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8화
128화 일본 IMF
“제가 듣기로 에서 제안이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관방대신이 대화에 참여했다.
“이요?”
“……!!”
“왜요?”
“제안이라면 어떤 제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씀 좀 해보세요.”
관방대신의 발언에 다른 내각 대신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역시 이번 사태를 통해 일본 기업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총리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일본 총리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의 제안은 매우 굴욕적이며 동시에 모욕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그리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대한민국에 온전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일본 정부에서 이와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1,000억 달러의 돈을 연리 1%의 저리(低利)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손에 칼이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는 의 제안을 당장에 내치지 못했다.
1,000억 달러라면 혼수상태에 빠진 일본 경제에 산소 호흡기 역할을 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받아들이시죠.”
“받아들여요? 저들의 제안을?”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도요토미 총리는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이시하라 장관을 노려봤다.
“1,000억 달러입니다. 총리님. 감정에 치우쳐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
“1,000억 달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웅성웅성!
몇몇 대신들은 이 같은 말을 처음 들었다는 표정이다.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일본 경제가 회복되려면 10년, 아니.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
이시하라 장관의 말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입니다.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안 됩니다. 대일본 제국은 조선에 사과할 수 없습니다.”
“……전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이, 이런 날이 올 줄이야.”
2005년 초봄,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지만 일본 경제는 차가운 추위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쿄의 풍경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화폐 전쟁 이전의 도쿄는 일본의 수도답게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도시였지만 작금의 도쿄는 우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물론 모두가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국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일본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바보들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 건넨 구명줄을 외면하다니요.”
“그깟 사과가 뭐가 어렵다고!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독도도 한국의 땅이 맞잖아.”
“한국과 일본의 케케묵은 자존심 때문이겠죠.”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그깟 자존심? 큭!”
“아시지 않습니까? 망해도 힘든 건 늘 대다수의 힘없는 국민들일 뿐이죠.”
“그건 그렇지. IMF가 와도 부자들은 외유에 파티에 명품을 사들이고 있잖아?”
“네. 그렇습니다.”
“암튼 웃기는 족속들이야.”
죠시 대통령의 말에 엘리스펀 의장 역시 미소를 보였다.
“뭐 그 덕에 우리가 이익을 보지 않았습니까? 후후후.”
“그러게 말이야.”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만약 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1,00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이었다면 아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일본 경제가 IMF를 졸업하고 빠르게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의 제안을 거부함으로 일본 1,000대 기업 중 반 이상이 해외 자본에 흡수되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약 4조 엔에 이르는 국방 예산의 80%를 삭감하고 그 예산을 일본 기업에게 지원하지 않았다면 1,000대 기업의 80% 이상이 해외 자본에 잠식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8천억 엔의 국방비는 자위대의 유지비와 인건비를 제외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력이 매우 약해졌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는 한국에 맡겨야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엔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박강현 정부에서 탄도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과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를 공식적으로 요청해 왔습니다.”
그의 말에 죠시 대통령 집무실에는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 선까지 요구했나?”
“기존 300km에서 1,000km입니다.”
“1,000km?”
“네. 남해안에서 발사했을 경우에도 북한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이 포함되겠군.”
“일본 역시 사정거리에 들어갑니다.”
“일본이 반발하겠군!”
“그렇겠죠.”
“…….”
아무리 미국의 국익이 우선이라 해도 나름대로 오랜 동맹이자 우방인 일본을 단번에 배제하고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랴?
일본이 저렇게 퍼진 마당에 한국을 제외하면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1,000km, 1,000km라…….”
“한국 역시 우리 미국의 동맹이자 우방입니다. 또한 북한과 마주하고 있죠. 믿을 수 있는 동맹국입니다. 더욱이 과의 관계도 있지 않습니까?”
“이라면 이태리 작가 말인가?”
“네. 대통령님.”
“흐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만 일본은 자국의 경제와 민생을 살리기 위해 국방에 쓸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중국을 견제할 수 없죠.”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손에 쥔 핏빛 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국이 핵만 보유하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긴!”
안보 보좌관의 말에 죠시 대통령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뭐야? ’
휴대 전화를 꺼낸 선우의 표정이 묘하다.
수십 통의 전화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죄다 모르는 번호네. 누구지?’
그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 설연, 선우의 친한 친구들 몇 명…….
-때르르릉!
때마침 한 통의 전화가 또다시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누구시죠?”
-한진당 당 대표 수석 보좌관 이진석입니다. 제가 바쁘신 분을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알면서 전화는 왜 하시나?’
짜증이 나는 것을 참으며 선우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네. 수석 보좌관님.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당 대표님께서 작가님을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 번호는 제 개인 번호인데 어떻게 아셨나요?”
“아! 그, 그건…….”
안 봐도 비디오다.
당 대표의 힘을 이용해 개인 정보를 열람했겠지.
“제가 조만간 출국을 해야 해서요. 이번은 힘들고 다음에 뵙도록 하죠.”
“……죄송하지만 언제 출국하십니까?”
“내일이요.”
“내일이라면, 그럼 오늘 오후에 어떠십니까?”
“선약이 있습니다.”
“선약이라면, 혹시 중요한 약속입니까? 취소하시면 안 될까요? 저희 대표님이 시간을 내시겠다고 합니다.”
“청와대 박강현 대통령과의 약속입니다.”
“……!!”
이진석 수석 보좌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을 만도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귀국하신 후에 날을 한번 잡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신지요?
“네, 그러십시오. 나중에 다시 통화합시다.”
선우는 전화를 끊는 동시에 그의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올렸다.
되도록이면 정치와는 연관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이제 갈까?”
분주하게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늦지 않게 청와대를 향해 출발했다.
얼마 후 창밖으로 청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문주인 비서실장이 선우를 맞이했다.
“대통령님이 아직 회의 중이시니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보다 차가 막히자 않아 약속 시간보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한 덕이다.
“아닙니다. 제가 일찍 왔습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면,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문주인 실장님.”
“하하하. 제가 영광이죠. 작가님은 대한민국이 낳은 이 시대 최고의 문호가 아니십니까.”
“과찬이십니다.”
“아이고 겸손까지 하십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주제와 선우의 기업관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해피 그룹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작가님이라서 그런 건가요? 어떻게 기업을 그렇게 운영하실 수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문주인 실장의 물음에 선우는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기업의 이윤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람을요?”
“네. 사람이 먼저니까요.”
“사람이 먼저다?!”
“네.”
“그렇군요. 맞습니다. 사람이 먼저죠. 사람이 먼저입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문주인 실장이 가슴 깊은 곳에 큰 울림을 선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우는 마침내 박강현 대통령과 만날 수 있었다.
“지속적인 투자가 우선입니다. 한국은 매력적인 투자처니까요.”
하지만 해피 그룹의 영향일까?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한국 경제에 관한 것이었고 박강현 대통형은 주로 선우의 이야기를 경청하다시피 했다.
“한국 경제는 기초 체력이 튼튼합니다. 또한 우수한 산업 무역 인프라와 함께 높은 개방성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단지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늘 걸림돌이지만 말이죠.”
“그렇군요.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이후 지정학적 위험도가 현저히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네. 그 점에 대해선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만약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선우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작가님이 보시기에 일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일본이요?”
“몇몇 의원들이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 해서요.”
“도움이라면?”
“차관이죠.”
차관을 주자는 소리가 거슬리는지 선우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개인적으로 내키지가 않네요.”
“맞습니다. 비공식적이지만 저 역시 사과하지 않는 저들이 싫거든요.”
박강현 대통령이 속삭이듯 말했다.
‘반일 감정 하나는 확실하군.’
한국이란 나라는 정말 반일 감정이 강했다.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일본의 반성하지 않는, 오히려 적반하장식의 행태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인을 미워하거나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원들이 누굽니까?”
“후후후,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지 않습니까?”
“…….”
하긴 요즘 몇몇 보수 언론에서 이웃나라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논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동조하는 정치인들 역시 존재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