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2화
122화 세상엔 쓰레기들이 많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연희 대학교 상경대학의 현관을 나오며 들려온 목소리다.
“준영이가 도희랑 잤다며?”
“야! 언제 적 얘기야? 그거 한 달도 더 됐다.”
“진짜?”
“그래. 인마.”
남자는 도희 얘기를 꺼낸 친구에게 약간 짜증 섞인 대답을 했다.
“야~~ 걔는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르긴 뭐가 달라. 여자들은 다 똑같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난 준영이 집에서 걔 영상도 봤다.”
“정말?”
“그래. 아주 그냥 장난이 아니었어.”
“헐!!”
“대박~!”
친구들의 놀랐다는 반응에 남자는 기분이 우쭐해졌다.
그저 영상을 봤을 뿐인데……. 저런 표정이라니, 아무튼 남자들의 허세는 알아줘야 한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니들 준영이 컴퓨터에 여자애들 동영상이 몇 개나 있는 줄 알아?”
“여자애들 동영상??”
“응.”
“5개?”
“10개?”
“큭큭큭! 한 50개는 될 걸.”
“……진짜?”
“말도 안 돼! 네가 직접 봤어?”
“어, 당근 봤지.”
남자는 친구들에게 준영에 대해 설명했다.
“준영이 걔는 일단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상처도 받지 않지. 상대가 거절하면 오기로라도 더 달려든단 말이야.”
“맞아. 연애 고수들은 거절에 상처받지 않아.”
“감각이 없는 거지.”
“응? 감각이 없어?”
“아이고! 이해 못 하겠어? 거절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잔디밭에 놓인 벤치에 도착했다.
“게다가 준영이 봐라. 잘생겼지. 집안 좋지. 돈도 많은데, 잘 쓰기까지 해. 무엇 하나 꿀리지가 않잖아~”
“하긴…….”
“다 가졌지.”
그때였다.
그들이 나누던 대화의 주인공이 그 모습을 보였다.
“어! 준영이다.”
그런데 준영의 표정이 이상하다.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고 심사가 매우 복잡해 보였다.
이와 같은 시각,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선우가 연희 대학교를 찾았다.
대학생이 된 여동생과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영문과를 가려면, 이쪽인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놨다.
예약을 한 손님만 입장할 수 있는 프라이빗(private) 레스토랑이다.
배도 슬슬 고파오고 동생과 만나기로 한 시간도 얼추 가까워지고 있다.
선우는 좀 더 속도를 내 발걸음을 옮겼다.
“야! 그래서 아직 안 넘어왔다고?”
“이번에는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신입생이라며?”
“응.”
“그럼 뭐가 어려워? 적당히 분위기 잡고 가방 같은 것 좀 사주면 되잖아.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안 넘어온 년들이 없었잖아. 우리 준영이 많이 죽었네.”
“야. 인마. 됐어. 내가 설마 그런 시도도 안 해봤겠냐?”
“엥?”
“아예 만나주질 않는다. 만나주질 않아.”
“진짜?”
“그래. 몇몇 후배들에게 용돈까지 쥐여 주며 부탁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와! 천하의 강준영이 물먹는 날이 있네. 큭큭큭.”
“쳇! 두고 봐라. 꼭 내 여자로 만들고 만다.”
여기까지는 그냥 바람둥이가 여자 한 명 찍어서 작업에 들어가는 얘기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근데 걔 이름이 뭐라고 했지?”
“혜진이.”
“혜진이?”
“응. 최혜진.”
최혜진이라는 이름이 선우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 걔!!”
“걔 알아?”
“몇 번 봤어. 엄청 예쁘던데?”
“아버지가 출판사를 한다고 들었어.”
“출판사? 그럼 책장사 집 딸내미인가?”
“나도 봤어. 옷 입은 걸 보니 돈도 좀 있어 보이더라고.”
“책 좀 파나 보네.”
“아이고~ 그래 봤자 책 팔이지. 어디 준영이랑 비교가 되냐?”
“하긴, 큭큭큭~”
뭐가 그리 재밌는지 지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다.
“I don’t care. 책을 팔든 가방을 팔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여자가 예쁘기만 하면 되지.”
“후후~ 역시 강준영! 네가 최고다.”
이때, 잠자코 있던 현준이 끼어들었다.
“가족은 어떻게 돼?”
“부모는 당연히 있고, 오빠가 한 명 있다고 들었어.”
“새끼~ 벌써 호구조사까지 했네.”
“기본이지. 인마.”
여동생과 이름이 같다.
게다가 부모님은 출판사를 하고 오빠가 한 명 있다고 한다.
범위를 연희 대학교로 국한한다면 이건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이다.
“이젠 게임 끝났어.”
“어떻게?”
“어제 좋은 것 하나 구했거든.”
“좋은 것?”
“응. 프로들만 쓰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적당한 기회만 잡으면 돼.”
“에이~~!! 그런 걸 쓰면 재미없지 않아?”
“물론 처음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랑 한 번 자면 게임 오버야. 알잖아? 마이 스피드!!”
준영이라는 놈은 멍멍이들의 X행위를 연상시키듯 앞뒤로 허리를 휘둘렀다.
“우워워~~!!”
“이야! 속도 죽이네.”
“게임을 지배하는 건, 바로 스피드!!”
“큭큭큭! 한 번만 하고 나면 내게 매달리게 될 거야!! 이제 적당한 기회만 잡으면 돼. 그러니까 니들이 좀 도와줘.”
“야! 그래도 좀 그렇지 않아?”
“뭐가?”
“아니! 그렇잖아.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걔네 좀 사는 것 같다며?”
“이 자식아. 걱정하지 마.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됐는데 뭐가 문제야? 시작은 그렇지만 나중에 잘해주면 되잖아.”
“그, 그래도…….”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우리 꼰대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 거야. 걱정하지 마라.”
“하긴~ 준영이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
현준은 노골적으로 준영의 집안을 입에 담았다.
“아버님은 잘나가는 국회의원에 어머니는 재벌가의 따님이시지. 캬아~ 조합 죽인다.”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뭐!! 최고지.”
“그래. 이 자식들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 형님 말만 들으면 돼. 알겠냐?”
“알겠습니다요. 형님~~”
“하하하.”
“오케이~”
그 뒤로 떠드는 소리가 났지만 선우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놈들 앞에 섰다.
“이봐.”
낯선 이의 등장에 순간 움찔하는 놈들이다.
“……누구?”
“방금 이야기의 주인공이 영문과에 다니는 혜진인가?”
혜진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녀석들의 눈에 감출 수 없는 당황이 나타났다.
“뭐, 뭐야?”
“이봐, 당신. 당신이 누군데 시비야?”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고 녀석들은 선우의 말에 대뜸 화를 냈다.
“나?”
선우는 모자를 벗었다.
“헉!!”
“……?!!”
“……최, 최선우?”
경악한 표정을 보이는 놈들을 향해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바로 혜진이 오빠다. 친오빠.”
“……!!”
선우의 등장으로 인해 모두가 당황하며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혹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준영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X발!!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뭐?”
“내가 자빠트리겠다고 했지. 자빠트렸어? 자빠트렸냐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축하한다. 넌 지금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뭔 개소리야?!”
“이해 못 했어? 네가 만약 여기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널 용서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 기회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앞으로 기대하고 있어.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야.”
선우는 무표정한 모습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저런 X발 놈이……!”
준영이 흥분해서 선우에게 달려들 기세다.
“워워!!”
“준영아. 참아.”
선우를 향해 달려들 뻔했으나 다행히(?) 놈들의 친구가 놈을 말렸다.
“야! 너 거기 안 서? 야, 이 X발 놈아!! 거기 서. 서라고!!”
그 뒤로 뭐라 욕설이 난무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선우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준영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X발…….”
그도 선우의 명성과 인기를 알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범행을 모의했을 뿐이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는 뜻이다.
“야! 니들 오늘 일 다 비밀이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
“다, 당연하지.”
“그래. 뭐 말만 했지 실제 하진 않았잖아.”
친구들의 입에서는 준영을 변호하는, 준영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 마. 저 새끼 명성과 인기만 있지 실제로 아무 힘도 없어. 알지?”
“그, 그럼 알지.”
“당연하지.”
“준영이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리고 준영이 말처럼 아직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래그래~”
선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녀석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선우가 해피 그룹의 주인이자 투자회사 의 주인이며 동시에 세계 굴지 기업들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런 애송이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준영 역시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기분도 꿀꿀한데, 강의 째고 술이나 빨러 가자. 내가 쏜다. 어때?”
“좋지~~”
“준영이가 쏜다면 당연히 가야지. 우리 어디로 갈까?”
“강남으로 가자.”
“강남?”
“엑셀이라고 물 좋은 클럽이 있어. 거기 가자.”
“오케이~~!!”
“고고!”
한편 선우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여동생 혜진과 만나 조용히 식사를 즐겼다.
-강준영. 연희 대학교 학생입니다.
그리고 강준영을 비롯해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며칠 후,
선우 부자(父子)는 모녀(母女)의 강권적인 선언(?)에 의해 일본에 가게 되었다.
“료칸?”
“응.”
“어디 료칸?”
“구로가와에 있는 료칸인데…….”
여동생 혜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음식 종류가 20가지가 넘어. 근데 그 지역의 특산물만 정성스럽게 사용했다고 하더라고!”
“료칸 이름이 뭐야?”
“겟코쥬 료간.”
“아!!”
“어? 오빠도 알아?”
“이름은 들어봤어.”
“여기 완전 좋아. 전통 가옥인데 마치 호텔 같기도 하고.”
“그래. 정말 좋아 보이더라.”
수연 역시 한 팔 거든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겟코쥬의 사진을 보여 줬다.
“호오~”
사진을 본 규용 역시 관심을 보이자 주말을 이용한 3박 4일의 일정으로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 공항.
“이쪽으로 오세요!”
상냥한 말씨를 가진 입국 심사원이 손짓을 한다.
하지만 정작 입국 심사대에 서자 심사원의 눈길은 무미건조하게 변했다.
선우의 여권을 잠시 훑어보고는 스크린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심사원의 표정이 이내 크게 변하고 말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뭔가 분위기가 요상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 외무성 직원들이 경찰관들과 함께 나타나 선우를 데리고 갔다.
-[이태리 작가의 일본 입국이 거부됨.]
처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농담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이야기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 시대 최고의 작가를 왜 거부한단 말인가? 가장 먼저 이 같은 소식을 파악한 곳은 바로 미국의 중앙 정보국이었다.
-[이태리 작가, 일본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에게 연행됨.]
“엥? 이건 또 뭐야?”
정보원의 문자에 황당해하던 요원 톰슨이다.
그러나 보고서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미친놈들 같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수화기를 들었다.