.”
[네, 마스터. 꺄르르르~]
선우는 실프를 역소환하고 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총성과 함께 피가 튀어 오르던 그 순간을 말이다.
그를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생명을 빼앗을 정도의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굴까?”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계산되며 차츰 그의 뇌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일본.”
소설 <흑야>로 시작된 입국 거부 사건과 을 이용한 환율 전쟁의 결과 일본 경제를 파탄(破綻)시키지 않았는가?
더욱이 얼마 전 이와 관련된 소설을 출판한 마당이었다.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번 일에 누가 있었는지 눈치를 챘겠지.”
선우는 수화기를 들었다.
“헬로우.”
그리고 며칠 후,
아침 일찍 주한 미국 대사 존 하버트와 CIA 동아시아 제레미 지부장이 선우를 찾아왔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작가님.”
“네. 운이 좋았죠.”
“앞으로는 경호 병력을 좀 더 늘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원하시면 저희 측 요원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아! 네. 언제라도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네.”
하버트 주한 미국 대사는 선우가 지니고 있는 참사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선우에게 존대하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알아보셨나요?”
“……네.”
“일본 쪽이죠?”
“……?!”
“……!!”
선우의 단정적인 말에 두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선우 역시 두 사람의 표정에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죠. 우리가 한 일이 있으니까요.”
“……흠!”
하버트 미국 대사가 제레미 지부장에게 눈짓을 주자 그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스윽!
그것은 붉은색으로 [Top Secret]이라 적힌 문서였다.
선우는 즉시 서류를 개봉해 문서를 읽었다.
-꿀꺽!
“……!!”
거침없는 선우의 모습에 하버트 대사와 제레미 지부장은 동시에 진한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선우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문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흐음!”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 퀄리티의 정보를 모았다니 역시 CIA답다.
* * *
장대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시야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그런데 그런 악천후 속,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묘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아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가?
얼굴 가리개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눈빛을 보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흐음, 사기(邪氣)가 충만하군.”
남자의 정체는 바로 최선우다.
음차원의 마나를 느낀 선우는 묘지의 중심을 찾아 책상다리를 하고 느긋하게 앉았다.
그가 묘지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시체, 원혼, 망령이 발하는 음차원의 마나을 통해 마력을 모으려는 것이다.
시기(屍氣), 귀기(鬼氣), 사기(邪氣)!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우는 그것을 차치(且置)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서슬 퍼런 힘, 어둠의 마력에 주목했다.
“*&(*&*()^*%……%$$#%^%^&&*……!!”
룬어를 외우자 묘지에 모여 있던 기운들이 마치 붉은 뱀처럼 일어나 선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우…… 웁! 하아……!!”
코와 입을 통해 붉은 뱀이 선우의 몸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그의 혈관을 비롯해 모든 곳을 헤집다가 마치 뱀이 똬리를 튼 듯한 형상으로 심장에 안착했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세계에서 지금처럼 시체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은 수준 낮은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방법이다. 대체로 어지간한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는 이러한 방법으로 마력을 얻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이면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사제 혹은 신관들 때문이다.
통상 시체를 이용해서 얻은 마력은 대체로 거칠고 순수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를 숨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판타지 세계가 아니다.
선우가 알고 있는 한 성력(聖力)을 가진 이가 전무했다.
“시체나 망령 따위는 이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할 수 없군.”
각설하고 선우가 묘지를 찾은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저격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비록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마법사라지만 운이 나쁘면 수 킬로 밖에서 쏜 총알 한 발에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수백 킬로 밖에서 발사한 미사일 한 방은 어떠한가?
이번엔 운이 좋았다.
저격범이 쏜 총알을 실드 마법과 정령의 힘이 반감시키지 못했다면, 어쩌면 세상과 이별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우웅!!
선우는 한껏 끌어모은 마나를 재배열시키며 그 속에 어둠의 마력을 적절히 섞어 넣었다.
-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두근, 두근…… 두근…….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어둠의 기운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그들의 모습은 악마였다. 귀신이었다. 그리고 어둠 그 자체였다.
선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그는 저들의 모습을 낱낱이 포착했다.
다음 순간,
선우의 정체를 파악한 기운(귀신, 원혼, 사기, 어둠)들이 요동쳤다.
아니! 몸서리쳤다.
그들은 서둘러 선우의 곁을 벗어나려 했다.
허나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다.
선우의 전신에서 발생한 강한 인력이 그들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웅!!
“땅에 묻힌 원혼이여, 음차원에 속한 권속이여. 어둠의 마법사가 명하노니, 내게로 오라.”
그의 의지는 심연 깊은 곳의 어둠을 불러 일으켰다.
굳건한 힘이 치솟았고 음차원의 마나가 선우의 부름에 응답했다.
“후우!”
깊게 호흡하자 음차원의 마나가 쭉 빨려 들어왔다.
폐를 가득 채운 음차원의 마나는 혈관을 타고 전신을 돌며 노쇠한 세포를 소멸시켰고 불필요한 노폐물 역시 모두 태워버렸다.
심장이 힘차게 펌프질하며 전신에서 마나가 넘쳐흘렸다.
“힘이 넘치는군.”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3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선우는 한 달 동안 전국에 산재한 묘지를 중심으로 이름난 흉가와 폐가를 찾았다.
-으어어어어!!
-우우우우아아아!!
수많은 원혼들이 아우성쳤다.
그들이 내뿜는 사이한 기운이 선우의 몸 속 깊숙이 들어왔다.
-덜덜덜!!
몸이 격렬하게 반응한다.
6서클에 오른 경험이 없었다면 저 기운에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
* * *
현대 사회에서 흑마법사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바로 사람의 정신을 미혹하고 유혹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개인이 강해봤자 미사일 한 방이면 끝이다.
핵폭탄의 위력은 어떠한가? 거대 도시 하나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런데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것이 누군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흑마법사의 마법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절대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우는 그의 환상 마법을 세분화했다.
고통, 공포, 나태, 증오, 질투, 탐욕, 환희.
그리고 마침내 선우는 그의 환상 마법에 일곱 개의 죄악을 심는 데 성공했다.
“하하하하!”
선우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늦은 밤,
오사카 공항에 선우가 나타났다.
물론 본 모습이 아닌, 다른 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어디로 모실까요?”
“난바.”
“네. 알겠습니다.”
외모를 바꿔도 숨길 수 없는 아우라 덕인가?
택시 기사는 운전하는 내내 룸 미러로 선우를 힐끗거렸다.
선우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싫어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저기, 저 앞에서 세워주세요.”
선우는 일부러 목적지까지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혹시나 모를 비밀 유지 때문이다.
“남은 돈은 팁입니다.”
“아이쿠, 뭐 이렇게나 많이~~”
팁을 후하게 준 덕인지 택시 기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선우는 길을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이 지나자 마침내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구나.”
선우는 마법 완드를 손에 쥔 채, 저택이 보이는 야산으로 걸어갔다.
-후어어어어어!
바람 소린가 아니면 귀곡성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의 기운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감히 내 목숨을 노려? 이제부터 그 대가를 보여주마.”
하늘에 박힌 초승달 아래서 선우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마치 그것에 반응이라도 하듯 마법 완드가 빛을 내며 어둠의 기운이 한층 거세졌다.
“지옥에 빠진 영혼들이여…….”
그리고 곧 선우의 입에서 음산한 음성이 시작되었다.
“안식을 찾지 못해 구천을 해매는 원혼들이여. 나의 이름으로 축복을 내릴지니 내 부름에 응답해라.”
-우우우우우우웅!!
선우가 흑마법을 노래하자 어둠의 중심에서 사악한 뱀의 형상이 피어나 저택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선우의 눈이 또렷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선명하도록 샛노란 눈동자였다.
저곳에 지옥문이 열렸다.
이와 같은 순간,
도야마 히데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현기증을 느낀 듯 이마를 잡고 비틀거렸는데,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었다.
미증유의 공포가 그의 정신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저택 안에 거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엔 평소보다 고요한 법.
선우는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눈동자로 도야마의 저택을 보았다.
새벽 2시.
조용하던 저택에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저리 비켜, 괴물이야.”
“아악!”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고성과 비명이 난무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동료들이 악마의 형태 혹은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나 자신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끄악!”
칼을 빼어들고 베었다.
누구는 권총을 가지고 와 괴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으아아, 살려줘!”
“이건 악몽이야. 이건 꿈일 거야!”
한편 선우는 저들의 요란한 비명 소리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피 맛을 보기에 좋은 날이군.”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선우는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일곱 개의 죄악이 이 땅에 현신한 것이다.
다음 순간 선우의 그림자가 하늘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